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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강북꽃동산교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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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하나님의 사자를 보는 짐승 | 민수기 22:21-3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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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하나님의 사자를 보는 짐승

민 22:21-30

2020.03.21.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2024.06.02. 강북꽃동산교회

요즘 신학교가 미달입니다. 전에는 신학교를 가라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은 신학교를 가라는 사람이 별도 없다네요. 전에 신학교를 가라고 한 사람들은 주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 이었는데, 요즘 기도하는 사람이 적은가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40년이 다 되어갈 때, 저들은 요단강 동편 모압 평지에 진을 치게 됐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에 이런 움직임은 주변 나라에 무서운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일어난 일들 때문입니다.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바위에서 물이나고,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저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최근 아모리, 바산이 이스라엘에 맞서서 싸우다가 크게 망한 사건은 저들을 더욱 두렵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이스라엘의 움직임에 모압 왕 발락이 겁이 나서 어쩔줄몰라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모압 왕은 살기 위해 이런 머리를 썼습니다.

유명한 점술가를 초청해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람이라는 점술가를 찾았습니다. 자기 이름과 받침 한 획만 틀립니다. 발락, 발람

발락이 발람이 살고 있는 유브라데강가 브올에 사신을 보내 복채를 주고 함께 가기를 청했습니다. 발람은 왕이 주는 복채를 거절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보낸 사신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민 22:12, 개정)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그래서 발람은 발락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앞으로 이 일은 어떻게 될까요?
오늘 하나님은 발람을 통해서 우리들에 무엇을 말씀하실까요?

발람, 그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대변하는 자라면, 지금 여기까지는 참 잘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상입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부터는 신경을 써야합니다.

모압왕 발락이 순순히 물러서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상했던 일이 생겼습니다.

모압왕 발락은 전보다 지위가 더 높은 사신을 보내서 발람의 마음을 흔들만한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17절이지요. (민 22:17, 개정)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높은 자리, 돈, 명예, 권력 다 준다는 것 아닌가요?

발람이 끌리는 조건이 아닐까요? 발람마음에 유혹이 왔습니다.
발람이 하는 일은 어떤 정치적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사적 행동을 하는 것도, 어떤 이스라엘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을 잘 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이스라엘을 저주만 하면 됩니다.

발람에게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점술가로서 어렵게 살았는데, 이번에 한미 천 잡을 기회가 온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말 한마디만 하면 장관도 되고 돈도 벌고 평생 보장되는 일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이 아닐까요! 혹 우리들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들에게 사탄의 전략을 생각하게 만들입니다.

<b>발람 어떻게 할까요</b><b>?</b>
우리는 발람을 계속 관찰 해 보려고 합니다. 위에서 말씀했지만, 발람은 당시 유명한 점술가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혼돈하게 하는 것은 발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발람은 예언자인가요? 제 생각에는 예언자인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입에 말을 주셨다는 것이지요.

더 중요한 오늘에 발람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목사, 장로,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까?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용하시고 그 마음의 말을 입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볼 때 오늘 우리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베드로 사도의 말과 같이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예언자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주신 감동을 입으로 말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b>이제 발람이 하는 말을 들어보겠습니다</b><b>.</b>
(민 22:18, 개정)입니다.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b>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b>” 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는 내가 혹 말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 하겠다는 뜻 아닙니까? 발람이 안가겠다는 것입니까? 가겠다는 뜻입니까?

이미 발람의 말에는 가겠다는 생각이 들어가 있습니다. “내가 가서 말을 하더라도”가 누락 되어있습니다. 즉 발람은 모압 왕이 주는 유혹에 이미 넘어가고 있습니다. 솔직히 모압에 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말을 하더라도”라는 전제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발람의 마음을 아신 하나님께서 민 22장 20절에 갈 테면 가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b>그래서 발람은 나귀를 타고 두 종과 함께 저들을 따라나섰습니다</b><b>. </b>
그런데 가던 중에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나귀가 가던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놀란 발람 책직을 들어 나귀를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나귀가 담쪽으로 가서 담에 몸을 기댔습니다. 발람의 발이 짓눌졌습니다. 발람이 다시 책칙으로 나귀를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그래서 나귀는 앞으로 가려고 하는데, 갈 길이 없는 좁은 길이라서 나귀는 그는 땅에 엎드리고 말았습니다.

이번 발람은 지팡이로 나귀를 세 번이나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나귀가 사람의 말을 했습니다. “내가 당신께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 같이 세 번 때리느냐. 나는 당신이 일생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버릇이 없었더냐”(22:28-29)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민 22:23, 개정)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어 저가 가는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런데 발람은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갔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포도원의 좁은 길에서 다시 길을 막았습니다. 역시 발람은 못 보았습니다. 나귀가 보고 몸을 담에 대고 피했습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피할 데가 없는 좁은 길에서 다시 길을 막았습니다. 발람은 못 모았습니다. 나귀만 보고 발람의 밑에 엎드렸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발람이 화가 나서 지팡이로 나귀를 내리쳤습니다. 그때 나귀가 입을 열어 말을 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29)라고 하자 나귀는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30)라고 했습니다.

이거 동화 이숍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온 실화입니다.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여셔서 나귀가 하나님의 말을 사람에게 한 것입니다. 발람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귀 앞에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 들고 길에 선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이 우리에게 충격이 되는 것은 당시 유명한 예언자가 영적으로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도도 모르고, 짐승도 보는 하나님이 보낸 천사도 못 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꾸은 짐승만 때리고 심지어 죽일 생각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발람이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우리말에 “눈 뜬 장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무엇을 보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을 이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보면서도 실제로는 보지 못하는 답답함을 느끼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발람이 어느 순간 눈뜬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순간일까요? 17절입니다. 모암 왕으로부터 높은 자리를 보장 받고,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부터 그의 마음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 약속을 받은 후부터 마음은 높은 자리에 올라 목에 힘 줄 일들 생각에 들떠있습니다. 그리고 왕이 무엇이든지 준다고 하니 왕에게 무슨 소원을 말할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
참 신기한 것은 며칠 사이에 발람의 눈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왕의 약속을 듣기 전에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었는데, 지금은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발람이 왕의 약속을 듣기 전까지 여호와의 음성을 듣던 사람인데, 왕의 약속을 들은 후부터는 여호와께서 보내신 사자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눈 뜬 장님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한순간입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인 눈은 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버리면 영안이 닫히고 영적인 감각이 마비되어 버립니다.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하게 됐던 것처럼 영안이 닫히면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고 영적인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됩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을 묵상해도 영감을 얻지 못하고 주의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기도의 문이 닫히고 주님과의 영적 소통이 끊어집니다.

막 8:18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라고 책망하신 것처럼 그렇게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늘 성경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갖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건과 사고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귀의 영안을 열어 하나님의 사자를 보게 하시고, 그의 가는 길을 막아 세우시는 것입니까?

제 생각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발람의 가는 길을 막고 싶으십니다. 그런데 발람은 이미 물질에, 세상 소망에 눈이 멀었습니다. 여호와가 주의 사자를 보냈는데도 그의 분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귀의 영안을 열어서 나귀를 통해 바람을 못 가도록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해석이 있으십니까?

본문을 보면 자세히 보면 나귀가 말을 하긴 했지만, 말을 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2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귀를 통해서 발람에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귀를 통해 발람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셨을까요?
발람의 오해를 책망하려 하신 것입니다. 지금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12절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발락 왕이 처음 보냈던 사신들이 왔을 때 발람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을 자들이니라” 발람이 이 말씀을 듣고 분명하게 가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사신들이 왔을 때, 가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당연히 거절해서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발람은 모암왕의 파격적인 제안을 받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다시한 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응답을 주신 것입니다. 20절입니다.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발람이 저들을 따라 모압에 갔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오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람은 가라는 하나님의 참 의도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함께 가라는 하나님의 참 의도가 무엇인지 아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앙생활에서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다 보면 그런 경우를 보게 되는데, 자녀가 어느 날 와서 어디를 가겠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생각에는 안 갔으면 좋겠는데, 자꾸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는 네가 가고 싶으면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녀는 어떻게 해야 되지요? 가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가 가도 된다는 말들 듣고 신나서 가는 것은 오해입니다. 실제 부모의 마음은 ‘가지 말라’입니다.

