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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원고

돌아와 감사한 사람

작성자
gfgc
작성일
2017-12-01 16:28
조회
1007
돌아와 감사한 사람

누가복음 17장 11~19절

2017.07.02.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맥추감사주일

오늘은 교회들이 대부분 교회들이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맥주감사 절기는 이스라엘의 삼대절기 중에 하나로 저 유대인들에게 뿐만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 중요한 절기입니다.

이 절기가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절기의 유래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처음 절기를 말씀한 곳은 출애굽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은 저들에게 절기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아직 저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확실하게 구원이 보장된 것도 아닌데 즉, 저들이 아직 홍해를 건너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은 저들에게 먼저 절기를 지키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왜 그러실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면서 이 절기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율법화 했습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23장 14절~17절입니다. “너는 매년 세 번씩 내게 절기를 지킬 지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세 번 중에 하나가 오늘 맥추감사절이고 또 하나는 추수감사절이고 또 하나는 위에서 말씀드리다가 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이 저들에게 요구한 절기입니다.

그것이 무슨 절기일까요? 그 절기는 위에 맥추, 추수감사 절기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우리가 오후 예배시 출애굽기를 묵상하고 있는데, 이미 거기서 조금 다루었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나오는데 이름 하여 무교절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이무교절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십니까? 무교절 무교병와 관계가 있는 절기죠. 누룩이 없는 떡을 쓴 나물과 함께 먹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7일 동안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교병(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일주일 먹는 날인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날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맥추절과 추수감사절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교절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이 오늘 맥추절과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무교절은 유월절을 모르고는 지킬 수가 없습니다. 지킨다 해도 의미도 없습니다. 유월절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00년 넘게 종으로 살았는데, 그래서 그들의 힘으로 는 그곳에서 종의 신분을 벗을 수 없었는데, 구원자 예수님을 상징하는 어린양이 죽고 그 피를 집안 문설주와 이방에 바름으로 죽음의 사자를 지기고 원수 마귀로부터 조정을 당하는 바로를 항복시키고 구원을 얻게 한 날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시자마자 그리고 아직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기 전, 아직 저들에게 아무런 이렇다 할 축복을 주시기 전인데, 저들에게 먼저 절기를 요구하셨는데, 그것이 유월절과 무교절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이 절기를 다음과 같이 지키라 하셨습니다. 유월절은 1년 된 흠 없는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 현관문의 좌우설주에 바른 후 온 가족이 모여 그 고기와 쓴 나물 그리고 무교병을 먹으며 그 밤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이레에 해당하는 날이 바로 무교절입니다.

그러니까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 날 바로 이어서 지키는 절기로, 유월절을 모르고는 지킨다 할 수 없습니다. 유월절이 없는 무교절의 의미도 없는 절기입니다.

어찌보면 유월절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유월절 하루만 경건하게 의미를 되새기고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유월절 뒤로 무교절 7일씩이나 따라 붙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 칠일간은 모든 식사를 무교병으로 하고 첫 날과 마지막 칠일 째 되는 날은 안식일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성회로 모여 절기를 지키도록 하느냐 말입니다.

유월절 의미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맥추감사절인데, 본문에서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감사절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한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데, 나병환자 열 명이 멀리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다 할 다른 이야기를 하시지 않으시고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열 명의 나환자들이 제사장에게로 몸을 보이러 가는데, 가는 도중에 저들이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보았습니다. 순식간에 나병이 나 낳은것입니다. 성경을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 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고민하게 할 제기할 만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15절에 “열 명중 한 사람이 자기 낳은 것은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감사를 한 일입니다. 참 잘하는 일입니다.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 보이는 것은 주님이 다른 아홉 명을 찾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제사장에게 가라 하신 것은 저들이 마땅히 갔다가 다시 돌아 왔어야 하는 것이야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들을 고쳐주실 때 조건부로 고쳐주신 것입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침 받은 다른 아홉을 찾으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처음 말씀드렸던 절기와 관련해서 풀 수 일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하시자마자 절기를 지키라고 하셨을까요? 때는 아직 구원이 완성되기 전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아직 홍해를 건너기도 전입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그런데 왜 무교절을 지키라고 했을까요?

