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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원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작성자
gfgc
작성일
2016-04-10 18:07
조회
1861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눅 24장 13~35

2016.04.10. 강북꽃동산교회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의 자녀가 삼수 끝에 올해 서울대학에 당당하게 합격을 했습니다. 당사자는 문론 온가족이 다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떡을 돌리고 있습니다.
3월 14일은 제 20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일입니다. 이제 앞으로 4일 후면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승리의 환호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잔치를 벌이고 떡을 하고 현수막을 걸어 놓고 즐거워 할 것입니다. 특히 당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공천을 받지 못해, 혼자 외로운 싸움에서 당선이 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더더욱 기뻐 뛸 것입니다.

지금은 부활의 계절입니다.
지지난 주 세상 권세와 맡서 싸우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당당하게 살아나셨습니다. 그 부활의 주님은 아직 세상에 계십니다.

그런데 세상은 왜 이렇게 조용한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부활 앞에 온 천지가 노래하고, 춤추고, 모이고 축제를 벌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 예수님께 병 고침 받은 사람들 다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께 특별히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뭐하는 것입니까? 70명의 전도대는 다 어디로 갔습니까? 예루살렘으로 모여서 축제를 벌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안 되면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라도 축제를 벌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서울대한 입학 축하도 3개월 이상 떡을 돌리는데, 국회원은 당선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데, 주님의 부활은 왜 이렇게 조용한 것입니까?
주님께 부활하셔서 하늘로 바로 올라가신 것도 아니고 지금 세상에 계시는데 왜 사람들은 쉬쉬하며, 다 피하는 것입니까?
문론 주님이 부활하신 일은 너무도 큰일이라서 그럴 수 있다고는 하지만 주님이 직접 당신의 몸을 보여 주시면서 부활했다고 하셨으면 제자들은 축제의 장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아주 노골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를 안 하겠다고 모두 고향으로 내려간 상태입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까? 보았는데도 아무런 감동이나 감정이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그런 것입니까? 우리들 가운데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에 놀라움이 없고 부활을 다 잊고 계신 분은 안계십니까?

우리가 잘 알 듯 예수님께는 12명의 제자외 70명의 전도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들로 다 뿔뿔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보문에는 예수님의 70명의 제자로 보이는 두 명의 자제가 제자 안하겠다고 예루살렘에서 25리쯤 띠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또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밝히는 그들의 이름은 18절에 “한 사람은 글로바”라고 밝히고 있지만 또 한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알패오”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들도 지금 예수님이 죽으신 일 때문에 실망하여 낙심하면서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주님은 이들을 만나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미 수심이 가득했고 소망의 빛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말에는 불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 사이로 들어가셔서 “너희가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질물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질문하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분명히 예수님이 그들에게 오셨는데, 그들은 왜 예수님을 못 보는 것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몸이 신비해서 아무나 볼 수 없는 것입니까? 그러면 그것이 과연 부활인 것입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부활은 죽었던 사람이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재림 역시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는 것이 재림이 아니겠습니까?

문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신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신령한 것이 사람의 눈에 안 보이는 신령이 아닌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부활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부활이 아니라 변형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가까이 계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을 까요?

1. 눈이 가리어져서
16절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 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이 그들과 예수님과 함께 15리를 동행하며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에 눈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을 볼 수 없게 하는 무엇인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원래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 인데, 볼 수가 없었던 것은 무엇인가가 그들의 눈을 가려서 볼 수 없게 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무엇인데, 아주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볼 수 없기 했다는 말입니까?

