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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원고

순종의 행진

작성자
gfgc
작성일
2016-04-06 17:31
조회
806
순종의 행진
마태복음 21장 8~11절
2015.03.20. 강북꽃동산교회, 종려주일

1969년 7월 21일은 인간이 대기권을 뚫고 달나라로 올라간 역사적인 날입니다.
당시 미국의 37대 대통령 이였던 리처드 닉슨은 방송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입니다. 온 인류와 모든 나라가 함께 감탄하는 역사적 순간입니다.” 이 메시지를 성경적인 용어로 재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드디어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인간이 하늘에 올라가려는 시도를 한 것은 기원전 400년, 지금으로부터는 3,722년 전에 처음 시도했습니다. 그 예날 바벨로니아 사람들이 탑을 하늘에 닫도록 쌓으려는 시도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관섭으로 그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시대에 인간이 하늘에 올라가는 일에 성공을 한 것입니다.
정말 인간의 힘으로 하늘에 올라간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달에 들어갔다고 해서 인류가 크게 변한 것은 없습니다.
지금도 큰 나라들이 연실 달에 로켓을 쏘아 올리는데, 그런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우리 생활에 낳아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 사실과 관련해서 세계적인 부흥사 였던 빌리그레함 목사님께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간이 달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모형으로 상에 오신 그 순간이다.”

요즘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렇게 화제가 되는 것은 사람과 컴퓨터의 대결이기 때문이고, 컴퓨터가 사람을 이긴다는 것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서 큰 위기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들 까지 모두 이세돌을 응원했습니다. 어쩌면 알파고를 만든 사람들 까지 이세돌을 응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인간의 문명은 더욱 발달하여 알파고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이 등장할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위기감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런 위기를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곁에는 이미 그런 것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비행기입니다. 비행기(쇄덩이)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에 위기를 느낄 필요 없습니다. 이미 전자계산기가 우리 곁에 있습니다. 누가 전자계산이기를 이기겠습니까? 그 기계 앞에서 위기 느낄 필요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고난의 계절에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알파고가 인류를 이긴 것이 아니라, 신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내려온 일입니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것은 인간이 달나라에 올라간 것만큼이나 역사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을 변하게 했다든가 내 인생을 변하게 한 것은 없습니다.

언론과 사람들은 연일 세상의 변화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수 년 안에 컴퓨터가 사람을 지배할 것이다. 거의 모든 일을 컴퓨터가 대신 할 거라”고 말합니다. 특히 인간이 하기 싫어하는 것들을 먼저 대신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인간이 아무리 하기 싫어도, 컴퓨터가 대신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게 하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을 대신한다 하더라도 그가 내 죄를 대신 회개 하고, 이 고난에 계절에 내대신 새벽기도를 해주고 금식을 해 줄 수 없습니다.

다음주일은 역사적인 부활주일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우리 개신교는 종려주일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주님은 오늘 아주 특별한 행동을 하십니다.
예루살렘 가까이 오신 예수께서는 제자 둘을 부르시며 맞은편 마을로 가서 어린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린 나귀를 끌고 오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뜻이 나귀에 겉옷을 벗어 얻었습니다. 예수께서 나귀에 타시자 나귀가 움직였고, 나귀가 움직이자 연도에 나와 있던 많은 사람들은 길에다가 옷을 벗어 깔고 나무 가지를 베어 깔았습니다.

예수님을 태운 나귀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어가자 이번에는 사람들은 “호산나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호산나”라고 했습니다. 이 모습은 영락없는 왕의 행진이었습니다. 그것도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군의 행진입니다.

