세상을 다스리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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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8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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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다스리는 능력
창 1:26-31(28-31)
2025.03.09. 강북꽃동산교회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성경에서 이에 해당되는 말씀은 (창 1:1)“태조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믿어 지면 나머지 성경이 다 믿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믿음의 가장 기본입니다. 이것이 믿어질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사실이 믿어지고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인 사실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일과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과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이 처음 만든 사람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만드시고 보이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기 전 육일동안 많은 피조물을 창조하셨는데 오늘처럼 만족하셨던 때는 없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지난 육일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일은 오늘 사람을 위해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살수 있는 복음자리를 만드신 후에 사람을 만드셨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을 다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데리고 에덴동산 중앙으로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창조한 천하 만물을 저들에게 보여주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하늘에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지면에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는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라”(창 2:28-28)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인생은 하나님께 정말 어마어마한 것을 받았습니다. 특별한 은혜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다른 피 조물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세상을 만드셨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이 엄청난 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있다면 무엇으로 가능할까요?
저는 본문에서 두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창 1:27, 개정)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이것 때문에 가능합니다. (창 2:17, 개정)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금한 것입니다. 이것이 능력이 되는 것은 자유의지 때문입니다.즉,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것이 있다면 금하신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있기때문에 선택은 인생이 해야 합니다.
사람은 그 자유의지로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지 말고 순종만 하도록 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인생에게 100% 주시지 않으시고 1%를 금하셨다는 것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정리해 보면 사람이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가능하고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다스리는 원칙이었습니다.
이 원칙이 깨지면 인간은 세상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이 원칙에 중심에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하면 정령 죽는다고 경고를 다 하셨습니다. 이 원칙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께서 따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창 3: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선악과를 먹으면 정령 죽는다고 하셨는데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는데도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먹고 움직이고 몸을 치장하고 걸어 다니는 것입니다. 숨기도 하고, 하나님과 이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먹으면 분명히 죽는다고 하셨는데, 살아 다니고 있으니 당황스럽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는다는 표현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냥 겁주는 이야기였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죽음의 의미가 따로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언제 죽는지, 아니면 전과 달라진 것이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7절입니다. (창 3:7, 개정)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라고 했습니다. 딜라졌습니다.
그동안 아담과 하와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현상입니다. 저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래서 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일은 사단이 저들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창 3:4-5, 개정)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사단이 말 한대로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져서 자신들의 벗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우리를 혼동하게 하는 것은 선악을 구별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혼탁한 이 세대에 성령을 받고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까?
어찌보면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 더 낳은 것 같은데, 이것이 어떻게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선과 악이 가지고 있는 특징 때문입니다.
즉, 선은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고, 악은 해를 끼치는 것인데 여기에 의도가 들어가면, 선이란!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고, 악이란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 3:22, 개정)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보실 때, 사람이 의도를 가지면 세상은 악이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실은 보고 계셨습니다.
일찍이 다윗은 시 14:2-3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다윗이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 사람들을 보고 한 말씀입니다.
바울도 롬 3:10-11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의인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다 죄로 오염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둘은 깨닫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성이 다 망가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증거입니다. 움직인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8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의 또 하나의 이상한 행동이 보였습니다.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라고 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처음 발견된 특별한 현상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혹 찾으실까 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동안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뵙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들은 하나님을 더 이상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죽음의 현상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참고로 불순종한 천사가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났습니다. 쫓겨나온 천사는 이 세상에서 사단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 천사보다 월등한 존재로 지음을 받고, 세상을 다스리는 엄청난 권세를 받은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는데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에덴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당연히 세상으로 쫓아내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꼭 쫓아내셔야 했을까요?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세상으로 쫓아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그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에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금하신 것은 다른 것은 허락한다는 의미인데 선악과를 금함으로 인생에게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의지에 선이 무너졌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사람은 더 이상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약속이고 신뢰의 문제입니다.
선악과에 어떤 독이나 어떤 환각성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사람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선이 무너졌으니 에덴에서는 위험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을 잘 표현한 말씀은 다음입니다. (창 3:22, 개정)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걱정은 선악과를 따 먹은 인생이 생명나무의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염려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급한 조취를 취하셨습니다.
창 3장 23~24절입니다. (창 3:23-24, 개정)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는 곳에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보니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공중의 새와 땅에 기는 짐승과 각종 열매맺는 나무과 또한 그것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인생이 하나님께 받은 가장 큰 선물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유의지였습니다. (창 3:22, 개정)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너지자 하나님은 인생을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하시고 바로 세상으로 쫒아내셨습니다.