발람은 함께 가라는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따라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분노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셔서 길을 가로막으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가도 된다고 하시고 그가 가는 길을 가로막으시는 것입니까? 발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발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 했을까요?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파격적인 제안을 받고 보니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그 말씀을 오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문의 발람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합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못 파악합니다. 그 이유가 듣고 싶은 대로 듣기 때문입니다. 차분하게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들으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약 1:14-1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이 욕심에 사로잡히면 죄를 짓게 되고 죄를 짓게 되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시작이 욕심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욕심이 그렇습니다. 물고기가 미끼가 탐이 나서 덥석 물고 나면 물 밖으로 끌려 나오게 되고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여기저기 미끼가 널려있습니다. 자칫 덥석 그 미끼를 물기 쉽습니다. 물면 끌려가는 것입니다. 욕심에 사로잡혀 죄를 짓게 되고, 그러다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미끼를 물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인가 욕심나는 것이 나타나면 긴장해야 합니다. 그것이 미끼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차분하게 먹이인지 미끼인지를 확인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으로 나가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도 잘 모르겠거든 멘토나 기도 동역자들과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아담이 인류 최초로 죄를 짓게 된 것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싶은 욕심이 발단이었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 주변에도 따먹고 싶은 열매가 널려있습니다.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이 흔들리고 욕심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욕심인 줄 알아야 하고, 그 욕심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description>
			<author><![CDATA[길윤구]]></author>
			<pubDate>Wed, 05 Aug 2026 11:25:5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fgc.org/?kboard_redirect=2"><![CDATA[설교게시판 2015-09-25]]></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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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내 안에 거하라 | 요한복음 15:1-12(7-12)]]></title>
			<link><![CDATA[https://gfgc.org/?kboard_content_redirect=191]]></link>
			<description><![CDATA[내 안에 거하라

요한복음 15:1-12(7-12)
2024.06.09. 강북꽃동산

1971년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에서 주목할 만한 실험 하나를 했습니다. 신문광고를 통해서 실험 대상자를 모집했고, 광고를 보고 찾아온 24명을 무작위로 두 그룹으로 나누어 정해진 룰에 따라 2주 동안 12명은 간수 역할을 그리고 다른 12명은 죄수 역할을 하게 했습니다. 시작하기 전 24명은 서로 악수를 하고 우리 모두 선량한 시민이기 때문에 서로 잘해보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두 그룹 사이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는 간수 역할을 한 그룹은 날이 갈수록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자들이 되었고, 죄수 역할을 한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눈치를 보며 비굴해져 가더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간수 역할을 맡은 사람은 간수처럼 변하고, 죄수 역할을 맡은 사람은 죄수처럼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대학은 이 실험을 통해서 자기를 누구라고 생각하며 사느냐에 따라서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 지에 대해 연구결과를 얻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는 셀프이미지라고 합니다.

셀프이미지란! 셀프와 이미지의 합성어로 “자기 자신 스스로가 나는 누구라”고 생각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다른 단어는 자존감이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은 셀프이미지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한날은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다. 그리고 너희는 가지이고 하나님은 농부이시다. 하나님을 농부로 주님은 포도나무로, 우리는 가지라고 셀프이미지화 하셨습니다.

주님이 설정한 셀프이미지화의 효과는 어떨까요? 위에서 간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자들이 되고, 죄수 역할을 한 사람은 날이 갈수록 눈치를 보며 비굴해졌던 것을 생각하면 주님이 정하신 셀프이미지화도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을까요? 기대를 하면서 특별한 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b>셀프이미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의 설정입니다</b><b>.</b>
즉, 간수냐, 죄인이냐, 나무냐, 가지냐, 농부냐는 것이지요? 이것이 중요한 것은 그 설정에 따라서 간수가 되어가기도 하고 죄수가 되어가기도 하고 나무가 되어가기도 하고 가지가 되어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오늘 우리의 셀프 이미지는 <b>가지</b>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지만 생각하고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다른 생각 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결코, 나무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의 나무가 누구이며, 농부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무조건 중요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 8절에는 나무와 농부에 대해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 15:2, 개정) “무릇 내게 붙어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요 15:8, 개정)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무릇 내게’는 나무인데 예수님이시고, 열매 없는 가지를 제거해 버리신다는 분이 계시는데 그는 농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농부이신 하나님은 열매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어도 열매가 없을 때는 제거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지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9절에는 나무이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 15:9, 개정)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라고 했습니다. (요 15:16, 개정)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b>열매를 맺게 하고</b>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택하신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열매를 맺게 하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구하는 것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정리해 보면 우리가 가지가 된 것은 예수님의 선택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나무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핵심은 열매를 맺으라 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모든 농부가 땅에 무엇인가를 심었다면 열매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냥 심심해서 땅에 무엇을 심는 농부는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 나라 농장에 있는 생명나무의 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생명나무는 예수님이십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열매 맺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풍성한 축복의 거름과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시고,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의 가지를 묶어 주시고 받쳐 주시고 악한 마귀가 역사하지 못하도록 천군 천사들을 보내셔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믿습니다. 열매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농부이신 하나님은 오늘도 열매에 대한 기대를 가시시고 계십니다. 좋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b>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b><b>? </b>

4절입니다. (요 15:4, 개정) “내 안에 <b>거하라</b> <b>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b>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 15:5, 개정)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거하라’입니다. 지금부터는 ‘거하라’에 주목하겠습니다.

처음 주님은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나무에 <b>붙어있어야 한다고</b> 했습니다.
(요 15:2, 개정) “무릇 <b>내게 붙어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b>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그런데 4절 이하를 보면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붙어있는 것과 거하는 것은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적용할 때는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b>그래서 오늘 우리는 </b><b>‘</b><b>거하라</b><b>’</b><b>는 말씀을 이해해야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b><b>.</b>
여러분은 거하라의 뜻을 알고 계시는 지요?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 안에 거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아는 알아야 열매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제자들이 예수님 몸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떨어지지 않고 붙어 다닌다는 뜻일까요?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자들은 “내 안에 거하라”는 이 말씀을 알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문제는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가 가까운 때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 거하라 하신 말씀은 함께 하늘로 가자는 뜻일까요?

그렇게 볼 때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에는 두 가지 어패가 있습니다.
하나는 떠나시면서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신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사람 안에 거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곁에 계시면서 거하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래도 이해가 될턴데 떠나시면서 거하라가 의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곁에 있을 수는 있어도 피차가 서로의 안에 있다는 말은 어폐가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사전에서 "거한다"는 종교적 맥락에서, 특히 기독교에서는 "예수님 안에 거한다"라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는데, <b>이는 예수님과의 영적인 연합과 교제를 의미합니다</b><b>.</b>

그러니까 주님이 말씀하시는 나무가 열매를 맞는 것과 같은 성도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길은 예수님과의 영적인 연합과 교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거하라’는 말은 영적인 연합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거하시는 것과 같은 영적 연합의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연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거한다는 말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영적인 연합 관계를 갖는 것처럼, 가지인 우리가 나무인 예수님과 농부이신 하나님과 영적인 연합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쓰셨습니다. 4절입니다. (요 15:4, 개정)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말입니다.

이는 놀라운 일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날은 성령이 오시면 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성령시대입니다.

<b>중요한 것은 어떻게 거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b><b>. </b>

본문 1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거하라는 말은 한마디로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 말씀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봉사 충성 헌신 헌금 기도 예배 선교 사역을 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뜻 가족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주님이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거하는 것이고 그러면 열매가 달린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의 열매를 보시기 원하시고 하나님께 드리기 원하십니까? 사랑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적용 -&gt;

오늘 예수님은 셀프이미지를 통해서 우리를 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는 나무에 붙어있어 합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열매를 위해서 씨를 뿌려야 하는 것도, 거름을 주어야 하는 것도, 풀을 뽑아야 하는 것도, 해충을 막아 내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지로서 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의뢰로 많은 분들이 이것을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붙어만 있어서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거름도 주고, 가라지도 뽑고, 해충도 물리쳐야 하는 것 아니야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농부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역할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가지인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땅에 가라지, 가시와 같은 원수들이 있습니다. 그거 우리는 제거 못 합니다.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세상에 해충과 같은 마귀들이 많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죽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소관입니다. 적당한 공기 햇볓이 없이는 좋은 열매 맺을 수 없는데 그것도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을 농부화하셨습니다. 농부는 늘 열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내야 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길윤구]]></author>
			<pubDate>Wed, 05 Aug 2026 11:23:0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fgc.org/?kboard_redirect=2"><![CDATA[설교게시판 2015-09-25]]></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 막 5:30-34]]></title>
			<link><![CDATA[https://gfgc.org/?kboard_content_redirect=190]]></link>
			<description><![CDATA[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막 5:30-34

2024.06.16. 강북꽃동산교회

12년 전에 몸에 이상에 생겨서 병원을 찾았지만 낫지도 않고, 증세가 더 악화되어,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며 용하다는 의사를 다 만나보았지만, 아무런 효험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 과정에서 있는 재산도 다 허비하게 되었고, 지금은 아무런 치료도 못 하고 손 놓고 있는 상태입니다.