고대 로마에는 “포르타 트리움팔리스”(Porta Triumpalis)라는 승리의 문이 있었습니다. 황제가 전쟁에 출정하여 승리를 거두고 돌아올 때 통과하는 문인데, 황제가 개선할 때, 이 문에서부터 성대한 퍼레이드가 펼쳐진다고 합니다. 모든 로마 시민이 다 나와서 연도에 늘어서고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을 때, 황제를 태운 백마가 4두마차를 끌로 등장하면 시민들의 만세 함성을 지르고, 빵파레가 울려 퍼지는데, 그 소리는 하늘이 흔들일 정도라고 합니다. 이것이 왕의 입성에서 떠오르는 그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데, 영락없는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 왕의 모습이셨습니다. 비록 백마를 타신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힘겨워 보이는 나귀의 걸음은 어색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따르는 군사는 없지만, 사방에서 외치는 “호산나 호산나” 함성은 군사대열 머지않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입성 소문을 들은 유대 지도자들이 성으로 나왔습니다. 로마 군인들도 이 소식을 듣고 긴장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퍼레이드는 단순한 행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큰일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소동까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거침없는 행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지금 유대는 로마에 지배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이 로마 정부를 자극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모르고 그런 행동을 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아시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저는 예수님께서 그런 시대적 상황을 다 아시면서 그렇게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꼭 이렇게 하셔야 할 이유가 계신 것이 아닐까요?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1. 겸손의 왕(겸손)

그것은 5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당신이 왕이심을 인식하시고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이 반역죄라는 사실을 아셨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된다는 사실도 아시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로마에 반역하려는 의도를 가지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그렇게 위험한 행동을 하신 것 입니까?

한 마디로 당신이 “겸손한 왕”이심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3년의 공생에를 통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고 왕 중에 왕이심을 여러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사실을 세상이 알 수 있도록, 당신이 세상을 구원하실 왕이심을 천명하기 위해서 생명을 위협하는 정치적 위험을 무릎 쓰고 이 거침없는 행보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예수님의 사역 중에 오늘 사역은 가장 부담이 되는 사역일 수 있습니다.
솔직히 어린 나귀를 타시고 왕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 초라해 보ㅇ지 않습니까? 뒤 따르는 군사 한명도 없고, 위업도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보호해 주는 이 없어 위험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 가셨을 때, 예루살렘 성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10절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힘없는 어린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갔는데, 성안은 온통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가 누구냐”고 하며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을 그가 누구냐고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날 그 소동은 결코 조롱과 야유의 소동이 아닙니다. 아직 회개하지 않은 원수들이 두려워하며 무서워하는 소동이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위풍당당한 말을 탄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도대체 그를 왜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는 것입니까?
아주 초라함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입성하시는 예수님에게 무엇인가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그 앞에서 환호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위협에 떨고 성에는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빛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참 빛이 나오기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이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죄를 알게 하는 빛이십니다. 성안에 저들이 저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빛 되신 예수께서 어두움으로 가셨기 때문에 실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 빛은 저들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저들에게 어떻게 비추었습니까?
5절입니다. “그는 겸손하여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빛을 비추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비추는 빛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물리적인 빛이 아닙니다.
주님은 오늘 겸손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빚으로 인해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난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아주 작은 나귀새끼를 탔을 뿐입니다. 위염을 뽐내는 말을 타지 않았습니다. 군사를 대동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선동하는 말씀을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에게서 나오는 겸손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겸손은 능력입니다. 겸손이 힘입니다. 겸손이 권력입니다.
요즘 김정은은 연일 미사일을 쑈아 댑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겸손의 나귀를 탑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자랑하지 맙시다.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시다.
오늘 우리의 겸손은 세상 사람들을 감동하게도 하고 때로는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겸손을 통해 복음을 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이 아니라도, 그것이 나귀라도 탈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교회와 성도가 주님께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2. 말씀을 이루려(순종)

오늘 주님은 나귀가 꼭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아직 사람을 한 번도 태워보지 아니한 어린 나귀가 필요하십니다. 주님이 그런 나귀를 꼭 필요로 하신 것은 나귀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런 나귀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고자 여서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역 중에 그런 나귀가 어디 있는지 이미 봐 두셨다가 오늘 제자 둘을 보내며 그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께서 필요하신 나귀는 어린 나귀 한 마리인데, 왜 두 명의 제자를 보내셨을까요? 그것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것은 2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로 오라”입니다.
그러니까 두 명의 제자를 보낸 것은 한명의 제자는 나귀를 끌고 오고, 한명의 제자는 나귀새끼를 끌고 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주님께 지금 필요한 것은 나귀새끼입니다. 그런데 어미는 왜 끌고 온 것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데로 나귀는 양과 다릅니다. 나귀는 말과도 다릅니다. 나귀는 순하지도 않고 말처럼 잘 달리지도 못합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일을 가장 많이 했다는 동물이 나귀이며 신화나 옛 이야기에서도 자주 나오는 동물이 나귀입니다. 똑똑하고 부지런하며 보이기 보다 힘이 강한 게 특징인 동물이 나귀입니다. 그리고 나귀는 생각하는 것보다 성질이 더러운 짐승입니다.
서양권에서는 바보같은 인간을 부를 때 “당나귀(Donkey, Ass)같은 놈”이라고 부르고, 프랑스의 경우 고집불통에 말이 안 먹히는 사람을 보고 당나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보통의 훈련을 받지 않은 나귀는 사람을 태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귀가 말과 다른 것은 일하는 짐승입니다. 짐을 실어 나르는 짐승입니다.

