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성령을 만났을 때
마태복음 4:1-11
2025.02.23. 강북꽃동산교회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를 잃어버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예수님 12살 때,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예수를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사흘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에서 찾았는데, 그때 예수님은 그 부모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아버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그 후로부터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정확히 예수님 나이 30살 때, 예수님의 흔적이 수일째 보이질 않았습니다. 수일이 뭡니까? 한 달째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어디에 가셨을까요? 전화도 핸드폰도 없는 시대에 연락도 안 되고 제일 답답한 것은 예수님의 부모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의 부모가 예수님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부모는 예수님의 행동을 하나님의 행동으로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어딜 가신 것입니까? (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라고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와 계시는 곳은 광야 한 복판이었습니다. 예수님 도대체 왜 여기 계시는 것입니까?
다행히 해를 피할 그늘은 있었지만, 밤에 추위를 피할 어떤 공간은 없었습니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없었고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흔적도 없었습니다. 음식을 만들거나 먹은 흔적도 없었습니다. 맹수로부터 위험은 늘 있었습니다.
주님 왜 여기에 와 계신 것입니까? 주께서 여기에 계신 것을 가족은 알고 있는 것입니까?주님이 여기 계신 일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광야에 계신 것은 성령에 끌려가셨고 그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이나 금식하시며 주리신 상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두 가지 특별한 점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광야에 와 계시면서 40일동안을 금식하며 주리신 것과, 또 하나는 예수께서 마귀에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점입니다.
둘 다 이해하기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다는 것과 금식하게 하게 하신 것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셨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자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삼위일체를 이루셔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신데, 마귀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천사였는데,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 그런데 어떻게 창조자가 피 조물에게 시험을 받으실 수 있습니까?
약 1:13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시험하시지도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을 시험하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어쩌면 간단합니다. 이런 말 하기에 마음은 아프지 마귀가 볼 때 예수는 시험할 만한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들에게 충격이 되는 것은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만만히 보고 닦아가 시험을 했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일을 가감 없이 기록한 저자의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오늘 은혜를 받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시험을 받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음 성경말씀입니다. 히 4:15-16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의 연약함, 동정은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마귀에게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일종의 인간 체험행사에 잠시 참여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와 상정이 같은 연약한 인간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의 인성만 보고 시험하려고 덤벼든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상정이 같으신 분이시라는 것은 우에게는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이 인간이시라야 우리의 죄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증명해 주실 뿐아니라 시험받으실 자리까지 낮추신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시험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체휼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당하신 시험은 무슨 시험이었습니까? 마귀가 예수님을 어떻게 시험했습니까? 세 가지를 시험했습니다.
먼저 3절입니다.(마 4:3, 개정)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 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때는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신지 40일, 금식하여 주리신지 40일이 넘은 상태입니다. 그 때 마귀는 예수님께 와서 돌로 떡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위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상정이 같으신 인간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욕구는 생존의 욕구입니다. 예수님은 40일동안 굶주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먹는 생각에 집중되어 있으십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금식을 해보면 알지만 끝나는 시점에 오면 통닭 피자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데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 정말 군침이 넘어가고 말았을 것같습니다.
마귀가 첫 번째로 생존 시험을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귀의 얄팍한 머리에서 나온 수입니다마는 예수님께서는 40일을 금식하셨다는 점을 이용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는 지금 당장 인간이 처해 있는 긴급한 문제를 이용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미끼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것 없이는 죽을 것 같은 것, 너무도 좋아하고 사랑해서 미칠 것 같은 것, 그런 것을 통해서 시험합니다.
성도 여러분!마귀는 우리가 마음에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에게 마음을 빼앗으려고 수를 습니다. 그런데 그 수가 얄팍하지만, 많은 사람이 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마음을 빼앗기면 몸을 빼앗깁니다. 생활을 빼앗깁니다. 인생을 빼앗깁니다.
두 번째 마귀의 시험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마귀가 지명한 성전은 남쪽 아래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는 곳입니다. 골짝이 위에 성전은 높습니다. 그래서 그 성전 꼭대기 위에서 뛰어내린다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마귀는 왜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을까요? 마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6절이지요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시 91:11-12)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뛰어내리면 하나님께서 사자들을 명하여 받아주실 것이고, 그래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당황스런 것은 너무도 합리적이고 놀라운 것은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여러 가지 공생애 사역을 하실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뛰어내려서 한 번에 메시아임을 드러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은 한순간에 소위 스타가 되었을 것입니다. 단박에 메시아로 따르는 이들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사역도 대단하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입니다.
