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목자의 생각은
눅 15:4-7(120)
2008.08.17
2011.05.29.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2019.07.14.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어린 손자를 맡아 기르던 할머니가 아이와 시장에 갔다가 아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날 네 살박이 아기는 할머니가 물건을 고르고 흥정하는 과정에서 없어졌습니다.
할머니가 얼마나 놀랐을까요? 아이가 옆에 없는 것을 안 할머니가 갑짝이 “성철아”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다 쳐다보았습니다. 할머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할머니는 물건 흥정이고 뭐고 시장바구니를 내팽개치고 미친 사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아이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렇게 시장을 몇 바퀴 돌았는데, 시장 귀퉁이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한 한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할머니도 엉엉 울면서 어이구 내새끼 하며 아이를 끌어 않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다시 내팽개쳤던 가방을 찾으러 왔습니다. 가방은 길가에 쓰러져 있습니다. 야채는 사람들에게 밝혔는지 망가졌습니다. 그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유는 잃었던 손자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할머니에게 아이는 귀한 존재입니다. 내 피붙이기에 때문입니다. 할머니에게는 손자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아이를 위해서 돈 씁니다. 자기 목숨까지 바칠 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아이를 잃어버리는 순간 시장바구니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이를 찾는데 짐이 된다면 팽개칠 수 있습니다. 한 푼 두 푼 깎고 흥정했던 것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아니 여기서 계산 따위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양 100마리를 기르는 목자가 있는데, 방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상해서 보니 양 한 마리가 없어졌습니다. 왠지 좀 부족하게 보이는 양, 바로 그 양이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다리를 약간 저는 그 양이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순간 목자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이유는 이제 본격적으로 맹수들의 활동이 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가던 길을 멈추고 양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 꼼짝 말고 이곳에 있어야 해, 흩어지면 안 돼, 왜 그러는지 알지” 저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자는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오던 길을 뒤돌아 가면서 찾았습니다. 풀숲이나 낭떨어지기를 중심으로 살피며 찾아봤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양은 비탈길로 굴러떨어진 것입니다. 다행히 맹수의 접근이 없었습니다. 목자는 단숨에 내려가서 양을 끌어 않았습니다. 바로 그 양이었습니다. 다리가 좀 불편했던 그 양말입니다. 목자는 양을 안고 즐거워했습니다. 입을 맞췄습니다. 그리고 야단치지는 않았습니다. 혼내지도 않았습니다. 때리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5절입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라는 부분입니다.
이것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목자가 길 잃은 양을 찾은 다음에 않아 주고, 뽀뽀해주고, 머리 쓰다듬어 주고 낭떨어지기에서 올라와서는 양을 어깨에 메고 다른 양들이 있는 곳으로 왔고, 여기서도 내려놓지 않고 계속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어깨에 메고 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중요한 내용인데 어떻게 중요한 일일까요?
목자가 양을 어깨에 메고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양이 너무 무거워서, 안전을 위하여 걷지 못하기 때문에, 양이 목자의 어깨에 올라가 있으면 편하기 때문입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기엔 아닌 것 같습니다. 양의 편의와 안전을 위해서는 목가가 양을 어깨에 메는 것보다 가슴으로 안는 것이 더 낳다고 생각합니다. 양을 사람의 어깨에 멘다. 생각해 보세요. 양은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양의 갈비뼈가 사람에 어깨에 닿으니 또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러면 목자가 양을 굳이 어깨에 메고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깨에 주는 의미 때문입니다. 어깨는 힘과, 영광과, 권위와, 자랑의 상징입니다. 세계의 모든 군인들은 어깨에 계급을 답니다. 대게 별은 어깨에 답니다.