혈루증을 앓은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혈루증은 헬라어로 <b>하이마레오</b> 인데, 피의 유출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여인은 월경 때에만 하혈을 하게 되는데, 이 병은 월경과 무관하게 불규칙하게 출혈이 되거나 어떤 상처로 계속 피가 출혈되는데 지혈이 안 되는 병입니다.

성경이 이름이 밝히지 않은 어떤 집에 여인은 12년 전부터 혈루증으로 병원을 찾았지만, 낳지 않았고 이 의사 저 의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하느냐 정말 괴로움을 많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여인의 상태를 26절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많은 의사에게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도 없고 도리어 더 중하다”라고 했습니다.

혈루병에 문제는 율법적로 부정한 병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런 병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자체가 어렵습니다. 문둥병자와 비슷한 처지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레위기 15장》에서 그 사람이 가는 곳, 만지는 것은 모두 부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지금 여인은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괴로운 상태입니다. 그 병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자존심, 자존감, 우울증, 경제적 손실, 그리고 희망 상실로 오는 괴로움 그 자체입니다.

본문 26절은 그 여인의 현재 상태를 잘 말해 줍니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그의 가족(부모 남편 자녀)과 인척 관계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누구하고 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앞으로도 이 여인은 외롭고 더 괴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b>그러면 여인에게 기쁨의 희망은 없는 것입니까</b><b>?</b>

있습니다. 27절입니다. (막 5:27, 개정) “예수의 소문을 듣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여인에게 한 소문이 들렸는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는 순간 몸에 변화를 느겼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생겼습니다. 삶의 의욕이 생겼습니다.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소문인데 그렇습니까? 혹시 예수님이 혈루증을 잘 고치시는 전문가라는 소문을 들은 걸까요? 예수님에게 혈루병을 고쳐준다는 약속을 받은 것입니까?

성경에는 예수께서 여인의 병을 고쳐 준다는 어떤 약속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걸까요? 그가 들은 소문이 어떤 것이기에 괴로운 여인을 이처럼 기쁘게 하는 걸까요?

그래서 마가복음 5장까지 오면서 여인이 기뻐할 만한 예수의 소문이 무엇인지 살펴봤습니다. 혹시 예수께서 여인처럼 혈루증을 고친 사례가 있는지 자세히 봤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혈루증을 고쳤다는 기록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여인은 어떤 소문을 들었을까요?

그것은 추측인데 예수님은 어떤 병이든지 다 고치실 수 있다는 소문이 아닐까요? 자기와 상황에 똑같은 병은 아니지만, 자기보다 더 심한 병을 고친 것을 보아 예수님은 못 고치시는 병이 없으실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을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28절에 보면 그 여인의 현재 마음 생태를 볼 수 있는 구절 있습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예수님 옷에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구절입니다. 이거 믿음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여인의 마음에 이 믿음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약을 쓰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옷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낳는다는 말입니까? 그가 언제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까? 그것도 아니고 오늘 처음 주 앞에 처음 나와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이 믿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성경을 보고 다시 보아도 이 여인이 어디서 이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것 밖에 못 찾았습니다. 27절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라는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는 순간부터 달라졌습니다. 그것이 은혜이고 믿음이고 행복의 시작이고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가 들은 예수의 소문은 천국에 가는 첫 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소문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있었던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기도는 예수 소문 사역의 시작이었습니다. 전에 한국교회에 예수 믿은 사람 말 잘한다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를 잘 믿고 성령 충만하면 말 잘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이용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말하고 예수를 믿게 하셨습니다.

예수의 소문은 곧 복음입니다. 복음은 그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의 주체는 예수님 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말 자체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기에 넉넉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을 듣는 것은 은혜입니다. 예수라는 말은 듣는 것은 이 땅에 듣는 최고의 은혜입니다. 예수시라는 말을 듣는 것만 가지고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소리만 들어도 하나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이라고 했고 마가복음 2: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고 했고, 마가복음 7: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엎드리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 앞에 나온 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 귀에 예수의 소문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먼저 예수의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기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은혜받은 일로 예수의 소문을 내시기 바랍니다. 구원받고 축복받은 일로 예수의 소문을 내시기 바랍니다. 소문을 내야 하는 이유는 구원받을 사람들이 주께로 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b>예수의 소문을 들은 여인은 예수님이 계시는 현장으로 나왔습니다</b><b>.</b>
혈루증을 앓고 있는 사람은 원래 이런 장소에 나오면 안 됩니다. 그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여인을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어 이런 장소에 나올 수 없고 용기와 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인이 이 공적인 장소에 나왔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힘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님께로 왔을 때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현장은 늘 그랬듯이 오늘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예수님께 가까이 나가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여인은 사람들을 뚫고 예수님께 가까이 가서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로 결심했습니다. 의기 소침한 여인이 많은 사람들의 속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 여인이 왜 이러는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여인이 왜 그러는지 위에서 이미 발견했습니다. 그 여인의 귀에는 예수(복음)이 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 있는 뜨거운 믿음은 그가 예수님께 나가 주의 옷을 만지는 것은 못 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바쁘신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특별한 안수 기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마음은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에 넉넉했습니다.

그래서 무리들 속을 파고들어 갔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예수님 가까이 접근해서 예수님 옷자락을 만지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떨려서 아주 살짝 만졌습니다. 그래서 이를 눈치챌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b>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b><b>. </b>

여인의 몸에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소름 돋는 것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몸에 혈루의 근원이 말랐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29절) 놀랍게도 병이 나은 것입니다. 신기하게 이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본인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안수 기도를 하신 것이나 선포하신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여인을 만진 것도 아니고, 여인이 예수님을 만진 것인데, 그것도 예수님이 알 수 없도록 옷에 살짝 손을 댄 것뿐인데 병이 나은 것입니다. 이는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b>그런데 여인에게 순간 고민이 생겼습니다</b><b>.</b>
다음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이야기 해야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냥 가면 되는 것입니까? 이제라도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말입니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여인이 예수님께 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께 피해를 준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조금도 피곤하게 해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주변에 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때 여인은 나름대로 이런 판단을 했습니다.
이 일은 참으로 좋은 일이고, 행복한 일이지만, 아무도 모르게 고침도 받았고 예수님이 나에게 수고하신 것이 없기때문에 그냥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는 중이었습니다.

<b>그런데 바로 그때 문제가 생겼습니다</b><b>. </b>
주님께서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더니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여인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마치 도적질하다가 들킨 기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제자들이 나서서 막아 주었습니다. “선생님 무리가 이렇게 에워싸는 것을 보시면서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말씀하십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은 물러서지 않으시고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누가 내게 손을 댓다. 그래서 내게서 능력이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때 너무도 놀란 여자는 부들부들 떨면서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려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주여 제가 주님의 옷에 손을 댓습니다. 사실은 제가 12년동안 혈루증이 있는데 아무도 못 고치지만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순간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겨서 예수님께 피해 드리지 않으려고 살짝 만졌는데, 저의 무례함을 용서해 주세요.”

<b>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b><b>?</b>
이 여인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자신의 옷에 손을 댄 여자를 왜 찾으신 걸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33절에서 찾았습니다.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라고 했습니다.

여자는 자신에게 있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병이 치료되어서 기쁘기보다는 왠지 두렵고 죄를 지은 것 같고 도적질을 한 것 같은 것입니다.

12년 동안 앓았던 병을 치유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두려운 것입니까? 이유는 딱하나 예수님을 몰래 만졌다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도적질했다는 느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치료받고도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몰래 만져 고침을 받았다면 도적질을 한 것입니까? 지금 무엇인가는 치유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치유도 도적질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믿음도 구원도 도적질할 수 있겠네요? 그러면 예수님과는 관계없이 내가 만지고 싶은 대로 만지고, 무엇인가 생각하고 빌면 그것이 내게 오는 것입니까? 병 고치는 것이 그렇다면 믿음이 그렇고 구원도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여기에 사람들의 큰 오류가 있습니다.

