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빛을 비추라
마태복음 5장 14~16절
2008.07.20. 강북꽃동산교회, 2019.06.02.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몇 년 전 해외 토픽 기사에 실렸던 기사입니다.
일본 수상이 텔레비젼에 나와 이런 광고를 했습니다. “미국 차를 사 주십시오. 제발 미국 차를 타 주십시오. 미국 농산물을 사서 드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광고 후 미국산 자동차가 잘 팔렸고, 미국산 농산물이 잘 팔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 사람도 아니고 미국 기업도 아닌 일본 총리가 일본 국민들을 대상으로 국민의 혈세를 들여서 미국의 상품을 광고했다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광고 후 미국산 자동차가 잘 팔렸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입니다.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예가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미국산 소고기를 수입할 것인데 안심하고 먹어 달라고 호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대통령, 물러가라고 촛불을 들고 야단을 한 적이 있습니다.
6월은 구국의 달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 제일 심각한 문제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니 갈등이었습니다. 이 나라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지도자를 선출해 놓고도 지도자들이 무엇을 한다면 신뢰를 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반대만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소통의 문제입니다. 신뢰의 문제입니다. 대통령이 하는 일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본 국민들은 믿었습니다. 수상이 저렇게 하는 것은 미국을 위한 것 같지만, 결국은 일본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속마음 깊이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대통령이 왜 저렇게 하지 그 뜻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과 신뢰입니다. 소통이 안 되면 신뢰가 깨지고 신뢰가 깨지면 서로 적대 적이 됩니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대립하고 각을 세우고 서로 싸우고 갈등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 사회안에 교회와 사회안에 이런 소통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사회는 교회를 불편한 존재로 보고 있고, 교회는 사회를 핍박하는 기관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대립하고 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이거 왜 그런 건가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교회가 사회에 무엇을 얼마나 잘 못 했길래 정부는 교회를 부정한 단체로 보고 있는 건가요? 교회가 너무 정부에 대해서 쓴소리를 한 거는 아닌가요? 교회가 사회에 너무 덕을 끼치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요? (동성애, 차별금지법 등)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한국교회는 어떤 기관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회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노인복지, 장애인 복지, 아동 복지, 구제, 의료, 등
이것은 우리나라 사회복지 9개 분야를 종합해서 통계 조사한 내용이 있습니다.
종교 분야를 보면 기독교가 64.4%, 천주교가 28.2%, 불교가 4.9%, 원불교가 2.1% 등입니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살피고 섬기는 일에 우리 기독교가 약 2/3 정도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입니다. 기독교 활동에 절반도 못 미치는 천주교는 그 이미지가 기독교보다 훨씬 긍정적입니다. 기독교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미미한 활동을 하는 불교의 이미지도 기독교보다 긍정적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 기독교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요?
오늘 우리는 그 답을 본문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본문 마 5: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등잔불로 방 조명을 했습니다. 접시 모양의 그릇에 기름을 붓고 심지를 담가서 등잔불을 만들었습니다. 성냥이 없던 시절이라 불은 늘 켜두어야 했습니다. 사람이 방안에 있을 때는 등잔을 등경이라 부르는 나무로 만든 등잔대 위에 올려놓아 방 전체를 환하게 비추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출타할 때는 바닥에 흙으로 만든 말 아래 놓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방은 무척이나 어둡게 됩니다. 불은 켜져 있지만, 사실 역할은 없습니다. 그냥 불씨를 위해 켜두었을 뿐입니다.
바로 여기서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즉, 교회가 비취는 등을 등경 위에 두지 않고 말 아래 두었다는 사실이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등을 언제 말 아래 두었다고 했습니까? 출타할 때라고 했습니다. 등잔불은 원칙적으로 등경위에 두어야 하데, 말 아래 둔다는 것은 등으로서 역할을 안 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등은 등으로서 활동은 안 하고 있지만, 죽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꺼지지 않기 위해서 말 아래 두었기 때문에 역할을 못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교회가 세상에 빛이라고 할 때, 빛은 등경위에 있지 않고 말아래에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등경위에서 사회 전체를 비취고 있지 않고, 말 아래인 교회 안에서만 빛을 비추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교회가 빛을 가지고는 있기는 한데 사회에서 빛의 역할은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사회와 높은 담을 쌓고 성도들끼리만 그 안에서 빛을 쪼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회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 주변 사회가 어둡고, 그 사회가 교회를 향해 비판하게 된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중요한 것은 교회가 사회로부터 비판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사회의 비판을 잠재 울 수 있는 능력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교회는 세상의 빛입니다. 등잔불과 같습니다. 그 불빛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사명이 있습니다. 세상으로 그 빛의 혜택을 온 누리가 누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는 세상과 깊은 소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강북구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빛으로 이 지역을 비추고, 우리 사회를 비추고, 나아가 온 세상을 비추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빛이 우리 교회 내부에만 비추는 것이 아니고, 주변 사회를 위해 더 나아가 온 세상을 위해 비추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세상에 비춰야 할 빛은 어떤 빛일까요?
빛에도 종류가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도 여러 종류의 빛 소개되고 있습니다. 등불의 빛, 등대의 빛, 태우는 불의 빛, 햇빛, 성령의 빛 등.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고 하셨고 이 빛은 말 아래 숨겨두지 않고 등경위에 두어 모든 사람에게 비치게 하라고 하셨는데 이 빛은 어떤 빛입니까?
