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의 비밀
사 10:20-23
2025.07.20. 강북꽃동산교회
요즘 우연히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당연히 복음을 전하려고 하겠지요. 교회를 다니느냐고 했더니 교회 집사라고 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네요. 그런데 지금은 교회는 안 다닌답니다. 그래서 이끌어 주려고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한 것은 이번주에 몰몰교인을 집으로 초대했다는 소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절대로 안 되다고 했고, 안되는 이유는 그들이 가르침을 받지 않을 것이고 그들이 가르침을 받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저들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애굽의 바로를 예로 들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이적과 표적을 아무리 보여 주어도 저가 믿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저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대화를 시작했는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화를 종료할 목적으로 천국이야기를 꺼냈는데, 자기는 천국에 갈 마음이 없답니다. 그러면 성경은 읽고 직분은 어떻게 받았느냐고 했더니 다른 사람을 좋을 길로 인도하려 그런다는 것입니다. 이단 같습니다.
내가 가진 능력으로 그를 옳은 길로 인도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 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 주변에 믿는 사람은 꽤 있은 것 같은데 저들이 다 구원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을 또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구원을 말할 때 늘 적은 수를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맷돌을 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열 명이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가 다섯 명은 잔치에 들어가고 다섯 명은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구원으로 가는 길은 좁은 길이고, 멸망의 길은 넓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 하실 대도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했지만, 실제로 구원받은 사람은 노아의 가족 여덟 명 뿐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했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오직 롯과 두 딸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기회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을 청하시고 구원의 선물을 준비하셨지만, 오는 사람은 적었습니다.
선택받은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것보다 그 선택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에 열심히 믿었던 것도 좋지만, 지금 믿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사야가 처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 보좌에 앉으신 주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의 보좌가 높이 들렸는데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고 스랍들, 천사들이 주를 모시고 섰는데, 천사들을 자세히 보니 천사의 날개가 여섯개였습니다. 이 날개 중에 둘은 자기의 얼굴을, 둘로는 발을, 둘로는 날며 거룩하가 거룩하다 하며 찬양을 했습니다. 이 천사들의 찬양을 소리로 성전 문지방이 요동했고 성전 안에는 연기가 충만했습니다. 신기하고 또 놀라웠습니다.
이것을 본 이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망했다.” 6장 5절이죠 (사 6:5, 개정)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사야 왜 이러는 것입니까? 망했다니요. 화라니요. 망했다는 표현은 한국어에서 굉장히 자주 쓰이는 감탄사인데요, 직역하면 어떤 일이 실패하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음을 뜻해요. 하지만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다채롭게 쓰이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시험을 망쳤을 때: “아 망했다… 이번 중간고사 완전 폭망임.” 실수했을 때: “헉, 메일 잘못 보냈어. 망했다.”
이사야 왜 이러는 것입니까? 다음 구절에 그가 망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입술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왕이신 하나님을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중 왕이신 하나님을 뵈었기 때문에 망했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 인생이 하나님을 뵈면 죽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잘 못 뵈면 죽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경우 망했다는 의미는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해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입술 때문에 망했다는 것은 조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입술 때문이라면 잘 못 말하고 남을 비난하고 저주하고 하나님을 잘 못 전했을 것 같은데 이사야가 그렇게 입술로 죄를 지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에 이런 반응에 하나님의 생각이 어떠하신지가 궁금합니다.
이사야의 말을 듣고 있던 천사가 숫불에 달궈진 부젓가락을 들고 날아 옵니다. 그러더니 그 부젓가락을 이사야 입술에 대며 네 죄가 사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났는데 주님의 음성이 귀에 들렸습니다. 8절입니다. (사 6:8, 개정)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시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때 이사야가 저를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에게 아주 부정적인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사 6:9-10, 개정)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왜 그렇다는 것입니까?
10절입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부정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둔하게 했고 귀를 막고 눈을 감기게한다는 말씀아닙니까? 그렇게 안 하면 저들이 보고 듣고 깨달아 다시 돌아와 고침받을까 염려가 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백설들에게 많이 서운하신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신 것으로 느껴집니다. 다음 구절에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포기가 확실해 보이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 6:13, 개정)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무슨 일입니까? 십분의 일이 남아 있을지찌도 황폐하게 된다는 말을 무슨 말이며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한다는 말을 무엇이고 그루터기는 무슨 말입니까?
신경이 쓰는 것은 남아있는 십분의 일과 밤나무 상수리 나무입니다. 밤나무 상수리 나누가 베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타락의 정도를 이야기 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는 밤나무 상수리나무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십분의 일이 있을지라도 그 땅에 황페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섭습니다. 이스라엘 왜 그런 것입니까?
