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믿음과 승리의 삶
고린도전서 15장 50 ~ 58절
2016.04.17.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유행어는 시대를 반영하는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행어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고 그래서 그 말이 유행이 된 것입니다.
유행어를 주로 만들어 내는 곳은 개그콘서트 프로그램입니다.
한때 개그맨 안*태씨는 이런 유행어를 만들어 낸 적이 있습니다.
“….뿐이고”입니다.
“지금 자동차 한 대가 막 내 앞을 지나갔는데… 난 엄지발가락을 움직일 수 없고, 발은 완전 눌러져서 오리발 됐을 뿐이고, 발바닥이 땅에 붙어서 안 떨어지고, 엄마 보고 싶을 뿐이고”라는 식의 개그입니다.
시청자들은 이 개그를 보고 모두 웃습니다. 그러데, 웃고 난 뒤 끝이 영 개운치 않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나의 현실을 이야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움 속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 개그 속에 투영돼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개그는 우리 사회 속에 만연되어 있는 패배주의를 담고 있습니다. 즉, 아무리 몸부림쳐 봐도 길이 열리지 않고, 더 이상 버틸 힘도 없고, 그래서 외치는 말이 “… 뿐이고!”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개그가 우리를 더 씁슬하게 하는 것은 말하는 자가 패배 앞에 자신을 굴복한 패배주의 한 모습이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패배를 인정할 뿐 아니라, 자신을 패배자로 규정하고, 나아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웃고도 개운치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패배와 패배주의는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대상과 맞서서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다시 도전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맞섭니다. 이것이 패배입니다.
그러나 한 번 패배하고 나서는 다시 맞서기를 포기합니다. 나는 상대가 되지 않아, 맞설 힘도 없다고 물러섭니다. 다시 맞서보지도 않고 포기합니다. 할 수 없다고 주저 앉아버립니다. 이것은 패배주의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패배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반복해서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도전하면 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도전해서 이기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승리는 그동안의 패배를 다 이겨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패배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기면 됩니다. 4전 5기, 7전 8기하면 됩니다. 마지막 승리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패배주의입니다.
한 번 패배고 영원한 패배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번 패한 것 때문에 다시 맞설 의욕도 용기도 다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일단 패배주의에 감염되면 사람의 정신을 무력화시켜 버립니다. 패배주의가 문제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패배주의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특히 청년들 사이에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마치 독감처럼 청년들의 마음속에 널리 확산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 교회 안에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다 틀렸다고 말합니다. 좋은 시절 다 갔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패배주의에 빠졌던 사람들이 여럿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베드로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모든 것을 버리고 3년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사역을 보면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위대한 생애를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다른 신앙고백으로 예수님께 칭찬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이 수난을 당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인생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시자 펄쩍 뛰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고 그럴리 없을 것이며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자기가 목숨을 걸고 막겠다고 장담까지 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왜 이렇게 목숨을 걸고 십자가를 막겠다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볼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은 패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그 일은 현실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체포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꿈꾸던 위대한 생애가 물거품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담한 패배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그 두려움 속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현장에는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머리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패배주의의 수렁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드로가 변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 후 불과 50일 만에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당당하게 거리로 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예수님처럼 체포됐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심문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옥에도 갇혔습니다. 죽음의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상 하리 만큼 베드로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담대하게 맞섰습니다. 마치 승리자처럼 행동했습니다. 그에게서 패패자의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무엇이 베드로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부활의 믿음 때문입니다.
부활의 믿음이란! 죽어도 산다는 믿음이고, 보지 않아도 믿는 믿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선물을 미리 준비해 두시고, 그리고 베드로에게 여러 번 찾아 가셔서 꼭 와서 받으라고 했을 때, 베드로가 주님이 권고하시는 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있다가 선물을 받았는데, 그 선물을 받은 수 그가 달라졌습니다.
그 선물이 바로 바로 성령님이 주시는 부활의 믿음입니다.
베드로가 달라진 시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그날 베드로와 함께 다른 제자들도 성령이 주시는 부활의 믿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처럼 달라졌습니다. 그들이 달라진 시점도 성령이 주시는 부활의 믿음을 받은 때부터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이 주시는 부활의 믿음을 가진 바울의 메시지입니다.
그는 오늘 부활의 믿음이 가지는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지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했습니다.
먼저 5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53절에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을 입으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이것은 주님이 재림 때에 마지막 나팔을 불 때 있어질 일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이 말이 고린도 교회와 오늘을 사는 우리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부활의 믿음이 상관이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가지고 있는 부활의 믿음이 무엇 이길래 고린도 교회에 크게 강조하고 저는 오는 여러분들에게 전하는 것입니까?
1. 승리의 확신
바울에게 부활의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의미는 무엇일까요? 승리입니다.
그러데 그 승리는 그냥 하다 보니 된 승리가 아니라 성경대로 이루어진 승리입니다.
바울은 이것 때문에 지금 매우 흥분된 상태입니다. 우리도 이것 때문에 흥분할 수 있습니다.