여기에 오늘 메시지가 있습니다. 자유의지를 잘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하나님이 주진 가장 물질 건강 명예 다 중요하지만, 자유의지에 선을 잘 지키시기를 권합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적용~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쫓겨나온 그 세상입니다. 이곳은 가시와 엉겅퀴가 가득하고 사자와 독사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병균이 가득한 곳이고 아무런 예고 없이 우박을 쏟아내며 불을 품어 내는 곳입니다. 영적으로는 우는 사자같이 삼킬자를 두르 찾는 마귀가 가득한 곳입니다.
사랑한다기에 믿었고 잘 가르쳐 준다기에 보냈는데 그들이 살인자였습니다. 정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숨기지 않았으니, 이것이 왠 은혜입니까? (창 3:21, 개정)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벌거벗은 모습을 가려 보겠다고 무화가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입었지만 스스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지 못함을 아신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아담과 그 아내에게 입혀서 세상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인 것은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보내시면서 언제가는 저들의 부끄러움을 해결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날 아담과 하와의 옷에 되기 위해 죽은 짐승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진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인생의 부끄러운 죄를 해결해 주실 것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럴 때 성경은 우리에게 회복될 길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타락의 수렁에서 우리를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타락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무능한 우리를, 그리고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창 6:7-8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께서 타락한 사람들을 보시고 한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락한 사람들과 타락한 세상의 피조물들을 홍수로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습니다. 바로 노아입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나”라는 접속사입니다. 노아도 타락했습니다. 노아도 홍수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노아를 예외로 대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따져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노아를 예외로 대해 주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노아는 원래 다른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일까요? 노아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덜 타락했기 때문일까요?
창 6:9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이 말씀을 잘못 읽으면 노아는 타락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구원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성경을 읽어보면 이것이 은혜받은 이후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 받고 난 뒤에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예외로 대우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구원 받은 것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타락하여 홍수 심판으로 멸망 당해야 했던 노아가 구원 받은 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말씀한 것처럼, 이제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 땅의 모든 사람은 다 타락했습니다. 물론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이 사실을 잘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나 우리는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원래 특별한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위임받았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짖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계획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다시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우리 유신의 소욕는 기본으로 성령을 거스린다는 사실입니다.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라고 했고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성령충만입니다.
창 1:26-31(28-31)
2025.03.09. 강북꽃동산교회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성경에서 이에 해당되는 말씀은 (창 1:1)“태조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믿어 지면 나머지 성경이 다 믿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믿음의 가장 기본입니다. 이것이 믿어질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사실이 믿어지고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인 사실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일과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과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이 처음 만든 사람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만드시고 보이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기 전 육일동안 많은 피조물을 창조하셨는데 오늘처럼 만족하셨던 때는 없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지난 육일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일은 오늘 사람을 위해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살수 있는 복음자리를 만드신 후에 사람을 만드셨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을 다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데리고 에덴동산 중앙으로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창조한 천하 만물을 저들에게 보여주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하늘에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지면에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는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라”(창 2:28-28)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인생은 하나님께 정말 어마어마한 것을 받았습니다. 특별한 은혜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다른 피 조물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세상을 만드셨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이 엄청난 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있다면 무엇으로 가능할까요?
저는 본문에서 두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창 1:27, 개정)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이것 때문에 가능합니다. (창 2:17, 개정)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금한 것입니다. 이것이 능력이 되는 것은 자유의지 때문입니다.즉,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것이 있다면 금하신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있기때문에 선택은 인생이 해야 합니다.
사람은 그 자유의지로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지 말고 순종만 하도록 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인생에게 100% 주시지 않으시고 1%를 금하셨다는 것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정리해 보면 사람이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가능하고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다스리는 원칙이었습니다.
이 원칙이 깨지면 인간은 세상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이 원칙에 중심에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하면 정령 죽는다고 경고를 다 하셨습니다. 이 원칙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께서 따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창 3: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선악과를 먹으면 정령 죽는다고 하셨는데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는데도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먹고 움직이고 몸을 치장하고 걸어 다니는 것입니다. 숨기도 하고, 하나님과 이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먹으면 분명히 죽는다고 하셨는데, 살아 다니고 있으니 당황스럽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는다는 표현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냥 겁주는 이야기였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죽음의 의미가 따로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언제 죽는지, 아니면 전과 달라진 것이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7절입니다. (창 3:7, 개정)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라고 했습니다. 딜라졌습니다.