당시 나라의 상황을 잘 표현한 대표적은 성경구절은 다음입니다. (사 10:1-2, 개정) “1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2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이사야 선지자 사명이 큽니다. 그는 이런 사실을 빨리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남달리 구별해서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하고 범죄 했다고 말입니다. 밤나무 상수리 나무도 황페헤 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와 교회에 일들을 보면서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직 좀더 주도 봐야겠지만 나가가 우상의 돈을 먹고 그래서 압수수색을 했다면서요 이제라도 중단되고 밝혀졌으니 잘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번기회에 이단 사이비 종교를 몰아내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이것이 두려운 것은 다음은 기독교가 조사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불가침의 영역입니다. 종교 불가침은 종교의 영역이 정치나 외부 권력으로부터 침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의미해요. 특히 헌법이나 사회적 합의에서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죠.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나님이 막아 주시지 않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교회를 목회자를 지켜 주시지 않으신다면 교회는 목회자는 추한 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서 충문히 보아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를 돌모지 않으시니 사람들이 예수를 밧줄로 묶습니다. 채직으로 때리고 십자가에 못을 밖아 언덕위에 세워놓습니다.
주님은 당시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때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성겼ㄱ디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더 이상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은혜가 없는 저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전을 거룩한 곳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성전을 정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을 통해서 새롭게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십니다.
지금 우리가 이처럼 주님을 마음것 찬양하고 예배 할 수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은혜인 줄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 민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말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사명을 다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특헤 입술로 지은 죄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결코 하나님의 정화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되겠습니다.
결국 이야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남은 자의 설법을 준비했습니다. “남은 자”라는 설법에는 참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씨를 말리지는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남은 자”라는 말씀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이제. 슬프지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 이사야 선지자의 남은 자의 설법을 듣겠습니다.
남은 자의 설법의 시작은 (사 6:13) “그중의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한 마디로 남은 자를 거룩한 씨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화하신 땅에 남은 자를 거룩한 씨로 파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역사를 위해 저들을 거룩한 씨로 파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넘치는 공의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 10:22, 개정)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그래서 우리는 남은 자가 되어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역사의 역군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면 누가 남은 자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남은 자가 될 수 있을까요?
20절입니다. (사 10:20, 개정)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친자는 누구입니까? 강대국 앗수루 같은 나라이지요.
이 땅에는 늘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강한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그 나라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히 11장을 보면 성경이 말씀하는 대표적인 남은 자들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아벨에서부터 라합에 이르기까지 10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어떻게 남은 자로 정화의 시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거룩한 씨로 새로운 구원역사의 그루터기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답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 답은 한 마디로 ‘믿음’입니다. 히 11장을 보면 ‘믿음으로’라는 표현이 무려 18번이나 나옵니다. 저들이 행한 모든 행위의 동기가 공통적으로 ‘믿음’이었다는 말입니다.
특히 1-3을 보면 저들이 지켜낸 믿음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리고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그러니까 한 마디로 믿음이란 볼 수 없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보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남은 자들은 바로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군 사이의 3차 중동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랍이 인구가 1억 6천만이고 이스라엘의 인구는 고작 260여 만이었습니다. 군사력으로나 무엇으로 봐도 상대가 안 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의 전쟁을 이끌었던 모세다얀이라는 국방장관이 호언장담했습니다. ‘우리는 신무기로 무장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러면서 이 전쟁은 속전속결로 끝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서방 언론이 그 말에 주목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핵무기나 아니면 화학무기를 준비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전쟁은 모세 다얀의 장담대로 6일 만에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예 ‘6일 전쟁’이라는 고유명사가 생길 정도로 이 전쟁은 전쟁사에 길이 남을 전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쟁 중에 그 어떤 신무기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자들이 모세 다얀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말한 신무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때 모세 다얀이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우리가 준비한 신무기는 바로 시 121편 말씀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그렇습니다.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그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신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바로 남은 자들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남은 자가 되려면 이런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둘째, 타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왕상을 보면 엘리야 시대 우상숭배가 강요되고 너나 할 것 없이 우상숭배에 타협하던 때 남은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이런 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셨고, 저들과 함께 새로운 구원 역사를 펼칠 것을 명하셨습니다.
왕상 19:1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우상숭배가 극심하던 때에도 우상숭배에 타협하지 않은 사람 7,000명이 남아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아합 왕은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한 뒤 본격적으로 우상숭배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당시 북왕국 수도인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아세라 상도 세웠습니다. 왕실이 앞장서서 우상숭배를 자행했습니다.
왕비 이세벨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포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상 앞에 절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살기 위해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우상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이 7000명이나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생명을 걸고 우상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남은 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로 하여금 새로운 구원 역사의 거룩한 씨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타협’이라는 말은 사전을 보면 “어떤 일을 서로 양보하여 협의함”이라고 정의되어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인 우리가 타협을 하려면 믿음을 양보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과 협의하여 서로 합의점을 도출해 가게 됩니다.
이렇게 타협을 하게 되면 한 마디로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는 여전히 믿는 것이라고 자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것을 믿는 것이라고 여기시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듯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시험합니다. 이 시험을 잘 이겨야 합니다.
다음으로 박해를 이겨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는 가운데 핍박도 겪게 되고 또한 박해에도 직면하게 됩니다. 이 때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은 자가 되려면 믿음의 지조를 지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남은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남은 자들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시대에 남은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 교회의 새 성전시대에 남은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하고, 타협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