54절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은 바울은 부활의 승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55절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이제 이후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 사망은 더 이상 승리를 주장할 수 없고, 사망은 더 이상 죽음의 권세를 휘두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사망의 법이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사망에 권세에게 물질을 빼앗겼습니다. 건강을 빼앗겼습니다. 행복을 빼앗겼습니다. 의욕을 빼앗겼습니다. 소망을 빼앗겼습니다. 기쁨을 빼앗겼습니다. 사망의 법이 가지는 특징은 빼앗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물리치는 방법은 오직 부활의 믿은 한 가지뿐입니다. 엡 6장에 우리가 영적인 군사일 때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무기는 믿음의 방패 하나인 것처럼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는 것은 부활의 믿음 하나밖에 없습니다.
대학병원에서 암환자들을 치료하는 교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건양대 의대 이우석 교수)
이 교수님은 원악 냉철한 과학자여서 결코 예수를 믿을 수 없는 분이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분이 예수를 믿게 됐고 신실한 교회 봉사자가 됐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말기 암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답니다. 말기 암 환자들은 대개 극심한 고통으로 추하고 험한 모습을 보인답니다. 그런데 한 환자는 극심한 고통을 잘 참으면서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더랍니다. 진료하는 자기에게 만날 때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얼마나 수고하느냐고 격려를 하더랍니다. 문득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기는 아무래도 저 환자처럼 할 수는 없을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알아보니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을 여러 명 만나는데, 모두 독실한 그리스챤 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환자들을 본 교수님이 “도대체 무엇이 죽음의 두려움을 저렇게 멋있게 이길 수 있게 해 주는가?” 알고 싶더랍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됐다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은 패배가 선언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삶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죽음의 권세보다 더 무서운 권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다가 안 되면 죽기 밖에 더 하겠어!”하는 마음에 사는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죽음의 권세가 다가올 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즉 “사망아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는 선포입니다.
이렇게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질병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실패야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낙방아 나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꽁꽁 묶어 두려는 죽음의 세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망의 권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활의 믿음을 가지면 사망의 권세는 안개와 같이 물러가는 줄 믿습니다.
2. 승리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단순히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이 후 우리에게 계속해서 이런 일이 생기게 합니다.
57절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승리를 주신다는 것일까요?
마 28:20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과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입니다.(눅 24장 13-35)
이 두 제자도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예수만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제자 공동체에 참여하여 예수님과 동거 동락하면서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워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저들의 꿈은 모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제자 공동체에 참여했던 사람들 하나 둘씩 원래의 제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믿음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사흘이 되도록 그 공동체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갑게도 이 두 제자는 부활소식을 믿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눅 24:17을 보면 “슬픈 빛을 띠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들에게 절망이 가득했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저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절망이 깊어 예수님의 부활 소식도 믿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리라는 기대조차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모세오경을 비롯한 성경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 저들의 마음을 뜨거워 졌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축사 기도를 하시고 떡을 떼어주실 때, 저들이 눈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들이 25리 오던 길을 바로 되돌아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33절을 보면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라고 했습니다. 29절을 보면 이미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다고 되어있습니다. 한 밤중이지만 길을 재촉했습니다. 약 10키로가 되는 힘겨운 산길을 밤중에 한 숨에 달려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방을 다 잡아 놨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무엇이 저들은 돌아서게 한 것입니까?
예수님 잎에서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셨을 때, 이미 그들의 마음을 뜨거워 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축사 기도를 하셨을 때 성령의 능력이 임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저들에게 부활이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한 고린도교회는 무엇을 통해서 이런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까?
바울은 54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아멘
오늘 우리도 우리가운데 계시는 진리의 말씀 즉,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우리를 승리 가운데로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3. 승리의 확신
고린도 교인들은 자주 흔들렸습니다. 좌로 우로 치우쳤습니다. 뜨거웠다 차가 웠다를 잘했습니다.
본문 58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바울이 말하는 “그러므로”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는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인데, 그것은 54절에 “썩지 아니함을 입을 때는 사망을 삼키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진다.”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믿음입니다. 바울은 이 믿음을 가지고 교회들에게 편지를 했는데 교회들이 놀랍게 변했습니다.
성경은 믿음에 대해서 다양하게 말했습니다.
“적은 믿음 큰 믿음, 구원 받을 만한 믿음, 믿음이 떨어졌다. 굳건한 믿음, 약한 믿음, 죽은 믿음”
부활의 믿음은 다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부활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우리교회도 부활의 믿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는 우리를 우겨싸는 일들이 있고, 우리를 쏘려는 사망의 권세가 있지만, 부활의 믿음으로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린 구주 예수님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본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승리의 주로 믿는 것은 우리마음에 뿌려진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내안에 진리의 성령님이 계셔서 깨닫게 해 주시고 믿게 해주셔서 그런 줄 믿습니다.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해 주신다는 주의 말씀 믿으시고 한 주간도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