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거하라
요한복음 15:1-12(7-12)
2024.06.09. 강북꽃동산
1971년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에서 주목할 만한 실험 하나를 했습니다. 신문광고를 통해서 실험 대상자를 모집했고, 광고를 보고 찾아온 24명을 무작위로 두 그룹으로 나누어 정해진 룰에 따라 2주 동안 12명은 간수 역할을 그리고 다른 12명은 죄수 역할을 하게 했습니다. 시작하기 전 24명은 서로 악수를 하고 우리 모두 선량한 시민이기 때문에 서로 잘해보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두 그룹 사이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는 간수 역할을 한 그룹은 날이 갈수록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자들이 되었고, 죄수 역할을 한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눈치를 보며 비굴해져 가더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간수 역할을 맡은 사람은 간수처럼 변하고, 죄수 역할을 맡은 사람은 죄수처럼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대학은 이 실험을 통해서 자기를 누구라고 생각하며 사느냐에 따라서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 지에 대해 연구결과를 얻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는 셀프이미지라고 합니다.
셀프이미지란! 셀프와 이미지의 합성어로 “자기 자신 스스로가 나는 누구라”고 생각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다른 단어는 자존감이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은 셀프이미지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한날은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다. 그리고 너희는 가지이고 하나님은 농부이시다. 하나님을 농부로 주님은 포도나무로, 우리는 가지라고 셀프이미지화 하셨습니다.
주님이 설정한 셀프이미지화의 효과는 어떨까요? 위에서 간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자들이 되고, 죄수 역할을 한 사람은 날이 갈수록 눈치를 보며 비굴해졌던 것을 생각하면 주님이 정하신 셀프이미지화도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을까요? 기대를 하면서 특별한 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셀프이미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의 설정입니다.
즉, 간수냐, 죄인이냐, 나무냐, 가지냐, 농부냐는 것이지요? 이것이 중요한 것은 그 설정에 따라서 간수가 되어가기도 하고 죄수가 되어가기도 하고 나무가 되어가기도 하고 가지가 되어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오늘 우리의 셀프 이미지는
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지만 생각하고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다른 생각 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결코, 나무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의 나무가 누구이며, 농부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무조건 중요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 8절에는 나무와 농부에 대해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 15:2, 개정) “무릇 내게 붙어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요 15:8, 개정)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무릇 내게’는 나무인데 예수님이시고, 열매 없는 가지를 제거해 버리신다는 분이 계시는데 그는 농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농부이신 하나님은 열매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어도 열매가 없을 때는 제거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지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9절에는 나무이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 15:9, 개정)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라고 했습니다. (요 15:16, 개정)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택하신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열매를 맺게 하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구하는 것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정리해 보면 우리가 가지가 된 것은 예수님의 선택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나무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핵심은 열매를 맺으라 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모든 농부가 땅에 무엇인가를 심었다면 열매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냥 심심해서 땅에 무엇을 심는 농부는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 나라 농장에 있는 생명나무의 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생명나무는 예수님이십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열매 맺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풍성한 축복의 거름과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시고,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의 가지를 묶어 주시고 받쳐 주시고 악한 마귀가 역사하지 못하도록 천군 천사들을 보내셔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믿습니다. 열매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농부이신 하나님은 오늘도 열매에 대한 기대를 가시시고 계십니다. 좋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4절입니다. (요 15:4, 개정)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 15:5, 개정)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거하라’입니다. 지금부터는 ‘거하라’에 주목하겠습니다.
처음 주님은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나무에
붙어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요 15:2, 개정) “무릇
내게 붙어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그런데 4절 이하를 보면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붙어있는 것과 거하는 것은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적용할 때는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거하라’는 말씀을 이해해야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하라의 뜻을 알고 계시는 지요?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 안에 거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아는 알아야 열매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제자들이 예수님 몸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떨어지지 않고 붙어 다닌다는 뜻일까요?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자들은 “내 안에 거하라”는 이 말씀을 알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문제는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가 가까운 때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 거하라 하신 말씀은 함께 하늘로 가자는 뜻일까요?
그렇게 볼 때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에는 두 가지 어패가 있습니다.
하나는 떠나시면서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신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사람 안에 거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곁에 계시면서 거하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래도 이해가 될턴데 떠나시면서 거하라가 의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곁에 있을 수는 있어도 피차가 서로의 안에 있다는 말은 어폐가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사전에서 “거한다”는 종교적 맥락에서, 특히 기독교에서는 “예수님 안에 거한다”라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는데,
이는 예수님과의 영적인 연합과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말씀하시는 나무가 열매를 맞는 것과 같은 성도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길은 예수님과의 영적인 연합과 교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거하라’는 말은 영적인 연합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거하시는 것과 같은 영적 연합의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연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거한다는 말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영적인 연합 관계를 갖는 것처럼, 가지인 우리가 나무인 예수님과 농부이신 하나님과 영적인 연합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쓰셨습니다. 4절입니다. (요 15:4, 개정)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말입니다.
이는 놀라운 일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날은 성령이 오시면 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성령시대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거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거하라는 말은 한마디로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 말씀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봉사 충성 헌신 헌금 기도 예배 선교 사역을 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뜻 가족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주님이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거하는 것이고 그러면 열매가 달린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의 열매를 보시기 원하시고 하나님께 드리기 원하십니까? 사랑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적용 ->
오늘 예수님은 셀프이미지를 통해서 우리를 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는 나무에 붙어있어 합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열매를 위해서 씨를 뿌려야 하는 것도, 거름을 주어야 하는 것도, 풀을 뽑아야 하는 것도, 해충을 막아 내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지로서 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의뢰로 많은 분들이 이것을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붙어만 있어서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거름도 주고, 가라지도 뽑고, 해충도 물리쳐야 하는 것 아니야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농부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역할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가지인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땅에 가라지, 가시와 같은 원수들이 있습니다. 그거 우리는 제거 못 합니다.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세상에 해충과 같은 마귀들이 많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죽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소관입니다. 적당한 공기 햇볓이 없이는 좋은 열매 맺을 수 없는데 그것도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을 농부화하셨습니다. 농부는 늘 열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