만일 오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그냥 간다면 이런 오해는 얼마든지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주님이 여인을 꼭 만나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은혜나 믿음이나 치유, 구원 천국은 내가 빌고, 내가 만져서 오는 것이 아니고, 그 주체이신 하나님이 주셔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에게서 능력이 나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정확히 말하면 주님은 여인이 자기에게 가까이 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고 여인이 손을 댓을 때 치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즉, “네가 나를 만질 때 내가 너를 치유를 했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인이나 우리는 이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 내가 땅을 파고 땀을 흘려서 이룬 것이 아니고, 내가 주님께 와서 크던, 작던 수고를 해서 치료를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문이 내 마음을 감동해서 주 앞으로 오게 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몸에 손을 대게 했습니다. 그때 성령 하나님은 순간 그를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여인은 이 사실을 꼭 알고 가야 합니다.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결코, 주께서 그에게 사례를 요구하시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꾸중하시려고 부르신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인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한 더 이상 예수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믿음이나, 구원이나, 치유나, 축복이나 내가 같고 싶다고 갖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두가 선물이기 때문에 줄 분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만져서 치유한 것이 아니라, 여인이 주님을 만질 때 주님이 그에게 치유를 주신 것입니다.

<b>주님이 여인을 찾으신 또 한 가지 이유는 </b><b>34</b><b>절에 찾았습니다</b><b>.</b>
34절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여인에게 선포하는 내용에 관심을 갖아야 합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두 가지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는 구원이고 하나는 병에서 건강해지는 선포입니다.

바로 여기에 고침 받은 사람이 주님을 다시 먼저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고침 받고 몰래 집으로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구원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치유와 함께 구원을 주시기를 즐겨 하셨습니다. 그러나 치유를 해 주셨다고 다 구원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치유를 받은 후 주님의 당부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들에게 구원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만일 주님이 여인을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 여인이 그냥 집으로 간다면 여인에게 구원의 은총이 있었을까요? 또 한 그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그에게 아주 이상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다음부터는 예수님께 나오지 않아도 되고 예수님의 사진이나 동상을 앞에 두고 만진다든가 절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오늘에도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어느 특별한 기도원에서 나오는 물을 먹어야 병이 낫고, 누가 어디에 손을 대고 기도해야 낳고, 병을 고침 받으려면 어느 기도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적용 =&gt;

그런데 어느날 그의 귀에 들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은 그를 새롭게 했습니다.‘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날 수 있다.’는 믿음까지 주었습니다. 그는 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 옷에 손을 살짝 대었는데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가 병이 나아서 행복해야 하는데 그에게는 두려움이 먼저 찾아 왔습니다. 그때 주님이 그를 불러서 두려움을 없애 주시고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들음의 종교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성령의 능력에 실어 절망과 실패로 괴로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 보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순종하여 예수의 기쁜 소식을 실어날으는 복음의 자동차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말하는 자가 없이는 듣는 자도 없고 듣는 자가 없으니 믿음도 없고 믿음이 없기에 구원의 역사도 없다.(롬 10:14)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땅은 성령의 능력이 있는 예수의 이름이 필요합니다.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그 이름으로 말하면 사람이 감동하고, 그 이름으로 말하면 귀신도 물러가고 그 이름으로 말하면 병자고 고침받는 그런 능력 있는 이름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그 이름의 능력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소문이 퍼져 나갈 때 병자가 오고 죄인들이 오고 문제 있는 사람들이 와서 치료받고 해결 받는 우리의 교회와 삶의 현장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길윤구]]></author>
			<pubDate>Wed, 05 Aug 2026 11:20:00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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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 마가복음 5장 30-34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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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https://gfgc.org/message/?mod=document&amp;uid=190]]></description>
			<author><![CDATA[길윤구]]></author>
			<pubDate>Wed, 05 Aug 2026 11:17:09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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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내 안에 거하라 | 요 15:7-1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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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길윤구]]></author>
			<pubDate>Wed, 05 Aug 2026 11:09:39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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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하나님의 사자를 보는 짐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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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길윤구]]></author>
			<pubDate>Wed, 05 Aug 2026 10:59:4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fgc.org/?kboard_redirect=7"><![CDATA[무명게시판 2023-03-25]]></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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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마음이 민첩한 사람 | 단 6:1-28(1-4)]]></title>
			<link><![CDATA[https://gfgc.org/?kboard_content_redirect=186]]></link>
			<description><![CDATA[마음이 민첩한 사람

단 6:1-28(1-4)

2014.06.15. 강북꽃동산교회, 2021.04.18.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2024.05.26

자연에 원리가 있듯이 영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사영리에서는 영적인 원리를 네 가지로 설명했지요. 1)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다. 2) 사람은 죄에 빠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지 못한다. 3)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다. 4) 우리는 개인적으로 나의 구주 하나님을 영접해야 한다.

신앙생활에 수입과 지출 같은 원리가 있습니다.
가령 은혜, 믿음, 소명, 사랑 이런 것은 수입에 해당 되고 봉사, 헌신, 사명, 예배, 기도는 지출에 해당 됩니다. 이것을 잘 유지되게 하는 것이 성공적인 신앙생활이지요.

이 원리를 잘 분석해 보면 그 속에 진리가 있습니다. 수입이 있어야 지출을 할 수 있고, 지속적으로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선 수입이 계속 있어야 하는데, 그 수입은 은혜라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것은 동행이라는 것이죠? 회사와 동행해야 지속적인 수입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은혜는 수입, 사명은 봉사인데 은혜 없이는 봉사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지속적으로 봉사를 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전에 언제 한번 받았던 은혜로서는 계속 봉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원리입니다.

다니엘에 청년 때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강대국인 바벨론이 예루살렘에 쳐들어 와 사람들 죽이고 값비싼 것들을 모두 가져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전은 부서지고 성전 안에 성물은 저들의 보물이 되었습니다.

그때 다니엘을 비롯해 괜찮은 젊은이들이 저들에게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저들이 괜찮은 젊은이들을 포로고 끌고 간 것은 저들을 교육시켜 왕궁에 넣으면 유다 사람들이 아들을 봐서라도 바벨론에 충성할 거라는 생각입니다. 처음부터 인질로 사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라가 파손되고, 사람이 죽고, 나라가 망하고 있을 때, 포로고 끌려가는 불행한 일이지만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나라가 망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있습니다.
(단 1:9, 개정)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본국에 있을 때나 포로로 끌려와서도 늘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쩌면 다니엘이 포로가 된 것도 은혜인지도 모릅니다.

신앙에서 은혜가 수입이면 다니엘은 큰 수입을 얻은 것입니다.
포로 생활에 많은 영적 지출이 필요 할텐데 잘 되었습니다. 그가 받은 은혜의 수입으로 예배도 드려야 하고, 기도도 해야 하고, 함께 고난 당하는 동료도 돌보야 하고, 또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는데 많은 영적 돈이 필요한데 잘됐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은혜가 많아 보이지만, 그 한번 받은 은혜가 그의 평생 행복하게 해 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더더욱 지금은 포로 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한 달 월급으로 일 년을 살 수 없습니다. 계속 월급을 받아야 합니다. 회사와 동행해야 월급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계속 받아야 합니다. 계속 은혜를 받으려면 주와 늘 동행해야 합니다.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가 종으로 사는 중에 그 나라 정권이 여러 차례 바뀌었습니다.
<b>느부갓네살</b> 2세(B.C.605 -562)에 이어 <b>에월 므로닥</b>(B.C.562-560). <b>네리글리살</b>(B.C.560-556). <b>라바시 말둑</b>(B.C.556), <b>나보니두스</b>(B.C.556-539), 그리고 <b>벨사살</b>(B.C. 550-539)이 차례로 정권을 잡았습니다. 벨사살시대는 나라가 매우 혼란했습니다. 이런 혼란스런 시대에 다리오가 왕이 되었는데, 그가 다니엘을 아주 예쁘게 본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또 은혜입니다.
속국의 나라에 포로가 주권국의 왕에게 예쁨을 받는 것이 은혜가 아니면 무엇이 은혜일까요?

다니엘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받는 것은 포로 생활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가 어떻게 수입의 은혜가 계속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은혜의 수입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의 지출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의 수입, 영적인 돈을 많이 벌었을 때
새롭게 왕이 된 다리오가 내각을 구성했는데, 장관을 120명 총리 세 명을 새롭게 세웠습니다. 다니엘은 세 명의 총리 중에 한명인데 다니엘이 수석 총리가 되었습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포로로 잡혀 온 청년이 당시 세계에 최 강대국의 수석 총리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영적으로도 상상할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반면 큰 지출이 예상되는 은혜입니다.

예상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다니엘이 총리가 되자 이를 시기하는 자들이 모함을 꾸몄습니다. 다니엘을 죽이려는 모함입니다. 저들이 법령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 법령은 이렇습니다. “앞으로 30일 동안 이 나라는 다리오 왕이 아닌 그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는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왕의 입장에서 이 법령은 최고의 선물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법령은 정말 왕과 나라를 위한 법령이 아니고 다니엘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꾸민 음모의 법령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리오는 그것도 모르고 그 법령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법령은 선포되었고, 다니엘을 죽이려는 자들은 기뻐했습니다.