우리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드린 첫 뻔째 드린 유월절과 무교절에서 그 의미를 넉넉히 찾을 수 있습니다. (출 12:26-27, 개정) “[26]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다음은 무교절입니다. (출 13:3, 개정)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애굽 곧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온 그 날을 기념하여 유교병을 먹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 곳에서 인도해 내셨음이니라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절기를 요구하시는 이유가 점점 선명해 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구원 아니겠습니다.

절기는 무조건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즉, 절기는 구원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절기는 구원받는 사람이 먹고 살고 구원을 유지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구원을 받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할 기본 절기입니다. 즉,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 절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므로 하나님께 더 많은 사람과 복을 받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모든 감사가 다 그렇습니다. 따지고 보면 감사의 이유가 어떠하든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들이 들이는 감사는 구원의 감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도 감사도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즉,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구원받은 문둥병에서 낳고 돌아와 감사한 한 병의 문둥병자에게 주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처음에 주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쳤던 10명다가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께 가서 제사장에서 네 몸을 보리라고 명령을 받았던 그 열병도 아닙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을 듣고 가다가 문둥병에서 고침 받은 10명 모두가 아닙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구원과 관계가 있는 사람은 돌아와 감사한 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구원이 감사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에서 무엇을 느끼셨을 습니까? 저는 구원과 감사의 관계를 구원이 구원의 나무라면 감사는 비나 거름, 빛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가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어려움을 추수 때 어마어마한 손실이 될 것입니다. 농부들은 모두 밭에 아주 좋은 씨를 심었습니다. 농부들이 심을 씨는 사실입니다. 역사입니다. 연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면 열매에 대해선 불투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고 그 사실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주셔야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문둥병자들은 처음 구원과 관계없는 것을 주님께 구했습니다. 그것은 은혜였습니다. 나무로 말하면 병든 나무가 비만 구한 것이죠? 주님은 그들의 마른 땅에 은혜의 단비를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힘을 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망가진 것이 고쳐졌습니다. 그러나 고쳐졌어도 그들은 구원의 나무가 아닌 세상 나무에 불과했습니다. 주님은 이들 모두를 구원의 나무로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 모두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대와는 달리 한명만 돌아왔습니다.

주님은 은혜의 단비를 맞고 건강하게 회복된 한 영혼을 보시고 그에게 또 다른 은혜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이 10명의 문둥병자에게 처음 주셨던 은혜도 사실은 너무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주시려는 은혜의 본질은 아닙니다. 주님이 이들에게 주시려는 은혜는 한명에 문둥병자에게 주셨던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 구원의 은혜는 누가 받았습니까? 돌아와 감사 한 한 사람이 받았습니다. 주님은 그에게만 구원을 주셨습니다.

구원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는 세상에 누구든지 받을 수는 있지만, 주님이 세상에 누구에게나 다 주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은 오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중입니다. 가시다가 10명의 나환자들의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는 고침 받은 은혜입니다.

이들이 아직 예수를 믿거나 봉사를 했거나 헌금을 한 적도 없지만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고침 받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은혜는 지금도 동일합니다. 아직 교회를 나오지도 않고 예수를 믿지 않았어도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하고 고쳐 달라고 하면 주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면에는 부흥회 때, 한번 교회 갔다가 병을 치료 받기도 하고 교회를 처음 갔는데, 방언의 은혜를 받은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요? 간단합니다.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시는 것은 혹시 그 은혜를 받고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하지나 않을까 해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와 감사를 한다면 이번에는 구원의 큰 선물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절기는 단순하게 농사를 잘 짓고 풍년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닙니다. 우리의 감사에는 기본으로 구원에 대한 감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감사는 더 큰 은혜를 받아서 다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예를 과거의 선지지 하박국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합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저들은 큰 흉년을 맞았습니다. 꼭 있어야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감사의 조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농사와 관계없이 풍년 흉년과 관계없이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18절에서 말합니다.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성도 여러분! 올해 우리는 유래 없는 가움을 맞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적 기근을 당하고 있습니다. 꼭 필요하고 있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모자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맥추절기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이 절기가 구원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고 오늘의 감사를 통해 더 큰 은혜를 받기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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