그동안 아담과 하와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현상입니다. 저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래서 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일은 사단이 저들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창 3:4-5, 개정)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사단이 말 한대로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져서 자신들의 벗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우리를 혼동하게 하는 것은 선악을 구별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혼탁한 이 세대에 성령을 받고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까?
어찌보면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 더 낳은 것 같은데, 이것이 어떻게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선과 악이 가지고 있는 특징 때문입니다.
즉, 선은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고, 악은 해를 끼치는 것인데 여기에 의도가 들어가면, 선이란!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고, 악이란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 3:22, 개정)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보실 때, 사람이 의도를 가지면 세상은 악이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실은 보고 계셨습니다.
일찍이 다윗은 시 14:2-3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다윗이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 사람들을 보고 한 말씀입니다.
바울도 롬 3:10-11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의인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다 죄로 오염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둘은 깨닫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성이 다 망가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증거입니다. 움직인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8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의 또 하나의 이상한 행동이 보였습니다.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라고 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처음 발견된 특별한 현상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혹 찾으실까 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동안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뵙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들은 하나님을 더 이상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죽음의 현상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참고로 불순종한 천사가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났습니다. 쫓겨나온 천사는 이 세상에서 사단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 천사보다 월등한 존재로 지음을 받고, 세상을 다스리는 엄청난 권세를 받은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는데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에덴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당연히 세상으로 쫓아내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꼭 쫓아내셔야 했을까요?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세상으로 쫓아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그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에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금하신 것은 다른 것은 허락한다는 의미인데 선악과를 금함으로 인생에게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의지에 선이 무너졌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사람은 더 이상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약속이고 신뢰의 문제입니다.
선악과에 어떤 독이나 어떤 환각성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사람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선이 무너졌으니 에덴에서는 위험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을 잘 표현한 말씀은 다음입니다. (창 3:22, 개정)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걱정은 선악과를 따 먹은 인생이 생명나무의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염려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급한 조취를 취하셨습니다.
창 3장 23~24절입니다. (창 3:23-24, 개정)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는 곳에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보니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공중의 새와 땅에 기는 짐승과 각종 열매맺는 나무과 또한 그것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인생이 하나님께 받은 가장 큰 선물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유의지였습니다. (창 3:22, 개정)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너지자 하나님은 인생을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하시고 바로 세상으로 쫒아내셨습니다.
여기에 오늘 메시지가 있습니다. 자유의지를 잘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하나님이 주진 가장 물질 건강 명예 다 중요하지만, 자유의지에 선을 잘 지키시기를 권합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적용~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쫓겨나온 그 세상입니다. 이곳은 가시와 엉겅퀴가 가득하고 사자와 독사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병균이 가득한 곳이고 아무런 예고 없이 우박을 쏟아내며 불을 품어 내는 곳입니다. 영적으로는 우는 사자같이 삼킬자를 두르 찾는 마귀가 가득한 곳입니다.
사랑한다기에 믿었고 잘 가르쳐 준다기에 보냈는데 그들이 살인자였습니다. 정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숨기지 않았으니, 이것이 왠 은혜입니까? (창 3:21, 개정)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벌거벗은 모습을 가려 보겠다고 무화가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입었지만 스스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지 못함을 아신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아담과 그 아내에게 입혀서 세상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인 것은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보내시면서 언제가는 저들의 부끄러움을 해결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날 아담과 하와의 옷에 되기 위해 죽은 짐승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진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인생의 부끄러운 죄를 해결해 주실 것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럴 때 성경은 우리에게 회복될 길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타락의 수렁에서 우리를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타락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무능한 우리를, 그리고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창 6:7-8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께서 타락한 사람들을 보시고 한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락한 사람들과 타락한 세상의 피조물들을 홍수로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습니다. 바로 노아입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나”라는 접속사입니다. 노아도 타락했습니다. 노아도 홍수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노아를 예외로 대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따져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노아를 예외로 대해 주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노아는 원래 다른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일까요? 노아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덜 타락했기 때문일까요?
창 6:9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이 말씀을 잘못 읽으면 노아는 타락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구원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성경을 읽어보면 이것이 은혜받은 이후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 받고 난 뒤에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예외로 대우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구원 받은 것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타락하여 홍수 심판으로 멸망 당해야 했던 노아가 구원 받은 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말씀한 것처럼, 이제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 땅의 모든 사람은 다 타락했습니다. 물론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이 사실을 잘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나 우리는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원래 특별한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위임받았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짖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계획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다시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우리 유신의 소욕는 기본으로 성령을 거스린다는 사실입니다.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라고 했고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성령충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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