저들이 만든 법령에 다니엘이 결려 들수 밖에 없는 것은 “왕이 아닌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하면 사자굴에 넣는다.”라는 조항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다니엘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기도를 해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하루에 세 번, 고향 예루살렘 쪽의 창을 열어놓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니 다니엘이 어떻게 이 법령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다니엘이 살길은 있습니까?
법령을 보니까. 문제가 되는 것은 기도인데, 다니엘이 기도만 안 하면 됩니다. 그가 살 길은 30일 동안 기도를 쉬는 것입니다. 꼭 해야 한다면 속으로 해도 되고, 이물 같은 것을 덮고 숨어서 하면 되고 어찌 하든지 30일 동안 저들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거 하나님도 이해하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우리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다니엘은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를 쉬겠느냐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세상적으로 합리적으로 보면 살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일을 내고 말았습니다. 전에 하던대로 기도를 했습니다. 창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씩 말입니다. 그러다가 저들에게 들켰습니다.

여러분은 이 다니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소신이가 아니면 고집인가요? 지혜가 좀 부족한 것이 아닐까요? 다니엘 왜 그러는 걸까요? 다니엘은 왕의 금령이 반포된 것을 모르는 것입니까? 알고도 그랬다면 무슨 의도일까요?

결국 다니엘을 죽이려는 자들이 저를 왕에게 고발했습니다.

다니엘의 소식을 들은 왕의 반응은 어떠할까요?
다니엘의 소식을 들은 왕은 충격에 빠져 있었습니다. 왜 충격에 빠져 있는 것입니까? 혹 이런 거 아닐까요? 포로로 잡아 온 종이지만 똑똑해서 예뻐해 주었고, 최고의 자리에 앉혀 주었더니 다른 신에게 기도를 해... 배신감 같은 거 말입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도 다니엘은 자기를 수석 국무총리로 세운 왕에게 이렇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b>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는 다리오 왕을 주목하려는 것입니다</b><b>.</b>
다니엘의 소식을 들은 다리오 왕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충격을 받았을까요? 다니엘의 배반 때문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4절입니다.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다리오의 충격은 다니엘이 그를 죽이려는 자들이 만든 덧에 결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왕이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원 하려고 마음을 쓰며”라고 했습니다. 왕은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섬리가 있습니다. 즉, 다니엘이 죽을 만치 고난을 당하는 과정에서 왕의 마음이 하나님을 찾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왕이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노력했지만, 충신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법령은 메대와 바사의 규례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고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리오는 마치 아들이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처럼 견딜 수 없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는 과정일 것입니다. 이제 다니엘만 잘하면 됩니다.

다니엘 어떻게 할까요?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면 살게 되지 않을까요?
성경을 보다가 특별한 구절을 만났습니다. (단 6:3, 개정) “다니엘은 <b>마음이 민첩하여</b>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라고 했습니다.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특별하게 본 것은 “마음에 민첩성”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첩성이 무엇인지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민첩성agility이란! “자극에 대하여 재빠르게 반응하거나, 신체의 위치를 재빨리 바꾸거나, 방향전환을 민첩하게 하는 능력. 자극에 대하여 재빠르게 반응하거나, 신체의 위치를 재빨리 바꾸거나, 방향전환을 민첩하게 하는 능력으로, 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두산백과

이는 주로 체육계에서 사용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왕이 다니엘을 귀하게 본 것은 신체가 아니라 마음의 민첩성이었습니다. 3절에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빠르고, 마음의 방향 회전이 빠르고, 회전과 결정이 빠르고 소신이 있다는 말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왕이 다니엘을 이처럼 귀하게 본 것은 그의 민첩성 때문이데, 그를 지도자로 세우면 혼란한 나라가 속히 든든하게 세워질 것을 본 것이지요?

우리는 이를 영적 민첩으로 모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민첩으로 해석하면 다니엘은 하나님의 마음을 빠르게 바르게 알고 행동하다는 말입니다. 시대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혼란의 시대에는 민첩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또한 시대 말에는 영적으로 민첩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영적 위기에 민첩해야 합니다. 혼탁한 시대에 영적으로 민첩한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사자굴을 선택했습니다.
이게 다니엘의 영적 민첩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그동안 받은 모든 은혜를 이곳에 다 투자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다리오 왕이 다니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자굴에 달려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단 6:16, 개정) “....왕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라고 말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다리오 왕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쓰는 언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리오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리오왕의 이상한 행동에 계속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 6:18, 개정) “왕이 궁에 돌아가서는 밤이 새도록 금식하고 그 앞에 오락을 그치고 잠자기를 마다하니라”고 했습니다.

사자굴에 들어가 있는 다니엘을 본 왕은 밤이 새도록 한 쉼도 잠을 못 잤습니다. 음식도 금했습니다. 오락을 그쳤습니다.

왕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 다니엘이 아들입니까?
다니엘을 사랑해도 너무 사랑하고, 그가 나라를 살릴 인재인데 그가 죽기 때문입니까?

오늘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어떤 계획과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을 통해 이방의 왕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그 일을 다니엘을 통해서 하고 계십니다. 환란의 시대에 혼돈의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 와서 한 번도 정상적인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포로로 잡혀오기 전에도 성전에 파괴되면서 정상정인 예배를 드리지 못한 적이 오래입니다.

그래서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자기 처소에 준비한 기도실에서 하루 세 번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보기에 다니엘이 사사굴에 던져진 그 밤에 아무런 일도 안 하셨습니다. 꼭 다니엘이 버림받는 것처럼 보여졌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났습니다. 새벽에 밤새 잠을 못 이룬 왕이 사자굴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20절의 말씀이지요? 새벽에 왕이 사자굴로 달려가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네 하나님,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하며 다니엘을 불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보시면서 무엇을 느끼고 계십니까?
이것은 단순히 왕이 신뢰하는 총리 하나 구하려는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은 왕을 철저하게 구원하려고 만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방 땅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다니엘을 비롯한 포들을 보호하고자 하시는 하님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살아 나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다리오 왕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4절입니다.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사자굴에 넣었습니다.

26절~27에 새로운 조서를 내렸습니다. (단 6:26-27, 개정) “[26]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27]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하였더라”

적용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간 일은 그의 목숨이 하늘과 땅을 왔다 갔다 한 어머어마한 일입니다. 다니엘에게는 최고의 고난이지요.

그런데 그는 그를 어떻게 감당했습니까?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는 영적으로 민첩함을 주었고 그 민첩함으로 그동안 받은 은혜를 이방 나라 왕고 제상에 공의를 세우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어려운 시대에도 여전히 일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어려운 시대에 영적으로 민첩한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대 말입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매우 혼탁합니다. 민첩함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영적으로 민첩한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description>
			<author><![CDATA[강북꽃동산교회]]></author>
			<pubDate>Mon, 03 Aug 2026 18:33:1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fgc.org/?kboard_redirect=2"><![CDATA[설교게시판 2015-09-25]]></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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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성령을 따라 행하라 | 갈 5:16~25]]></title>
			<link><![CDATA[https://gfgc.org/?kboard_content_redirect=185]]></link>
			<description><![CDATA[성령을 따라 행하라

갈 5:16~25

2024.05.19. 강북꽃동산교회 성령강림주일

오늘 우리교회는 성령강림 주일로 지킵니다.

성령강림 주일이란!
성령이 오신 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전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서 세상에 오셨던 것처럼, 성령께서도 하나님 나라에서 세상으로 강림하셨는데 이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날이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으로 오시는 날 세상은 한바탕 소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려고 동방에 찾아온 박사들이 혜롯왕 궁으로 찾아간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당연히 예수께서 왕으로 오시기 때문에 왕궁에서 나실 것으로 알고 왕궁에 찾아갔는데, 왕궁에서는 도전으로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찾는 소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시는 날에도 또 한바탕 소동이 있었습니다. 성령님을 찾아 어떻게 하려는 소동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그 소동 속에서 하나님이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때는 유대인의 중요한 절기 오순절이었습니다.
오순절은 기독교의 중요한 축일 중 하나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성령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강림한 것을 기념하며, 기독교 초대 교회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오순절은 '50’이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Πεντηκοστή’에서 유래되었으며, 유대인들에게는 처음 수확한 농산물을 바치는 날로서 칠칠절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그래서 천하만국으로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이 절기에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데 수백만이 된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 천년 전 어느 유월절, 예수님은 죽음에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성령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아버지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루살렘 어느 다락방에 120명의 믿는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로서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것이 그들이 모인 방안에 가득찼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고 입이 열리더니 말을 하는데, 동시에 여러 나라의 말이 쏱아져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이것으로 소동이 일어 난 것입니다.

