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상한 사람
시편 147편 1 ~ 3절
사무엘상 1장 9~18절
2009.10.18 강북꽃동산 주일오전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몸에 수 없이 많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 상처에는 보이는 상처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들이 있습니다. 보이는 상처는 약을 바르거나 수술을 하면 치료될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는 약과 수술로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지금 이 땅에는 마음에 상처를 입은 수 많은 사람들이 그 상처를 어디서 치유 받아야 할 지 모른 채 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근자에 와서 유난히 이 사회가 악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리에는 악에 싸인 사람, 혈기가 가득 한 사람, 흉기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다니고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흉기가 모두 총이나 칼은 아닙니다. 그냥 보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그 마음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마음 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질병을 앓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은 병든 마음의 근본적인 원인을 죄로 보고 있습니다.
죄가 인간의 마음에 들어오면서 선한 마음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바르게 믿을 수도 없으며,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바르지 못함으로 결국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엘가나 ‘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명문가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부인이 둘입니다. 여기서부터 문제는 잘못됐습니다. 한 아내의 이름은 ‘브닌나’ 이고 또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인데, 브닌나는 아이가 있는데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수치이며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한동안 한나에게 그것이 그렇게 수치스럽고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남편 엘가나의 특별한 사랑과 배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나가 남편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것을 느낀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나가 이상하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애도 못 낳는 게”
이 말은 한나에게 상처가 됐습니다. 명문가의 여인으로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녀는 하나님이 태문을 막으셨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것이 상처가 되지는 않았었습니다.
아픔을 가진 사람도 다른 사람이 뭐라고 안하면 괜찮은데 주변에서 뭐라고 하면 상처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한나의 마음에 큰 상처가 생겼습니다.
성경은 상처 입은 그녀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7절에 “울며 먹지 아니하니”, 8절에 “그대 마음이 슬프냐?”, 10절에 “괴로와서 통곡하며”, 13절에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라고 했습니다.
당시 제사장이었던 ‘엘리’가 성전에 와서 기도하는 한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14절입니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제사장은 한나가 지치도록 기도하다가 입술만 움직이며 기도하는 것을 모고 술 취한 줄 알고 있습니다.
그때 한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상 1:16)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왜 한나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1. 상한 마음
엘가나는 매년 추수의 계절이 되면 하나님께 예배하며 제사하는 날을 가졌습니다. 그때 엘가나는 브닌나와 그의 자녀들에게 가족의 수대로 제물의 분깃을 주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남편 엘가나가 한나에게는 제물의 분깃을 갑절이나 주었습니다. 이것은 엘가나가 한나를 특별히 사랑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브닌나가 이것을 알고 격분해서 한나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성경에 상세하게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마 이런 식이었을것입니다. “애도 못 낳는 게”
한나는 이 말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마음대로 낳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하나님이 주셔야 낳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하나님이 태문을 막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삼상 1:5-6) “[5]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런데 지금 한나의 마음에 브닌나로 인한 큰 상처가 생겼습니다.
성경은 상처에 대한 증상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7절에 “울며 먹지 아니하니”, 8절에 “그대 마음이 슬프냐?”, 10절에 “괴로와서 통곡하며”, 13절에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라고 했습니다.
지금 한나가 상처를 입고 크게 슬퍼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여러 말로 위로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성전에 나가 기도할 때 처음에는 통곡을 했지만, 이제는 몇 시간 씩 기도하면서도 입술만 움직이고 아무 말도 안하고 있습니다. 마치 실성한 여자처럼 말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브닌나와의 관계에서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사실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일도 마음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마음에 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는 5절~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상 1:5-6) “[5]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아직 한나에게 아이가 없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아이를 주시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왜 한나에게 아이를 주시지 않았는지는 나중에 19~20절의 사무엘의 탄생에서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적절한 때에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정하신 때에 주시는 것입니다.
그 상처는 어디서 왔습니까?
그 상처는 다름 아닌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곳으로부터 왔습니다.
지금 내가 칼 가까이에 있으면 칼이 나에게 상처를 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시와 함께 있으면 그 가시가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자동차가 좋은데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외부의 상처입니다.
내부의 상처는 어떨까요? 내부 상처 역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주기 쉽습니다.
직장동료, 학교, 가족..
가족이 좋은데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한나는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습니다.
