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씨
누가복음 15장 11~24
2016.06.05.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돈을 잘 버는 것과 잘 쓰는 것은 다릅니다. 돈을 잘 버는 사람이라고 돈을 잘 쓰는 것은 아닙니다.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2011.03.29.}서울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영국여성 캘리 로저스(23)는 고등학생이었던 2003년, 무려 250만 파운드(우리 돈 44억원)의 복권에 당첨되는 행운을 얻었지만 6년 만에 빈털터리가 됐다. 그녀에게 남은 건 남편에게 버림받은 상처와 마약 후유증이 전부, 현재 로저스는 두 아이들을 홀로 키우며 가사도우미로 일하고 있다.”
최근 미국 경제학자들이 플로리다 주에서 발행하는 복권의 당첨자들의 삶을 조사한 결과, 절반 넘는 이들이 5년도 안 돼 당첨금을 모두 날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켄터키 대학과 피츠버그 대학 등의 경제학 연구진이 1993년부터 2003년까지(10년간) ‘판타지 5복권’에 당첨된 사람 3,500명을 추적해 재정변화에 대해 조사한 결과, 당첨자의 절반이 넘는 무려 1,900명 이상이 당첨 5년 만에 빈털터리가 된 것으로 드러났고 합니다.
연구진에 따르면 파산하는 데에 당첨금의 액수는 크게 좌지우지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첨 이후 최초 2년 동안은 소액당첨자들의 파산비율이 거액 당첨자들 보다 2배 이상 높지만 3~5년 사이에는 거액당첨자들의 파산비율이 훨씬 높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첨금 액수는 파산시기를 미루는 데 영향을 미칠지라도, 결과적으로 돈을 모두 날리는 걸 막기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연구진은 “당첨금액에 관계없이 복권당첨자들이 처음에는 당첨금으로 빚을 줄이는 데 쓰지만, 이후 흥청망청 돈을 쓰면서 오히려 빚더미에 앉는다.”고 설명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얻은 돈 때문에 오히려 빚더미에 앉는 이유는 뭘까?
이전(10년전) 연구진은 이에 대해 복권당첨자들이 대부분 소득이나 교육수준이 낮기 때문에 경제관념이 부족해서라고 지적했지만, 이번 연구진은 다른 의견을 내놨습니다.
그것은 “벌어서 얻는 돈과 그냥 굴러들어온 돈을 쓰는 방식의 차이가 빚어낸 결말”이라고 설명하면서 “소득이나 교육수준에 관계없이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얻은 돈에 대해서 덜 주의 깊게 사용해 과소비를 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조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어떤 아들이 아버지에게 와서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미리 나눠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집에 아들이 둘 있는데 둘째가 아주 버릇이 없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버지가 살아 계시고, 아직은 재산을 나눠 주야 할 시기가 안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재산의 몫을 미리 달라고 계속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이 아들은 왜 갑자기 아버지에게 자신의 재산의 몫을 미리 달라는 것일까요? 혹시 여러분은 아세요? 어디서 이와 관련한 설교 들어 보셨습니까?
성경에는 왜 둘째 아들이 갑자기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의 몫을 미리 나눠 달라고 하는지 이유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정황상 추축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12절에 둘째가 아버지께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 구절에서 중요한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돌아올 분깃”이라는 것입니다.
내게 돌아올 분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만일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둘째에게 돌아갈 유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격히 말하면 현재 그것은 아버지의 것이며, 둘째의 것은 아닙니다. 훗날에도 아버지가 그에게 상속해 주시지 않으면 그의 것이 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에게 그것을 “내게 돌아 올 분깃”이라고 말하면서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 요구는 정당한 요구처럼 보여 집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이성에서 나오는 요구로는 볼 수 없습니다. 이유는 이 아들이 유치원을 다니고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장하면서 도시에 사는 친구들을 자주 만나고 나던 어느 날부터 이 아들에게 이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부터 자기 몫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둘째 아들이 자기의 몫을 달라고 한 것은 갑작스런 충동은 아닌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커 가면서, 이성이 자라면서부터 생긴 것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서로 다른 문화의 사는 도시에 친구들을 만나고 그곳에 화려한 문화를 접하면서부터 자기 몫을 챙기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세요?