이때 오순절 절기를 지키려고 왔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동은 여기서 벌어졌습니다. 다락에서 들리는 소리는 여러 방언인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각각 다 알아들은 것입니다. 그날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다음입니다. 사방에서 모인 유대인들은 바대인, 메데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 유대, 갑바도기가, 본도, 아시아, 브르기아, 밤빌리라, 애굽, 구레네, 리비아, 기타 여러지방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것이 성을 소동하게 했던 것은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7절 “이 말하는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절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됩니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저 갈릴리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저들이 어떻게 이렇게 말을 잘해 우리가 각각 알아듣는 것이 어떻게 된 것이야!

성령강림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성을 소동하게 했습니다.(6)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습니다.(12) 어떤 이들은 조롱을 했습니다.(13)

그럴 때 성령의 강림은 숨길 수 없는 일이고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이고 소동이 나는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까? 지금도 성령의 역사는 숨길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소동과 놀라고 당황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늘 전과 동일 합니다.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그래서 지금도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성령의 역사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을 마음에 모신다면 세상에 주면에 소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를 체험했던 사도의 경험담을 듣고 성령과 함께 어떻게 동행하며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을 보면 성령을 마음에 받는 일과 관련해서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갈 5:17, 개정)의 말씀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거스린다. 대적한다. 서로 원하는 것은 하지 못하게 한다.’라는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령을 마음에 받고 나면 거스리는 일, 대적하는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육체가 하는 일을 거스려 서로 하지 못하게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당황스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을 원하고 성령이 도와주셔야 이 험한 세상에서 승리하며 산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데 성령님이 우리안에 들어오시면 내 인생과 대적하고 거스리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래서 어떤 분은 이것을 성령의 부작용이라고 말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받아야 하나요? 아니면 거역해야 하나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령을 받으면 우리 마음 안에서 나를 대적하는 일이 생기는데 그래도 성령을 받으시겠습니까? 성령을 받으면 한동안 힘들 수도 있는데 받으시겠습니까? 어떤 분은 싫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까?
고전 2:14절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이라고 했습니다. 즉,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육에 속해 있으면 성령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에 속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육에 속한 사람이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말합니다. (요 3:6-7, 개정)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한 마디로 육에 속한 사람이란! 영이 죽은 사람입니다. 거듭남이란 새로 테어난 것을 말하는데 육에 속했다는 것은 아직 영이 죽은 상태를 말합니다.

성령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영을 살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살려서 죄를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이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성령강림 후 세상에는 사람을 구분하는 새로운 기준이 생겼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과 성령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우리들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안에 들어와서 우리를 살리고 새롭게 거듭나게 하고 싶은데, 영접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안에 들어오면 나를 거스리고 대적하고 못 하게 하는 일들이 생길 것인데 그래도 영접하겠는냐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령을 받아들이면 내 인생에 엄청난 거역에 일들이 생기는데,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엄청난 갈등들을 감당하시겠습니까? 때로는 가정에 불화가 생길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친구들에게 따 돌림을 당할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사회에게 따가운 시선을 받을 수도 있는데 감당하시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에는 새 생명 거듭남 영생 천국이 있는 사실입니다.

참고로 믿음의 선진들은 다 그런 일들을 감수하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란! 다윗, 요셉, 다니엘, 에스더, 초대 사도들 근대에 손양원 주기철 등등입니다.

솔직히 성령님을 선물로 받은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유는 그분이 내 일생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체와의 대적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성령과 대적하는 육체의 욕심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그 육체의 욕심에 대해서 상세하게 나열을 했습니다.
19절부터입니다. (갈 5:19-21, 개정)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15가지나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열거한 육체의 욕심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죄와 관계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죄와 관련된 결과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결단하기가 쉬워졌을 것입니다. 육체의 욕심이 이런 죄와 관련이 있다면 받듯이 성령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음에서 갈등이 일어나더라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마음의 갈등이란! 대적이란! 이런 것입니다.
성령이 음행, 더러운 것, 술취함 분쟁, 분냄 이런 것과 싸우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하면 안 된다고 갈등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무엇이 누가 이런 것을 이기게 하겠습니까?

오직 성령께서 만이 육체의 소욕을 이기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늘 동행하시고 그분에게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18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이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안에 수없이 많은 육체의 소욕이 있고, 세상에는 그것을 이기게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성령의 인도하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참고로 육체의 욕심은 율법과 관계가 있습니다.

25절에는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말인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되는 것입니까?

1) 우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동안, 설교를 듣는 동안, 기도하는 동안,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동안 우리 심령 속에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생각과 일으켜 주시는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주시해야 합니다.

2) 다음으로 그 생각과 마음을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것인지 아니면 내 육신의 욕망에서 나온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이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확인시켜주십니다. 우리 마음이 평안하고 또 그 일을 생각하면 기쁨이 가득합니다. 비록 장애물이 있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과 마음을 따라야 합니다. 주저하지 말고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기고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이때 성령께서 세밀하게 역사하십니다.

3)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우리 안에 성품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표현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의 열매”라고 한 점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의 열매를 단수로 표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 아홉 가지 열매를 성령의 열매들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하나의 열매로 표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홉 가지 성품의 모습은 한 가지 성품의 여러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은 할 수 있는데 충성이 부족하다. 나는 오래 참는 것은 잘하는데 절제가 잘안 된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열매로 이루어진 성품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본연의 성품의 특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성품을 새롭게 빚으실 때 이 아홉 가지 성품의 모습이 하나같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오래 믿으면서도 우리 성품 때문에 아직도 고민이 된다면 아직 성령의 열매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성품 때문에 주변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도 성령의 열매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온전히 성령께 맡기고 성령께서 우리 성품을 새롭게 빚어주시도록 다 맡겨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자의 심령 속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을 따라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분이 주시는 능력으로 육체의 일을 끊고, 그분께서 우리의 성품을 새롭게 빛어 주시기 바랍시니다.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이미 받으신 성령의 능력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이름을 부르시고 성령님을 의지하시고 성령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를 인격적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능력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적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육신이 통제가 안 되는 시대입니다. 시대가 지나도 말과 소는 재갈과 고삐로 통제가 가능합니다. 큰 배도 작은 키로 통제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시대가 기면 갈 수로 통제가 안 되는 것은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살게 될 줄 믿습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강북꽃동산교회]]></author>
			<pubDate>Mon, 03 Aug 2026 18:30:3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fgc.org/?kboard_redirect=2"><![CDATA[설교게시판 2015-09-25]]></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 | 룻기 1:6-22(6~10)]]></title>
			<link><![CDATA[https://gfgc.org/?kboard_content_redirect=184]]></link>
			<description><![CDATA[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

룻기 1:6-22(6~10)

2017.05.14 어버이주일 강북꽃동산교회, 2024.05.12. 어버이주일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가정은 자연 교회가 되기 때문에 가정은 교회보다 더 중요한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어버이는 가정에 중심입니다. 갑자기 아버지 학교 슬로건이 생각납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 “아버지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성경에서 가정은 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족장들의 가정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기 위한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가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는 늘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의 가정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럴 때 지금 세상에 가정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한 채 육신의 행복만을 추구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음의 가정들마저 그렇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의 주인이시라는 말을 들어 본 지 꽤 오래됐습니다.
가정에서 신앙교육이 사라진지도 오래되었습니다.

믿음의 가정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경제 원리로만 생각하고 계산이 안 되면 포기하고 버리기일 수 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대체하는 방법도 세상과 동일합니다. 어려울 때 기도하고 하나님에게서 답을 찾기보다 머리를 쓰고 계산만 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안타까운 한 가정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산업이 발달 되지 못한 시대에 흉년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흉년이 심할 때는 그 지역을 떠나야 하는 것은 어쩌면 상식일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이지요.

본문에도 한 가정이 정든 고향을 떠났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고향을 떠난 사람의 이름을 소개했습니다. 총 네 명인데, 가장인 엘리멜렉, 부인 나오미, 두 아들 말론과 기론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들이 흉년을 피해 찾아간 곳은 모압땅 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모압 땅에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모압으로 간 가장은 당장 먹을 것은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행복도 잠깐, 가장인 엘리멜렉이 돌연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무슨 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지 성경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일은 5절에 있습니다. 그의 두 아들 “말론과 기론이 죽었다”라는 것입니다. 떠날 때 모두 씽글이었는데 모압에 와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는데 이게 왠 일입니까? 모두 부인만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이 그림은 참 별로 안 좋습니다. 우연치고는 이런 우연은 없습니다. 왠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생각도 떨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일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적용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할까요? 문제가 무엇일까요? 무엇이 이 가정을 어렵게 했을까요?