한나의 마음에 입은 상처는 아기를 못 낳은 것 때문이 아니라, 아기를 못 낳았다고 말한 ‘브닌나’ 때문에 입은 상처입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상처를 입는 일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몸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주위에 상처를 낼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남달리 몸에 상처가 많습니다. 하루는 그 상처를 세어 봤더니 왼쪽 손에만 30개가 넘는 상처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다리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한 상처는 보이는 상처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과정에서는 보이지 않는 상처도 이와 같이 많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들을 입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는 큰 상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처들은 주변 사람들로 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을 때, 그는 그것 때문에 남들보다 좀 불편한 것은 있으나 덜 행복하지는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그것들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는 것 때문에 행복감이 떨어지고, 급기야는 마음에 상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아픔을 가진 것 자체가 상처가 되지는 않습니다. 아픔에 대해서 ‘말하는 것’ 때문에 상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한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아기를 못 낳기 때문에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부러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하면 부러울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브닌나가 아이를 못 낳는다고 무시하고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나의 마음에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나와 같은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습니까?
2. 상한 마음의 치유
그러면 이런 상한 마음은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다시 건강한 마음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1) 통곡의 기도입니다.
(삼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삼상 1: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괴로울 때, 성전에 나가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시 62: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마음속에 담고 있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다 말씀드리라는 것입니다.
시 109:6절 이하를 보면 깜짝 놀랄만한 기도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 쪽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여러분 이것이 다윗의 기도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기도를 간단히 말하면 이렇게 한 기도입니다.
누군가가 너무 미워 죽겠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그의 마누라가 과부가 되게 하시고, 그 자식들은 고아가 되게 하시고, 그 가족들이 거지가 되어 빌어먹게 하시고… 더 나아가 그 집안의 씨를 말려 대가 끊어지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이런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경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상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털어놓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이 있으십니까?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하나님 제 아내, 남편이 밉습니다. 어떻게 손 좀 봐주십시오.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밉습니다. 손 좀 봐 주십시오.”
하나님께 이렇게 솔직한 심령을 말하면 하나님께서 상한 마음을 받으시고 말 같지 않은 내용은 잊어버리게 해주십니다. 이런 기도가 치유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상한 마음속의 독을 빼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이렇게 사울을 죽도록 미워하고 그가 죽기를 기도했지만 실제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을 때, 살려주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치유 받았기 때문입니다.
2) 기도의 내용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11절입니다. 그 내용의 핵심은 “아들을 주세요. 주시면 다시 드리겠습니다.”입니다.
“주시면 다시드리겠다”는 우리들의 물리적인 계산으로는 결국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 안하고 안 받는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여기에 상한 마음의 치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면 아무것도 없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며 상한 마음에 치료가 일어나는 과정이 됩니다. 하나님이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나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그동안 그가 받았던 모든 상처가 치료된다는 것입니다.
한나가 기도하고 돌아갈 때, 한나의 마음의 상처가 치료되고 있었습니다.
하나가 성전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찍 하나님께 경배 하고 집으로 돌아가 그날 남편 엘가나와 동침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아이를 잉태했습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사무엘’입니다.
19절에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20절에는 “(삼상 1:20)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사무엘로 인해 한나의 마음에 있는 상처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가 아이를 낳지 못했던 여자인 것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압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가 그녀에게 아이를 못 낳는다고 무시하고 괴롭혀도 그녀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녀에게 있던 상처가 모두 치료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약을 바르고, 꿰매고, 수술하면 되지만 보이지 않은 마음은 치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나가 알고 성전에 나간 것은 아니지만, 알고 통곡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정확한 치료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참 치료자 이십니다. 우리의 아품을 알고 계십니다. 주 앞에 나와 기도하시면 치료해 주실 줄 믿습니다.
3. 상한 마음의 증상
원래 처음 사람의 마음은 건강했습니다.
인간은 이 건강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고,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창조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인간 마음에 죄가 들어오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1) 자기 자신이 추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감춰 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신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를 동원해서 자신을 감추려 합니다.
2)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 되었습니다. 교제의 단절은 죄가 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8절에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스스로 숨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킵니다.
3) 변명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물으실 때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여자, 만드신 뱀이”죄를 짓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누가 말했습니까.
4) 분노와 살인으로 발전했습니다. 가인과 아벨을 보십시오.
죄로 인해 상한 마음의 결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깨졌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게 되었습니다.
사람과의 사랑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미움과 다툼과 배신을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지 못하게 됐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고 욕구 불만으로 몸부림치게 됐습니다. 이제 인간의 마음은 상한 마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 에이즈에 감염된 부부가 아기를 출산해서 충격을 준 일이 있습니다. 아기를 검사해 보니 역시 에이즈 양성으로 판정됐습니다. 이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에이즈 바이러스를 몸에 지니고 태어난 것입니다. 아기가 얼마나 불쌍합니까?
우리 인간이 그렇습니다. 태어날 때 마음이 이미 건강하지 못합니다. 마음의 병에 대한 ‘양성’ 판정을 받고 태어납니다. 무척 약합니다. 상처받기 쉽고 깨어지기 쉬운 상태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들은 위험하고, 악하고, 각박한 세상 속으로 내던져집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교회에서까지 부대끼며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상처받고, 상처 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상처 나고, 아물고, 덧나며 모두가 저마다 상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상한 마음의 증상을 보면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들은 많은 경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존감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약하면 약한 대로 자신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이어서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들은 이 자존감에 큰 상처가 있습니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못합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자기였으면 좋겠습니다. 늘 자기 모습에 불만입니다.