어떤 주석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곳에 공기가 너무 탁하고 먼지가 많아서 예수를 못 알아 본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공기가 너무 탁해서 가까이 계시는 예수님은 못 알아보았다는 사실에 동의하십니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문론 사막 여행기를 보면서 탁한 공기 때문에 아주 가까이도 잘 안 보이는 상황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5리를 함께 가면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자기들의 스승인 예수님을 못 알아보았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못 알아 본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신 일이 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배에서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러 오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유령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니 두려워 말라”고하셨습니다. 그러자 혹이심 많은 베드로가 그러면 “나를 명하며 물위로 걷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걸으로 했더니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먼지가 많아서가 아니고 그들의 눈에 이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보기는 보는데 못 알아보는 것이지요.
그럼으로 성경에서 우리가 무엇을 본 다 못 본다는 그 의미는 단순히 사물은 본다, 못 본다의 의미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요 12: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엡 1: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위 말씀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눈입니다. 즉, 사람에게는 마음에 눈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돈에 눈이 멀었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말은 마음의 눈이 멀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눈은 육신의 눈과 관계가 있습니다. 또한 마음의 눈은 우리의 생각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마음의 눈과 가장 관계가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또한 불신입니다. 마음에 눈이 멀면 보이게 없습니다.
(예화)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약속의 자녀를 기다리던 중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의 말을 듣고 아내의 여종인 하갈과 동침하여 아들을 낳는데 그가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대로 그에게 아들을 주었고 결국 이스마엘은 그의 어미인 하갈과 집에서 내쫓기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에게 물 한 가죽 부대를 주어 내 보냈는데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지고 나온 물을 다 먹고 아이는 열사병에 걸려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한 어미는 조금 멀리 떨어져 대성통곡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 어미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창21:19)“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여기서 “눈을 밝히셨으므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카흐”는 “눈을 열다, 귀가 열린다, 묶인 자가 감옥에서 놓인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우리가 하갈처럼 불신과 원망에 사로잡혀 아브라함을 원망하고 사래를 원망한다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들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엠메오로 가는 두 제자의 눈이 가리어졌다고 할 때, 그 단어가 헬라어 ‘크라테오’로서 “붙잡다, 체포하다, 굳게 지키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불신에 붙잡혀 있고, 의에 붙잡혀 있고, 마귀에 꼭 꼭 묶여 있습니다. 결국 이런 감옥에서 놓임 받아 눈이 밝아지고 귀가 열리지지 아니하고는 바로 옆에 계시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엠마오로가는 제자들이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옆에서 동행하는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은 그들 마음에 원망이 그들의 마음의 눈을 가리운 것입니다. 언젠가는 왕이 될 줄 안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그들에게 원망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원망했을 때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주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사막에 먼지가 많아서가 아니라 마음의 눈이 어두워서 그런 것입니다. 주님이 죽으신 일 때문에 마음이 슬픈 것입니다. 아니 실망스럽고 낙심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적으로 낙심이 되고 원망이 되는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의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원망에서 탈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준비한 물이 보일 줄 믿습니다.
원망에서 탈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준비한 행복 축복이 보일 줄 믿습니다.

2.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 가장 가까이 오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들을 찾아오신 것이 이처럼 다행인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 오셨어도 이렇게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거든 주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이들은 스스로 예수님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알고 믿는 것은 어떤 모형이로든지 주님이 우리가운데 먼저 오셔서 우리가 믿게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꾸중을 하시면서 본격적으로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7절의 말씀입니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가 나를 위한 것이다”

25리를 가면서 마치 사정을 하시듯이 모세 오경을 비롯한 성경의 글들은 모두 나를 위한 것이라며 말씀을 하셨지만 제자들은 아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직 보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만, 놀라운 일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32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나중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던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본 뒤에 서로 같았던 생황을 이야기 하는데,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 주실 때 마음이 뜨거웠다는 것입니다. 둘 다 같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놀라운 진리입니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여서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면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뜨거운 것은 눈이 열리는 과정입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럼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보려면 먼저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실망하여 낙심한 제자들에게 당신의 못 밖힌 손과 발을 보여주시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먼저 성경을 풀어 주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제일먼저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가셔서 당신의 구멍난 ㅁㅅ자국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8일 후에 한 번 더 찾아가 두 번 씩이나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대로 갈릴리 바닷가로 고기 잡는다고 가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풀어 주실 때 마음이 뜨거웠던 두 명의 제자들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28~29절을 보면 압니다.

25리를 걸어서 엠마오에 왔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더 가는 것같이 했습니다. 그러자 두 명의 제자들의 반응이 놀라웠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은 강권하여 함께 자고 가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통해 마음이 뜨거워 진 은혜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마음의 눈이 수술된 상태입니다.
식사시간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축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떼어서 두 명의 제자에게 주었습니다. 두 명의 제자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아먹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31절입니다.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았다.”고 했습니다.
대박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언젠가는 자기들의 스승이 왕이 될 것으로 알고 따라 다녔던 제자들 모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과정에서 모두 영적 눈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어도 그들은 예수님은 알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그들 스스로가 부활의 주님을 알아 볼 수 있는 길은 어디도 없습니다.

성경에 그런 교회 성도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주님은 그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계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여기서 금과 안약은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본다 안본다는 중요한 일입니다.
정상적인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예수를 분명이 믿고, 예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시는데 우리가 그 예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도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도 놀라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는 이 마음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어두운 눈으로 부활하신 예수님도 보지 못하는데 축복과 행복을 볼 수 있을까요. 또 천국은 볼 수 있을까요?

성도 여러분
말씀을 통해서 마음이 뜨거워지고 영적 눈이 밝아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부활에 예수님이 보여지고 행복도 보여지고, 축복도 보여 지고, 구원도 보여지고 , 희망도 보여지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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