<b>저는 흉년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b><b>.</b>

흉년이란! 명사로 “농작물이 예년에 비하여 잘되지 아니하여 굶주리게 된 해”, “어떤 산물이 매우 적게 나거나 사물의 소득이 매우 보잘것없는 상태나 처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예전에 비해 농작물이 잘되지 않아 굶주린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흉년이 든 땅은 유다 베들레헴이라는 점입니다.
베들레헴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2잘 1절에 나 나타나 있습니다. “헤롯 왕 때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들레헴은 훗날 예수님께서 나신 고향이라는 점입니다. 축복의 땅 아닙니까?

하나님의 섬리에서 볼 때는 베들레헴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고향이었습니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볼 때, 베들레헴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때부터 예수님이 나실 곳이었습니다. 다시 말에서 이곳은 왕이 나실 곳이며, 은혜의 땅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는 땅이며, 약속이 있는 땅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예수님이 태어나실 약속과 은혜의 땅에 흉년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b>약속의 땅에 흉년이 든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냐는 말입니다</b><b>.</b>

예수를 믿어도 가난하고 배고 푼 것은 어떻게 받아 드려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단순히 배부르냐 배고푸냐의 문제만을 위한 것이라면, 오늘 성경을 이해하기는 더 어려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의 삶 중에 배부름의 문제는 기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행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나를 통해 왕을 낳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들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정을 그런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베들레헴이 훗날 예수님의 고향이 될 것을 아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베들레헴이든 모압이든 애굽이든 천국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 에덴에서 쫓겨 와서 사는 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풍년이 있지만, 언제든지 흉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엘리멜렉이 배고 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모압으로 간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나 일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냥 쉽게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벌을 받았다면 엘리멜렉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고향을 떠날 때 고향을 저주했습니까? 사기를 쳤습니까? 아니면 모압 땅에서 불의한 재산을 모았습니까? 성경에 그런 것이 언급이 없는 것을 보아 적어도 그는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문제없이 살았다고 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2절에서 엘리멜렉의 문제를 알 수 있습니다.
하 반절에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라는 라고 했습니다. 아주 간단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흐름맥략을 보면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라는 단어는 그렇게 간단한 단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유는 성경에 엘리멜렉의 잘못이나 실수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압 땅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모압은 사람의 이름입니다.
모압의 탄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성애로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하실 때 브라함의 조카 롯을 구해 주셨습니다. 롯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는데, 이 딸들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아나와 한숨을 돌리더니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부족이 다 죽었다. 우리가 어떻게 대를 이을까”라고 생각하다가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놓고 두 딸이 아버지와 동침하여 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는 암몬이요 또 하나가 모압입니다. 동성애의 땅에서 발전한 또 다른 죄입니다. 근친상간의 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프리섹스라고 말합니다.

롯은 믿음의 사람이지만 세상을 버리지 못한 세속적 성도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롯을 중심으로 만든 땅이 모압입니다. 한마디로 모압은 성적으로 타락한 땅이며 우상의 땅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곳입니다.

<b>엘리멜렉이 가족들을 이끌고 간곳이 바로 모압이라는 곳입니다</b><b>. </b>

그래서 중요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러했듯이 모압은 하나님의 관심에서 벗어난 곳입니다. 은혜가 없는 곳입니다. 모압은 제 이의 소돔 땅입니다. 제이의 멸망의 도시입니다.

따라서 엘리멜렉이 그곳으로 들어가 산 것은 영적인 죽음을 자초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엘리멜렉이나 그의 아들들이 무슨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의 범위를 떠난 것이 문제가 되었고, 장차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인 곳에 들어간 것은 인생최대의 실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에 아무리 성령 충만하고, 불로 충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유혹이 있는 곳에 가면 악에게 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이곳에 들어갈 때는 자유롭게 들어갔다 할찌라도 나올 때는 자신의 의지로 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야 합니다.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보내신 선교사가 아니라면, 천사가 아니라면 들어가면 안 됩니다. 오히려 나와야 만일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아갔다면, 고난은 이미 예고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와 그의 아들들의 돌연 죽음은 그가 죄와 타협하지 않으려고 애쓰다 일어난 결과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랬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또한 아무런 열매도 없는 무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그들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벌을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고 사람의 생각대로 판단했고, 사자굴과 같은 곳 사탄의 굴로 유혹의 굴로 들어갔을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저들을 그 위험한 길을 가는데 왜 잡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아담이 선악과 따 먹으러 갈 때 잡지 않은 것으로 대신 말씀드립니다.

<b>그러면 앞으로 세 명의 여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b><b>? </b>

이들이 이곳에서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한 마디로 이들이 이곳에서 행복하게 사는 길은 없습니다. 이유는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땅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땅이고 하나님의 약속이나 섬리가 없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세 여인들은 아무리 발부둥을 쳐도 행복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먹는 문제는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배불리 먹고 사는 것이 그들의 목표라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즐거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식적이고 성경적인 행복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은 그곳에서 무조건 나와야 하는데, 어떻게 나올 수 있습니까?

오늘 성경에 길이 있었습니다. 6절입니다. (룻 1:6, 개정)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라고 했습니다.

나오미에게 들려진 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소 자기 백성들을 돌보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이 들리자 나오미 마음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6절에 “돌아오려 하여”, 7절에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대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고향에서 들려온 한 소식이 나오미의 생각을 바꾸게 했고 단숨에 세 여인을 모압에서 나오게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향에서 들려온 한 소식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결단을 하게 하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고향에 먹을 것이 그를 그렇게 결단하게 했다고 하는데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먹을 것, 양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들을 돌보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양식이야기가 아니, 하나님 일하시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즉 베들레헴에 농사가 잘되고 먹을 것이 풍성해진 것은 하나님께서 그 땅에 큰 은혜를 주셔서 농사가 잘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소식이) 바로 복음이고 능력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정을 회복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고 나라 밖으로 나갔던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일이고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아 부강한 나라가 되는 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을 때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정에 긍휼의 은혜를 내려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가정을 돌보셔야 가정이 회복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오미가 어떤 노력과 의지로 죄악의 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에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를 보내어 아브라함의 가족을 이끌어 내듯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어떤 사람, 어떤 천사를 사용하셔서 나오미에게 기쁜 소식을 듣게 하셨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고 고향으로 돌아갈 결단을 하게 한 것입니다.

적용 -&gt;
나오미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소식은 오늘 복음을 상징합니다. 나오미의 결단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죄악 된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온 삶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복음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인데, 복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도 그 죄악된 세상에서 스스로 나올 힘이 없을 때 하나님의 기쁜 소식은 지혜를 주며 소망을 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 소식을 들으면 결단하게 되고 결단하면 누구라도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기쁨의 좋은 소식은 생명의 소식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소식입니다. 그 소식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누구라도 들으면 감동이 되고 결단을 할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기쁜 소식이 넘쳐나는 5월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강북꽃동산교회]]></author>
			<pubDate>Mon, 03 Aug 2026 18:17:3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fgc.org/?kboard_redirect=2"><![CDATA[설교게시판 2015-09-25]]></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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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마음이 민첩한 사람]]></title>
			<link><![CDATA[https://gfgc.org/?kboard_content_redirect=183]]></link>
			<description><![CDATA[]]></description>
			<author><![CDATA[강북꽃동산교회]]></author>
			<pubDate>Mon, 03 Aug 2026 18:15:3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fgc.org/?kboard_redirect=7"><![CDATA[무명게시판 2023-03-25]]></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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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성령을 따라 행하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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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https://gfgc.org/message/?mod=document&amp;uid=185&amp;execute_uid=185]]></description>
			<author><![CDATA[강북꽃동산교회]]></author>
			<pubDate>Mon, 03 Aug 2026 18:11:5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fgc.org/?kboard_redirect=7"><![CDATA[무명게시판 2023-03-25]]></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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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여호와께서 자기 벡성을 돌보신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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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https://gfgc.org/message/?mod=document&amp;uid=184]]></description>
			<author><![CDATA[강북꽃동산교회]]></author>
			<pubDate>Mon, 03 Aug 2026 18:09:27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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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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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베드로를 청하라 | 사도행전 10장 1~5]]></title>
			<link><![CDATA[https://gfgc.org/?kboard_content_redirect=179]]></link>
			<description><![CDATA[베드로를 청하라

사도행전 10장 1~5
2024.05.05. 강북꽃동산교회 가정의 주일 설교

지난주 가정교회 사역을 하시는 분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가정교회는 우리가 알고 있는 구역, 셀, 목장과 같은 개념입니다. 가정교회 사역하시는 분들이 한때 어려운 일들을 당한 것은 이단시비 때문입니다. 몆 년 전 우리 총회에도 헌의안이 올라왔습니다. 이상하니까 조사를 해달라 조사결과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문제가 됐냐고 했더니, 크게는 두 가지였습니다. 가정에 교회를 붙였다는 것이고 가정 교회안에 평신도 지도자를 세워서 그들이 성경을 가르칠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원래 구역에서도 구역장들이 예배를 인도하고 목장에서도 셀에서도 지도자들이 있어 그들이 예배를 인도하고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그것 말고 혹 가정 지도자가 세례 주느냐? 축도하느냐? 아니랍니다.