그래서 늘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남들이 내게 뭐라 말할까?” 여기에 온 신경을 집중합니다. 남들이 내게 좋지 않은 말을 하면 그것이 화살이 돼서 내 마음에 꽂힙니다. 그 말 때문에 기가 죽습니다. 그 말이 두고두고 나를 괴롭힙니다.
둘째는, 타인과의 관계입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들은 많은 경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들은 타인과의 사이에서 마음의 벽을 쌓고 살아갑니다. 과거에 타인에게 거절 당한 기억 때문입니다. 과거에 타인에게 배반 당한 기억 때문입니다. 과거에 타인으로부터 심하게 상처 받은 기억 때문입니다. 더 이상 상처 받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오늘도 높게 마음의 벽을 쌓고 살아갑니다.
문제는 그 마음의 벽이 내게 더 큰 상처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나는 왜 늘 혼자인가?”, “왜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가?” “나는 왜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는가?” 이런 마음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나를 괴롭힙니다.
셋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들은 많은 경우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며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 고백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경우 하나님이 멀리 느껴집니다. 늘 나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연극에서 조연이나 엑스트라처럼 여겨집니다.
또 어떤 경우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께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특별히 대우해 주시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또 어떤 경우 하나님께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부르짖는데 왜 나를 외면하시는가?” “왜 이토록 오래 나를 이 고통 속에 버려두시는가?” 때로는 하나님께 화가 납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상한 마음은 때론 나 자신과의 관계 속에, 때론 타인과의 관계 속에, 때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그 증상을 나타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증상들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희망이 있습니다.
4. 찬양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한 마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시려고 이미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이미 우리의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 상한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 맡겨야 합니다.
일본에서는 섣달 그믐에 우동을 먹는 습관이 있습니다.
오사카의 작은 우동 집에 섣달 그믐에 젊은 부인이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이 우동 한 그릇을 시키는 것입니다. “세 사람이 와서 우동 한 그릇을 시킨다…” 홀에서 서빙을 하던 여주인이 금방 눈치를 채고 주방에 있는 남편에게 눈치를 보냈습니다. 남편이 조금 큰 그릇에 사리까지 듬뿍 얹어서 따끈한 국물을 그릇 가득 담아냈습니다. 세 사람은 잠시 기다리더니 우동이 퉁퉁 분 후에야 그릇을 비웠습니다.
다음 해 섣달 그믐에 또 그 세 모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작년처럼 우동 한 그릇을 시킵니다. 안주인이 금방 알아보고는 남편에게 우동 세 그릇을 말아내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보고는 작년보다 조금 더 큰 그릇에 눈치 채지 못하게 우동 사리를 더 담고 국물을 더 따끈하게 담아냈습니다.
그날 밤 아내가 참다 못해서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신! 사람이 왜 그렇게 야박해요. 그깢 우동 세 그릇이 얼마나 한다고… 섣달 그믐에 우동 세 그릇으로 불쌍한 사람들 배불리 먹여 보내면 얼마나 좋아요!” 남편이 조용히 말합니다. “이 사람아! 우동 세 그릇에 허기를 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보다 마음을 다치게 하면 안 되는 거야. 우동 몇 그릇의 배려보다는 그 마음을 보듬는 배려가 더 중요한 거야!”
사람들은 마음을 고치기보다는 마음을 다치게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맡기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을 주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상한 마음을 가지고 혼자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감추거나 피하지 마십시오. 그 아픈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그 상한 마음을 주님께 열어 드리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치유를 시작하십니다. 어루만지시고 싸매시고 고치십니다.
둘째,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실 때 처방을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순종할 때 우리의 상한 마음이 치유가 됩니다.
요요현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이어트를 할 때 고생 고생해서 살을 뺐는데, 얼마 안가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현상을 말합니다. 요요라는 놀이기구처럼 던졌는데 다시 돌아오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 요요현상을 없애려면 다이어트하고 난 뒤에 생활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돌아갈 가능성을 뿌리째 끊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아문 것 같았는데 얼마 안 가서 다시 도집니다. 상처가 덧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마음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상한 마음으로 주 앞에 설 때에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때 그 말씀을 철저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용서하라 하시면 적극적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화해하라 하시면 적극적으로 화해해야 합니다. 사랑하라 하시면 적극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나누어 주라 하시면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처가 다시 도지지 않습니다. 아문 상처가 다시 덧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아픈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들이 있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주님께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토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십시오. 그러면 고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