그렇게 볼 때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서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왔다는 것은 하늘에 별을 딴 것 만큼이나, 이 땅에 벼슬을 얻은 것 만큼이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목자의 마음은 잃은 양을 찾아 너무 기쁘다는 것입니다. 자랑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양이 다리를 다쳐서 걸을 수 없기 때문에 목자가 어깨에 메고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찾은 것이 너무 좋고 자랑스럽고 기뻐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목자 너무 좋은 목자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목자를 주목하고자 합니다. 오늘 설교 말씀의 핵심은 이 목자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이 목자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6절입니다. (눅 15:6, 개정)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목자가 길 잃었던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갑자기 잔치를 한다는 것입니다. 친구와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목자의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목자가 잔치를 하는 것은 자신의 생일이기 때문도 아니고, 아들이나 딸의 혼례로 인한 것도 아니고 길을 잃었던 양을 다시 찾았기 때문에 잔치를 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것이 어떻게 명분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집에서 키우던 애완견을 잃었다가 다시 찾으면 일가친척을 불러서 잔치를 하실 수 있습니까? 아니면 그런 분을 보신적은 있습니까? 물론 얼마든지 그런 분이 계실 수는 있지만 흔하지는 않습니다.
6절에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잃어버렸던 양 한 마리를 찾았다고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자의 행동을 좀더 관찰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경제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목자가 베푼 잔치가 앞으로 목자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치인들이 손해 보는 잔치를 하겠습니까? 잔치를 했다면 표를 위해서 다 미리 베푸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목자도 손해 보는 잔치를 하지는 않을 거 아니겠습니다.
뭐 나중에 지역에 어떤 자리를 염두해두고 이렇게 자치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기분파인가요? 그러면 오늘 잔치에 경비가 얼마나 들어가는 계산을 하고 하는 건가요?
양 한 마리 가격은 얼마나 할까요? 양의 종류와 나이에 따라 편차가 크지만 2~30만원 정도합니다. 우리나라는 양을 그렇게 많이 키우지 않아서 5~60만원 정도합니다.
그런데 호주에서는 양 한 마리가 우리 돈으로 2만원정도 합니다. 비싸도 5만원 합니다. 당시 유대 땅에서 주로 양을 키웠기 때문에 양 값은 호주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5만 원정도입니다. 그렇게 볼 때 목자는 5만원을 잃었다가 찾았기 때문에 잔치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 친구와 이웃을 초청해서 조촐하게 잔치를 한다고 하면 얼마나 들까요? 20명을 초청한다고 할 때, 1인당 식사와 간식 비를 합하면 2만 원 정도는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40만원이 든다는 계산입니다. 만원만 잡아도 20만원 들어갑니다.
경제적인 논리로 계산해 보면 5만 원짜리 양을 잃었다가 찾아서 들어간 비용은 20~40만원 들었습니다. 이것은 상식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사업을 하면 망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당시 목자들은 비즈니스의 관점으로 양을 다뤘습니다. 비즈니스 관점에서 보면 그 양의 가치는 5만원입니다. 비즈니스 관점에서 이렇게 돈이 많이 들어갈 일이라면 양을 잃었을 때 그 양이 다리를 절거나 병들었으면 99마리 안전을 위해서 버리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한 목자의 특별한 행동을 보여주고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비즈니스가 아니잖습니까?
그러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잔치한다”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와같이 목자가 잃은 양 한 마리 찾으면 잔치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죄인 한 명이 회개하면 잔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길을 잃었던 한 마리의 양은 아직 죄를 회개하지 않은 세상에 어떤 사람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양의 상태는 어떤 상태였습니까? 우선 무리 중에서 이탈된 상태입니다. 그것이 자의 던 타의던 무리 중에 함께 있지 못하면 위험한 상태입니다. 동물에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맹수는 꼭 이런 짐승을 잡아먹습니다. 맹수는 동물의 무리들을 따라 다니다가 대열에서 이탈하는 자를 보면 달려가 잡아먹습니다. 그렇게 볼 때 오늘 길잃은 양은 100%로 맹수의 먹잇감이 된 상태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낭떠러지에서 올라올 수 없습니다. 소리를 지른들 맹수들을 불러들이는 소리일 것입니다. 울며 발부둥 친들 힘만 빠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살았고 잔치의 주인공이 되었습니까?