마귀의 두 번째 전략 역시 얄팍한 수에 불과한데 그는 우리 인생의 목표를 건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며 이루고자 하는 그 목표를 시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공한 다음에 열심히 하겠다는 것, 부자가 된 다음에, 사정이 좋아진 다음에 열심히 하라는 유혹입니다. 학생으로 말하면 대학 들어간 다음에 교회에 나온다. 교회로 말하면 성장한 다음에 선교한다. 유혹입니다. 그래서 못하게 하고 편하게 하고 함리와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귀는 우리가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에서 틈을 찾아 믿음을 흔들어 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세 번째, 마귀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고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라 그러면 세상에 보이는 것을 다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에게 하는 시험치고는 너무도 가능성이 없는 시험을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귀는 어떻게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절을 할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세 가지 시험 카드 중에서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카드로 사용했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시험이 예수님께 가장 합리적인 제안으로 보았습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천하만국을 접수하여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마귀는 천하만국을 손에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 무서운 일입니다. (엡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라고 했는데 여기서 공중권세를 잡은 자는 마귀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에게 절하고 협조하면 어머어머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명예, 부, 권력 돈 그런 다 얻을 수 있습니다.
사탄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거래를 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으로서는 한 번만 머리를 숙이면 손쉽게 목적을 달성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탄이 제의한 대로 그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접수할 수 있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외교 등 여러 곳에서 말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마귀의 시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마귀는 우리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제안을 하면 흔들릴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뜻밖의 달콤한 제안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귀의 이 얄팍한 시험에 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마귀가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마귀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마귀를 안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피해서 살 수도 없습니다. 그들과 협력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10절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4절, 7절‘기록되었으되’라고 했습니다.
정리해 보면 주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쳤던 것으로 정리되었습니다. 그것은 진리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설교자는 성도에게 이 세상에서 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라고 늘 가르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라고 했는데 (시 91:11-12)말씀인데 마귀가 이것을 인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마귀는 성경도 잘 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된 말씀은 (행 19: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마술사를 덮쳤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읽어야 하며 알아야 마귀를 이길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마귀는 영물입니다.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안다 하여도 마귀만큼 알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마귀를 물러가라고 말하고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는데, 중요한 것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말씀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바로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예수님 위에 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때부터 예수님께서 성령과 함께하시게 되셨고 성령에 이끄심을 받으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겪으신 첫 번째 일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신 것이 성령 받기 이전이 아니라 후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공사역을 하시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감당하시기 힘드실 것을 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먼저 성령을 보내셔서 함께 하시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시험을 가볍게 이기실 수가 있게 말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께서 예수님을 이끌고 시험의 자리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시험을 하긴 했지만, 성령이 이 시험을 주도하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가 시험을 할 때, 성령의 감동으로 넉넉히 이기셨습니다.
우리가 마귀에게 시험을 당할 때 쩔쩔매는 것은 나 혼자서 마귀의 시험에 맞서기 때문입니다. 또 마귀가 시험을 하는데 마귀의 시험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라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마귀를 대적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일고 안다고 마귀를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율법)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은 바리새인 서기관들 일것입니다. 이들이 마귀를 대적하고 쫓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먼저 성령에 이끌려야 한다는 것이고 진리가 성령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중요한 말씀은 그런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 성령님은 마귀가 득실거리는 광야로 예수님을 이끄시고 나가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성경에서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진리가 성령을 만났다는 것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진리가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마귀가 시험 할 때 그것이 마귀의 시험인지 알기가 어렵고, 또 안다고 해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 능력이 없습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께서 능력이 있고 마귀가 어리석은 것은 예수께서는 성령에 이끌리어 왔다는 사실이고 마귀는 그것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적용~
지금은 진리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진리가 혼탁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판단으로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수 없이 많은 성경, 설교, 간증, 논리, 예배 찬양, 이적 표적이 넘쳐 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한데, 한편으로는 헛갈리고 혼동이 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눅 7: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럴 때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답은 진리가 성령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처럼 성령과 함께 해야합니다. 특히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말씀이 성령을 만나야 마귀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총알과 같고 성령은 총과 같습니다. 한 주간도 진리의 말씀이 성령을 만나 강한 힘을 발휘하서서 능력있는 한주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