따라서 나귀 새끼라 하더라도 모르는 사람이 끌고 오기에는 10명의 사람이라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두병의 제자를 보내시며 나귀와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귀를 끌고오면 새끼가 글려올 것이라는 것입니다.7절에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과연 주님께서 사람을 한 번도 태워보지 않은 이런 어린 나귀를 타실 수 있을까요? 젊잖하신 주께서 망신당하실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 나귀새끼는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에까지 모시고 가는데 성공했습니다.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한 번도 들뛰지 않았습니다. 혹 당나귀를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나귀는 전에 그 주인으로부터 남이 알지 못하는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막 11:2)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그러면 주님은 왜 이런 나귀를 타시려는 것입니까?
그 답은 다음 성경입니다.
1절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절에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그러면 즉시 보내리라”
7절에 “그 위에 타시고”
9절에 “호산나 호산나”
이 말씀들이 주는 공통의미는 “순종”입니다. 이 순종은 불가 학력적 순종입니다. “끌고 오라, 주가 쓰신다면 줄꺼다. 호산나 호산나”
그곳에는 아무도 지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리더도 정치인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강력하게 일어나는 순종은 무엇입니까?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한마디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4절입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순종하셔서 있는 일입니다.

이미 주전 740년 전 선지자가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언했는데, 주님은 그 일에 순종하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5절 말씀은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오늘 아주 이상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점잖하신 주께서 창피를 무릎 쓰고 어린나귀를 타셨고, 위험을 무릎쓰고 정치적 오해가 있을만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어쩌면 이 행동은 비록 몸이 아푼 것은 없지만, 십자가를 지시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였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태어나시면서 부터 이런 삶을 사셨습니다.
태어나시자마자 주의 사자의 인도 따라 애굽으로 가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헤롯이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공적인 사역을 하실 때는 순처럼 연하신 주께서 성령에 이끌리시어 짐승들이 뜰끓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셔야 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성령에 이끌리고 아버지의 음성을 따라서 죄인들을 섬기시고 그들의 발을 닦아 주시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길들지 않은 나귀를 타시고 구원의 제물이 되기 위해 당신을 잡으려는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스스로 입성하시고 계십니다.
오늘 주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성경에 기록된 대로 겸손히 순종하여 복음의 제물이 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아버지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호산나 호산나”환호를 외치게 하셨지만, 지금 주님은 두려움과 무서움과 떨리는 마음을 감추고 아무 말씀도 안 한시고 나귀가 가는대로 가고 있습니다. 이미 주님 앞에는 십자가가 다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성을 가지신 주님을 사랑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땅히 호산나 호산나 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은 순종의 결과물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의 순종과 주님의 순종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아브라함을 먼저 준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인 것은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순종한 것이 없다면 복음은 전해지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구원을 주시되 순종이라는 통로를 통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 구원은 순종과 관계있습니다, 순종해야 복음이 전해집니다.
훗날 성경을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롬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한 사람은 아담을 말하고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오늘 한분 예수님이 순종을 결심하시자, 제자가 순종했습니다.
나귀가 순종했습니다. 나귀 주인이 순종했습니다. 거리에 사람들이 순종했습니다. 주님이 순종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큰 뜻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길들여지지 아니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갔을 때 성안에서 일어난 소동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기독교의 능력은 섬김, 겸손에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가진 것이 없고, 권력이 없어도 겸손히 섬기며 성령에 순종할 수 있다면 세상에 큰 영향을 주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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