목자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목자는 양을 비즈니스로 생각하지않고 생명으로 생각하고 양에게로 왔습니다. 양에게로 온 목자는 양에게 나뭇가지나 밧줄을 던져주고 잡으라, 잡아야 산다고 말로만하지 않고 낭떠러지로 스스로 내려가서 그의 몸으로 양을 안아 길 위로 올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양이 살았습니다. 양은 목자가 오지 않았으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7절에서 길잃은 양은 누구를 상징하다고 했습니까? 세상에 아직까지 회개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려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이라고생각하십니까?
목자의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에서 길잃은 양을 찾고 그를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양으로인한 기쁨으로 친구와 이웃을 초청하여 잔치를 배설한 목자는 다름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고 목자를 예수님으로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저나 우리가 죄의 구덩이에 빠져있을 때 건짐 받고 구원받을 것은 목자 되신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저나 여러분은 죄의 구덩이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고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아무리 부르 짓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소리를 크게 내면 낼수록 사단 맹수들만 끌어들이는 일입니다. 그러던 우리가 죄에 구덩이에서 나오게 되고 천국에서 화제가 되고 잔치에 주인공이 된 것은 목자 되신 우리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셔서 십자가의 줄을 던져 놓으시고 잡아, 잡고 놓치지 말라. 내가 줄을 당길 것이니 그러면 살거라고 말씀으로만, 가르쳐 주시지 많으시고 가난하고 무식하고 못나고 배경이 없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의 머리를 만져 주시고 가슴을 뜨겁게 해 주시고 마음의 결단을 주시고 우리의 손을 직접 잡아 죄의 구덩이에서 나오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뭐라고 사람들 앞에 세우시고 박수를 받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교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 아닙니까? 영광이 아닙니까?
적용
오늘 본문에 초점은 목자 되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본문에서 목자가 그러하듯이 지금도 예수님의 마음은 눌리고 상하고 죄에 구덩이에 빠져 죽음의 길로 가는 자들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주님은 저들에게 사람을 보내서 빨리 죄의 길에서 나오라 올라오라 줄을 내려 줄테니 꼭 잡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 죄의 구덩이에 직접 내려 가셔서 아픈 다리를 만져 주고 잘 걸을 수 없는 그를 가슴으로 안아 밖으로 나오게 한 후 사람들에게 선포한 수 잔치를 벌여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은 은혜의 시대입니다. 은혜의 시대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시대입니다. 아무리 세상에 악하고 말세이지만, 그래도 이 땅에는 하나님이 거져 주시는 구원의 은혜가 넘쳐납니다. 그래서 아무리 악하고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주의 사랑의 손길이 가면 구원 못 받을 자가 없습니다.
문제는 누가 가느냐는 말입니다. 누가 가서 주의 사랑을 보여주느냐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않 믿으면 심판받고 지옥 간다. 그러니 발리 교회에 나와~ 이런 식의 심판의 말이 아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 주셨어, 나도 당신을 사랑해. 하면서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한 것처럼 누가 가서 주의 사랑을 실천해 보이겠느냐 말입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뜻을 알았으니 그 사명 감당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사명 감당하시고 하늘에 가시기 전에 우리들에게 이 일 부탁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그 양의 가치는 무한대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세상을 너무 비즈니스의 관점으로 보고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다 돈으로 연관시킵니다. 심지어 신앙생활도 돈으로 봅니다. 목회를 사업으로 봅니다. 관계를 비즈니스로 봅니다. 어느 교회가 활동을 하면 마케이팅을 했다고 말합니다.
결국 이 땅에 돈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주님은 이런 관점을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 돈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특히 돈보다 더 귀한 것은 생명이 이리고 말씀하십니다.
눅 12:20에서 하나님은 어리석은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어리석은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돈은 많이 벌었으나 그 영혼이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 출세는 했고 성공은 했으나 그 영혼이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 남들이 부러워할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누리지만, 그 영혼이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
하나님 눈에는 어리석을 뿐입니다. 우리 눈에도 그들이 불쌍해 보일 때 비로써 구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그런 일을 부러워하기 보다는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들에게 생명의 문제, 구원의 문제, 영혼의 문제를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들도 구원 받게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