자기 몫을 챙기는 것에 함정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떤 100명이 모이는 모임에서 10만 원짜리 선물 100개를 준비했습니다. 행사가 끝나면 하나씩 주려고 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행사가 끝나기 전에 10개가 없어 졌습니다. 회원 중 10명이 자기 것을 미리 챙겼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나중에 그것을 알고 속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 욕심쟁이…
자기 몫을 챙기려는 마음을 잘 관찰해 보면 “이기심, 또는 욕심”이라는 함정이 있습니다. 이곳에 빠지게 되면 죄를 짓고 죄의 결과는 사망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주는 교훈입니다.그러므로 둘째 아들이 “내게 돌아올 분깃”을 계속 요구한다면 그는 이기심의 함정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빠지게 되면 서서히 생각이 바뀌고, 우선순위가 바뀌게 되고 가치관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가치관이 바뀌고 우선순위가 바뀌고 난 다음에는 아버지와 형을 보면 그와 함께 살 수 없고 함께 사는 집은 너무 답답하게 느껴진 것입니다. 형은 잔소리가 많고 아버지는 귀제가 많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사랑에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과잉보호처럼 느껴집니다. 아버지나 형은 오히려 자신의 성공을 가로 막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자기 몫을 챙기는 과정에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자기 몫을 챙기는 것은 당장은 죄 안 같아 보입니다. 사실 죄는 아닙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자기 몫을 안 챙기면 바보 쪽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죄로 간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설득적인 단어인 “내게 돌아올 분깃”, 내 몫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둘째는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챙기는데 성공했습니다.(에쿠)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동안 내게 돌아올 분깃이 있다고 생각해 보신적은 없으세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내게 돌아올 분깃을 열심히 챙기면, 사람들은 우리에게 욕심쟁이라고 말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결국 이 땅에 내 것이라고 주장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모두가 주님의 것인 줄 믿습니다. 그동안 주님께서 주셔서 잘 살았고 앞으로도 주님께서 주실 줄 믿습니다.
자신의 몫을 챙긴 둘째 아들은 그 유산을 현금으로 바꿔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가 간 나라는 그에게 자유롭고 편한 나라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에게 관섭을 받지 않는 나라입니다. 자신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 먼 나라는 아버지 집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교훈이나 관섭을 받을 수 없는 곳입니다. 형의 관섭도 받지 않아도 되는 나라입니다.
문론 그를 조건적으로 보호해 줄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물질이 떨어지면 그를은 언제든지 버리고 떠나는 나라입니다. 그는 그것을 잘 몰랐습니다.
이 나라를 영적으로 본다면 사탄이 주관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눈으로 볼 때 자유롭고 괘락이 있는 나라이지만, 영적으로는 사단이 주관하는 조건적인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관심이 없는 나라이고, 그래서 은혜가 없는 나라입니다. 둘째가 그 나라로 갔습니다.
둘째아들은 그 나라에 가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13~14절 말씀을 보면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하였고, 다 없애버렸다고 했습니다. 30절을 보면 창녀들과 함께 다 써버렸습니다. 이제는 돈이 하나도 없어서 끼니를 걱정해야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업친데 겹친격으로 그 땅에 흉년까지 들어 궁핍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돼지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집을 나간 둘째아들은 한마디로 쫄딱 망했습니다.
무엇이 그를 망하게 했습니까? 사기를 맞았습니까? 사업을 하다가 실패했습니까? 성경은 그의 실패를 한마디로 “허랑방탕”, “낭비”, “없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통제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자동차는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설줄 모르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잘 가는 것보다, 언제든지 설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가고 싶다고 아무 곳에 가면 설수 없는 곳까지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언제든지 가려면 갈 수 있고, 서려면 설 수 는 곳에 있는 줄 믿습니다. 이유는 우리는 지금 우리의 아버지 품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허랑 방탕 다 허비한 둘째 아들은 자신에게서 돈이 다 나가고 배고파 밥 한 끼 먹을 수 없는 지경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제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거지가 되고 나서야 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변에 친구들이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배가 고파도 죽을 마치 고푸 고서야 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의 형편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가 얼마나 배가 고푼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에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되지를 치게 했다.”
