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빛 예수
2016.02.24. 강북꽃동산교회
요한복음 11장 1-16(1-10)
시 한편 읽어 드리겠습니다.
박목월 시인의 ‘어머니의 눈물’이라는 시입니다.
[어머니의 눈물]
회초리를 들긴 하셨지만,
차마 때리시진 못하고 노려보시는
당신 눈에 글썽 거리는 눈물
와락 울며 당신의 가슴으로 뛰어들면,
몸이 으스러지도록 껴안으시는
너무나 힘찬 당신의 포옹
그 품에 안겨 바른길 가겠노라 울며 다짐 했지만
당신에 눈에는 여전히
채찍보다 두려운 두 줄의 눈물이
흔들리는 불빛처럼 흘러내리네.
시인 박목월은 이 시에서 어머니의 눈물의 이유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자식이 잘못해서 회초리를 들긴 해야 하겠는데 사랑하기에 그저 바보처럼 울기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우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때로는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눈물은 슬픔과 고통 때문에 나오는 눈물이지요.
그래서 심리학에서 눈물은 대체로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고통과 슬픔에 대한 표현의 하나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갓난아기는 엄마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웁니다. 어린이들은 견디기 힘든 아픔을 호소하기 위해 웁니다. 청춘들은 실연의 고통 때문에 웁니다. 성인들은 실패의 쓰라림 때문에 웁니다. 노인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배신의 서러움 때문에 웁니다. 또한 이별할 때 웁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슬피 웁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흘리는 눈물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인간들이 흘리는 것입니다. 짐승들도 웁니다. 소나 개도 자기 주인이나 동료를 잃게 되면 웁니다. 이 세상에 그냥 이유 없는 눈물은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지난 주 한 성도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습니다. 장례를 치루는 과정에서 가족들이 슬피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아마도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는 것일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서로 찾아가 위로해 주니 가족들에게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성경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던 나사로가 병이 들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무슨 병이 들었는지 밝히지는 않지만, 나사로의 죽음이 그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슬프게 한 것은 그 집의 아름다운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두 명의 자매가 있는데, 그들은 우리가 잘 아는 마리아와 마르다입니다. 마리아는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여 300데나리온, 우리 돈으로 2천 만 원 이상 되는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그의 머리로 닦았던 자입니다. 그 향수는 시집가려고 준비했던 혼수품인데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집은 예수님의 사역 본부처럼 예수님의 사역을 전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예수께서 12명의 제자들과 이곳으로 오시면 두 자매는 언제든지 식사를 대접했고 방을 내어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집을 고향 나사렛보다 오히려 더 집처럼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 역시 예수님과 제자들을 가족 이상으로 생각하고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사역하고 계실 때, 나사로가 병 들어 위독하게 되었습니다. 마르다가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예수님은 나사로가 위독하다는데,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제자 중에서 아무도 대신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죽었고 이미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 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얼마나 슬피 울었을 까요? 아버지처럼 의지하고 살았는데, 그 오빠가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 이 여인들의 슬픔이 얼마나 클까요?
슬픔이 더 큰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오빠의 병이 위독하다는 상황을 알렸는데, 오시지도 않으시고, 죽었다는 소문을 들으셨을 텐데, 장례에도 오시지 않으시고, 그렇다고 제자를 대신 보내시지도 않으시고 화환을 보내시지도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와 마르다의 슬픔이 어떠하겠습니까? 아마도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울음 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원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사흘만에 이 집을 방문하셨을 때, 마르다는 예수님께 제일 먼저 이런 말을 했습니다.
21절입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했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32절에는 마리아도 같은 말을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나사로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가지 않으셨을까?
혹시 우리들이 생각하는 데로 싸웠습니까? 그래서 관계가 불편한 것입니까?
아니면 너무 사역이 바쁘셨습니까? 아니면 무슨 오해가 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신 행동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1. 영광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예수님과 나사로, 또는 그의 동생들과의 관계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도 예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5절에 “예수께서 마르다와 그 동생 마리아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역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많았던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 위독하다는 나사로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장래가 치뤄지는 모든 과정을 다 알고 계십니다.
6절을 그것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 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셨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3절에 “그의 누이동생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내 사랑하는 오라비가 병 들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안 가신 것입니까? 그것은 의도가 계셨습니다.
그 의도에 대해서 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받게 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나사로가 병들고 죽은 일을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 일을 예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영광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주님은 이 영광을 기다리는냐고 너무도 힘들어 하셨습니다.
사흘 후,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에 가서 그의 동생들과 이야기 하는 중에 예수님 사역 처음으로 복받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비통히 우시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네가 내 말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했습니다. 그 영광은 죽은 나사로를 주님이 살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차라리 주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니까 그 영광이 무엇인지 미리 말씀해 주시면 더 좋지 않으셨을까요?
그러면 슬피 울지도 않고, 장래 하느냐고 고생도 안하고, 어자피 살건 대 꼭꼭 묶는 염도 안하고 펀안히 두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여기에 오해가 있습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이 없습니다. 확실하게 죽어다가 살아야 부활입니다.