오늘 말씀에서 그 빛이 말 아래가 아닌 등경위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을 보니 주님의 의도는 빛은 사람들을 살리고 활동하게 하고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는 빛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틀림이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빛이 생물에, 세월에, 세상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우선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식물 중에 해에 대해서 가장 잘 반응하는 것은 해바라기일 것입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중심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특별한 일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해바라기 뿐아니라 교회에 화분에 꽃들도 빛이 있는 창 쪽으로 그 얼굴을 돌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화분의 방향을 돌려주지 않으면 화초가 창 쪽으로 구부러지고 커텐을 여닫기 어렵습니다.
해 바라기는 항상 해를 향해 서 있습니다. 해바라기를 보고 있다 보면 마치 군대서 제식훈련 하는 것을 보는 듯합니다. 모두 같은 자세로 같은 방향을 보고 서 있는 것입니다.
해바라기들이 왜 저렇게 해를 바라보고 서 있을까요? 빛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빛을 받아야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사람은 어떠하겠습니까?
정신과 전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계절성 우울증이 있다고 합니다.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다가오면 몸이 나른하고 밥을 많이 먹고 잠만 자고 싶은 현상이 생깁니다.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하고 쓸쓸한 심정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사람에 따라 심해지면 대인관계를 기피하고 집에서 나가기 싫어하고 때론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 원인을 분석해 보면 뇌 속에 화학물질의 불균형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오면서 사람의 몸에 세라토닌이란 물질이 현격하게 줄어들고, 멜라토닌이란 호르몬 분비가 충분치 않습니다. 그래서 이 원인이 몸에 우울증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햇빗을 많이 쪼이면 세라토닌이 늘어나고 멜라토닌 호르몬 분비가 충분해져서 우울증이 호전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은 이런 환자들에게는 빛 치료를 권합니다.
빛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빛이 있어야 동물도 식물도 사람도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바라기 사회에 어느 날, 해바라기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고 사방으로 목이 돌아가 있고 부러져 있고 서로 엉켜 있다면, 그 원인은 빛이 제대로 비치지 못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들에게 세상에 빛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 생명을 살리는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이 빛은 지금까지 위에서 말한 물리적인 빛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빛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빛을 성경적인 용어로 말하라면 요 1:4절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리고 요8:12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빛의 이름은 한마디로 “생명의 빛”입니다. 즉 주님이 우리에게 세상에 빛이라고 하신 말씀은 세상을 살리는 빛이 되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영적인 어둠 속에서 헤메며 살고 있습니다. 빛의 방향을 알지 못하여 이러 저리고 얼굴을 돌리며 살고 있습니다. 빛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영향실조 상태입니다. 그래서 조그만 어려움만 와도 서로 엉키고 이리치고 저리치고 서로 원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상태가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마치 해바라기가 오랫동안 해를 보지 못해 힘을 잃고 이리저리 혼돈에 빠져 있는 상태가 아닙니까?
영적으로는 하나님 떠난 심령들은 영적인 빛을 받지 못해서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 염려 근심 속에 한숨 쉬며 살고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 두려워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며 절망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세상이 약하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악하여 교회를 향해 핍박하는 모든 것들은 영적인 생명의 빛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저들에게는 스스로 생명의 빛을 만들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저들에게 필요한 생명의 빛은 우리에게는 있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빛은 생명의 빛을 의미합니다.
정리해 보면 세상은 영적으로 어둡고 스스로 빛을 만들 수 없는데,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주님의 말씀에 대해 증명한 바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이 땅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생명의 빛으로의 삶을 살았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매일 기도했습니다. 산마다 골짝이 마다 구국기도원이 세워졌습니다. 그곳에서 나라 지도자들을 위해서 밤이 새도록 부르짖었습니다. 대통령, 국회, 법관들, 그 지도자가 여이든 야이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늘지고 어려운 곳에 교회는 내 가족에 일처럼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교회가 세상에 빛으로 사명을 감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오늘 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과 반목의 문제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말씀하신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는 말씀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세상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의 빛이 필요하고 우리가 그 빛인데, 그 빚이 제대로 비춰지고 있지 않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그 빛은 어떻게 비취는 것입니까?
16절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착한 행실이 빛을 비취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에서 말씀드렸던 아홉개의 사회복지에서 64%나 선한 일을 한 것은 어떻게 해석되면 좋을까요? 몇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래된 데이터 라는 것입니다. 전에 우리의 선진들이 그렇게 했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도들이 빛이긴 한데 활동을 안 하는 말아래 빛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상에 빛의 주체는 건물적인 교회가 아니라 너희(성도)라은 사실입니다.
적용=오늘 말씀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오늘 말씀은 세상은 빛을 필요로 하고 있고 사람은 생명의 빛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빛을 말아래 주지 말고 등경위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빛이 사람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주님 말씀대로라며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 빛입니다. 그것도 영적인 어두움을 몰아내는 생명의 빛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빛의 등불은 등경위에 두라고 권하고 계십니다. 말라에 둠으로 보관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 영적으로 어두운 것은 우리가 빛을 말아래 두었을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주님 말씀대로 우리가 세상에 빛이긴 한데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보관만 하는 상태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세상은 영적으로 너무 어둡고 혼탁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어디에 문제가 있습니까? 세상은 빛을 밝힐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빛으라고 하셨을 때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빛이었습니다. 우리의 빛을 등경위에 두지 않고 말아래 두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로 선한 행동으로 빛을 비취지 못했습니다. 선한 생명의 빛을 등불을 등경위에 올려놓읍시다. 더 이상 말아래 있게 하지 맙시다. 아멘
결단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