16절에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더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형편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형편은 그의 힘과 노력으로 어찌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좌우 어디를 봐도 그를 도울 사람은 없는 형편입니다.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치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자기 몫으로 챙기려다 죄의 수렁에 빠진 인간의 결과를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마치 죄에 빠진 인간은 수렁이 빠진 짐승과 같이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인 것을 말해주시려는 것입니다.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골 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성경은 이 상태에 대해서 병든 상태도 아니고 다친 상태도 인 죽은 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둘째 아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죽어 가는 것입니까? 이에게 희망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에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17절입니다. “스스로 돌이켜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19절입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품꾼으로 보소서”
둘째 아들이 죽을 마치 힘든 상황에서 스스로 돌이켜 발견한 것은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다. 아버지 집에 종들은 배부르다.”였습니다.
이것은 오늘 말씀 중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고 가장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유는 둘째에게 희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희망은 그를 집으로 다시 돌아갈 결심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재산을 탕진하고도 자존심 때문에 꿇어 죽어도 집에는 못 돌아가는데 오는 그는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습니다. 그것도 아들이 아니라 종으로 말입니다. 그를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17절입니다.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무엇인가를 통해서 스스로를 돌이켰는데 그 돌이킴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종의 자세로 말입니다.
그러면 그를 스스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성경을 아무리 살펴봐도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 왔다. 아버지가 보낸 종이 왔다. 아버지의 소문을 들었다는 어떤 이야기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무엇을 스스로 돌이킨 것입니까?
여러분은 스스로 돌이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정말 둘째 아들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돌이켜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그리고 그 판단으로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돼지와 함께 사는 배 고품이 그를 돌이키게 했습니까? 그러면 그 집에 돼지를 지는 사람은 다 돌이키고 집으로 돌아 가는 것입니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들이 고난 중에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고,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회개하고, 종으로 살 것을 결심해서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아들은 이미 죄와 허물로 영과 육과 생각이 죽은 생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아들이 스스로 결심해서 힘을 얻어서 간 것이 아니라 아들에 마음속에 생명의 씨앗에서 싹이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아들이 집에 돌아가게 했는데 그것은 아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서 나온 것일까요?
그이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가 집에 있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사랑을 심었습니다. 그는 집에서 아버지의 돌봄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관대함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종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들이 가지는 확신은 아버지는 자기가 돌아가면 분명히 용서해 주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갖는 것입니까? 그 마음속에 심겨진 씨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듯시 사랑의 씨를 심으면 사랑의 결심을 맺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이것 때문에 결심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지금 아버지에게로 온 것은 아닙니다. 정확하게는 전에 아버지가 그의 마음에 뿌려놓은 씨앗들이 지금 싹이 나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집을 나간 아들을 생각하며 기도하시는 아버지의 기도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의 마음에 뿌려놓은 씨앗들을 자라게 하는 햇빛과 같은 중보 기도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주려는 핵심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돌아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 이면서도 돼지우리와 같은 죄의 구덩이로 간다고 해도 매정하게 인연 끊는다고 하지 않으시고 등을 지고 떠나가는 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는 바로 그분 이십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성도 여러분!
사랑은 마치 씨앗과 같아서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자하고, 겸손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사랑을 심는 것입니다. 종들을 자식처럼 돌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사랑의 씨를 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을 심고 사랑을 거두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가 사랑을 많이 심는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사람들이 우리교회로 돌아오게 합시다.
집을 나갔던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달려가 그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맟추고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24절입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이 멘트에서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 아들은 내가 잃었다 다시 얻어다.”는 부분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나가고 아들이 고생한 것은 아들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다 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잃어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는 집안에 모든 종들이 다 보는데서 흐느껴 우시면서 아들의 목을 껴안고 하는 말은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다. 내 아들은 내가 잃었다 다시 얻어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종으로 써 달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어립도 없다고 말하고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바로 종들에게 말합니다.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자치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사람들이 모이고 집안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온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와 신을 아들에게 입혀주고 끼워주었습니다.
이는 더 이상 사람들이 수근 거리지 못하게 하고 정당한 아들인 것을 만방에 알리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종들과 동네 사람들이 있는데서 이렇게 환대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아들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보호를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어제나 오늘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우리를 무시하지 못합니다. 이 사랑의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 사랑의 하나님을 널리 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