이 일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급하면 안 됩니다. 원망을 해도 안 됩니다. 들레지도 말아야 합니다. 참아야 합니다. 원칙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리아와 마르다는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원망도 참았습니다. 미움도 참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리와 마르다만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닙니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게 되었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리고 오빠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자매들을 생각하니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얼마나 얼마나 참으셨으면 자매들 앞에서 비통히 우셨습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망에 일들이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아퍼서 울어도 울어도 해결이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결국 그 일들을 감당해야 하나님의 영관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물이 아니면 말이 안 되는 고통과 자존심을 겪고 계십니까?
주님이 여러분의 눈물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어려우시겠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참으시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2. 생명의 빛
오라비의 위독한 상황을 전해 들으신 주님은 유대로 가셨습니다. 지금 베다니로 가셔야 하는데 유대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8절입니다. “선생님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고 가십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9절입니다. “낮이 열 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빛을 보면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실족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조금 전에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지만, 그리고 또 가는 것은 예수님이 빛이시기 때문에 그들은 그 빛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곳에 안 가시면 그들은 어두움에 있기 때문에 실족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밤은 어둠을 상징하고 어두움은 죄가 있는 곳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죄는 어두는 밤에 일어납니다. 어두운 곳에서 계획되고, 어두운 곳에서 거래되고, 어두운 곳에서 사기치고, 어두운 곳에서 음란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 동네 한곳도 밤이 깊어 가면 찬란한 불이 켜지고 전국에서 택시들이 몰려옵니다. 그리고 낯이 되면 불들이 더 꺼집니다.
성경은 비록 낮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죄가 있다면 어둠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사람들이 돌을 던지려는 시간은 실제로 낮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이 있는 곳을 밤으로 간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그곳에 가시는 것은 주님이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10절에 “주님은 그 빛이 사람들 안으로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 하실 때 제일 먼저 빛을 만드셨다. 세상의 모든 생물은 빛을 1차 에너지로 살고 있다. 결국 이 땅에 빛이 없으면 생명도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빛이다. 사람들은 다양을 빛을 발견하고 그 빛을 사용한다. 빛으로 쇠를 자르기도 하고 그 빛으로 사람의 몸 속을 관찰하기도 하며 수술을 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라고 하셨고, 우리에게 빛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이 세상에 그 어떤 빛과도(레이져) 비교할 수 없어 우리의 심령 깊은 곳까지 들어가시며 죽었던 생명도 살려 내시는 줄 믿습니다.
(요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곳에 숨기지 못하고 들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3. 부활의 믿음
그런데 이 빛이 나사로의 죽음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아주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11절 말씀입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이 말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12절입니다. “잠들었으면 났겠나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깨우러 가노라”의 말씀에 제자들이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에 대한 내용은 13절입니다.
“주님께서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가르친 것인데, 제자들은 잠들어 쉬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말 한마디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에 크게 관계된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는데 잠자고 있던 나사로는 나오게 하는 것과 죽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나오게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믿음의 차입니다.
죽은 사람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믿음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부활의 믿음 이라고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사로가 잔다고 알고 있는 사람은 부활의 믿음을 갖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는 것을 보시고 두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14절에 “나사로가 죽었다.”
또 하나는 15절에 “내가 나사로가 있는 현장이 있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
무슨 말씀입니까?
나사로는 확실하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나사로가 있는 현장에 있었더라면, 그가 죽었어도, 예수님께서 살려 내셔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아멘
그럼으로 예수님께서 마리아 마르다의 요청을 거절한 것은 그 가정에 부활의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 사역 중에 이미 부활에 대서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이유는 부활이 없다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의 영향입니다.
그러나 오는 주님은 마르다에게 말합니다.
(요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
그리고 2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느냐”
15절에는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는데 이유는 너희로 믿게 하기 때문이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부활은 죽음과 관계있습니다. 부활에 믿음 역시 죽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잠시 잠을 자던가 병이든 것과 부활은 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이 들어 1년을 잠을 잤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에게 부활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 죽은 것이 없다면 부활은 없습니다. 철저하게 나 자신이 죽었던 사람만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다.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부활의 기쁨과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단은 여기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을 “너희의 허물과 죄로 병 들었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침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고침 받은 기쁨과 부활의 기쁨은 다릅니다.
15절에 보니까 주님은 아직 나사로가 부활하지도 않았지만, 벌써 기뻐하고 계십니다. “기뻐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께 부활의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이루는데도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님이 생명에 빛인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광의 날이 왔습니다.
나사로가 죽어 장사힌지 나흘 이미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나지만,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께서 무덤가에 오셨을 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생명의 빛은 아직 돌을 굴려 내지는 않았지만, 그 무덤을 뚫고 나사로의 시신을 향에 역사하고 있었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람들에게 돌을 굴려 내라고 하셨고, 나사로를 친히 부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걸어 나오자 얼굴에 싸였던 것을 풀어 놓아 다니게 하셨습니다.
부활은 마술이 아닙니다. 마술사는 죽은 사람을 한 자리에서 살려 냅니다. 쇼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시간과 기관과 과정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적어도 사흘 이상의 눈물 나는 과정을 통해서 오늘 우리들에 부활의 믿음을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