그래서 보니까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너무 열심히 합니다. 애경사가 있으면 만일을 제쳐놓고 그렇게 챙긴다는 것입니다. 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에 어린이 사역을 할 때 가정교회에서 캠프를 왔습니다. 아직까지 기억하는 것은 뭔가를 다르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한때 큰 장마가 져서 강당에 물이 쳐들어왔습니다. 여기저기서 불평의 소리가 날 때 담당 지도자가 ‘애들아’라고 했는데, 이 교회는 자기들이 가지고 온 수건, 침구료 등을 꺼내더니 바닥에 물을 닦는 것입니다. 애들은 잘 훈련된 군사처럼 기쁘게 바닥에 물을 닦아 냈습니다.

그날 놀라운 사실은 코로나 시국에 많은 교회가 문을 닫을 때 가정교회는 부흥했다는 것입니다. 비결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철저하게 공 예배드렸고 철저하게 가정을 섬겼습니다. 가정교회를 구역으로 조직하여 철저하게 가정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목사님들도 사역의 기본이 섬김이랍니다. 제가 동의한다고 했더니 저보고 가정교회 사역의 형태로 몸이 갖춰졌다고 이야기 하시더군요

5월 가정에 달입니다. 5월에 싱그러움 만큼 여러분의 가정에 풍성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는 오늘 가정의 주일로 지킵니다.

가이샤라에 고넬료라는 군대 백부장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사자가 그에게 하는 말은 베드로를 청하라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당황한 것은 베드로를 집으로 청하는 그 일은 그냥 단순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로마에서 식민지에 파송한 백부장이고, 베드로는 저들이 죽인 스승의 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백부장은 당시 100명의 군인을 통솔하는 군인이지요. 요즘으로 말하면 중대장에 해당됩니다. 그 지위와 권세는 요즘 중대장과 비교가 되지 않게 컸습니다. 옛날 우리가 일제 치하에 있을 때 일개 순사만 되어도 얼마나 세도를 부렸는지를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고문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인지 모르겠지만, 세도가 당당한 로마의 백부장이 베드로를 초청하려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 초청에 응할까요? 객관적으로 서로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어떻게 초청할까요? 고넬료가 아무리 주둔군이 가지는 권세를 가졌다 하도라도 베드로를 강제로 집으로 오게 할 수 있을까요? 또한 베드로는 법을 어기고 고넬료의 지에 갈까요? (행 10:28, 개정)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한 마디로 원수와의 만남이 아니겠습니까? 혹 비밀리라도 만나고 나중에라도 총회가 알면 베드로는 사도 면직감 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자를 고넬료에게 보내서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행 10:5, 개정)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양쪽에 다 같은 시간에 만나라고 하셔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으로 갔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시는 걸까요?

베드로가 고넬료가 나타나자 우리는 여기서 매우 당황스러운 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의 발아래 엎드려 큰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도 당황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일어나라 나도 사람이라”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고넬료를 보고 한 첫말입니다.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베드로는 아직 고넬료의 집에 오게 된 일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왜 고넬의 집에 와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냥 성령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이런 순종이 있을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하셨을까요?
성경에서 가장 확실한 답은 33절에서 보였습니다. (행 10:33, 개정)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b>모든것을 듣고자</b>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하신 것은 고넬료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려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고넬료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베드로를 청했습니다.

모든 것, 그것이 무엇일까요?
고넬료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일가와 친척을 다 모으고 그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는 베드로의 입술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 베드로를 통해서 고넬료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34절에서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습니다. 35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한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베드로가 이 집에 오게 된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참고로 고넬료는 의를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그가 행한 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장 2절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였다”라고 말입니다. 4절에서는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기억하신바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38절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을 붓듯 하셨으매 그가 선한 일을 하며,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 39절 우리는 유대인이 땅과 예루살렘에서 행한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라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살리셨다. 43절 이제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는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상은 베드로가 그날 고넬료 집에서 한 말씀을 요약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 고넬료의 집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어떤 이는 방언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저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성령을 받았으니,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일은 정해진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정리해 보면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청하라고 한 것은 고넬료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관계된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성령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왜 고넬료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시려는 것인가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 은혜를 베드로를 통<b>해서</b>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 은혜를 베드로를 통해서 주셨느냐는 설교 중에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고 못할 일 전혀 없으신 분이신데,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성령을 주시기 원하셨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얼마든지 주실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꼭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하시는 걸까요? 고넬료와 베드로는 서로 교제할 수 없는 관계를 하나님께서도 잘 아실턴데 말입니다. (행 10:28, 개정)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하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환상을 보고 더럽다 속되다. 하나님께서 잡아 먹으라. 베드로 더러워 못 먹겠습니다. 가라 못 가겠습니다. 라며 얼마나 어려운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상황은 인간의 방법과 생각으로는 서로 만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만났습니까? 18절입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라고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성령께서 강력하게 도우셔서 저들이 만나게 되었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베드로를 통해서만 성령을 선물로 주시려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남달리 성령이 큰 은혜를 줄 수 있기 때문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까?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난 일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했습니다. 그때 어떤 이들은 비난을 했지만, 베드로가 성령이 하신 일을 설명하자 사람들이 잠잠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행 11:18)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를 통해 <b>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셨습니다</b><b>. </b>그럴 때 베드로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예루살교회에 이 일을 보고하게 하고 예루살렘렘 지도자들이 모도 다 알게 함으로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전하고 그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b>또 하나는 보증 때문입니다</b><b>.</b>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고넬료에게 성령을 주시고 방언을 주실 수도 있고 영육을 치료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령, 그 방언, 심지어 그 병 고침, 보증이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다른 곳에서 가져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앙이 있는 자들의 행동과 입술 통하여 보증하고 영광을 받으시려는 것입니다.

신앙! 그것은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인간의 행위입니다. 무릎을 꿇는다든가 금식을 한다든가 손을 든다든가 날짜를 정하는 것들 등등입니다.

어떻게 왜 무슨 과정을 통해서 나타나는 결과가 하나님께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넬료와 베드로를 만나게 했습니다.
만일 고넬료가 혼자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고 영육이 치료되었다고 합시다. 누가 인정 할 건데, 방언은 맞어... 죄사함 구원은 맞아....

전에 저 혼자 방언에 은사를 받았습니다. 이거 좋은 건지 나픈 건지 모르고 산지 오래 됐습니다. 어떤 때는 좀 이상했습니다. 서울에 어떤 교회 청년회 모임에서 기도를 하다가 폭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은 지적이고 조용조용하신 분인데, 얼마나 어색한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성령을 주시고 방언을 주실 때 베드로가 증인이 되었고 확실히 성령의 은혜로 인정하고 세례까지 베풀고 예루살렘교회 보고까지 했고 예루살렘교회가 하나님께 영광까지 돌렸으니 했으니 얼마나 권위가 있는 일입니까?

하나님은 전에는 지금이나 종들을 통해서만 말씀하셨고 종들을 통해서 보증이 되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저에게 허락하셨고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에 관여 하면서 해석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일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저는 올해 노회 일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노회는 개 교회에 가서 목사와 장로를 세우는 일 교회를세우는 일을 합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는 남양주에 있는 개 교회가서 담임목사를 위임하는 사역을 하게 됩니다. 이 교회는 이미 교회를 4층으로 아름답게 건축하고 빛도 없고 성오님도 여러분 계시고 장로님도 계시고 자립하는 교회입니다. 아버님이 목사님 이셨고 뒤를이어 아들이 목회를 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담임 목사이지만 교회에 중요한 공동회를 할 수 없고 세례식도 성찬식도 할 수 없습니다. 위임이 안 됬기 때문입니다. 그런거 하려면 노회에서 허락된 자가 가야합니다. 그런데 다음 주 우리가 가서 설교하고 위임식을 하면 이후로 그 목사님께서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보낸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고넬료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시려는 것일까요?

놀랍게도 고넬료는 이미 아주 훌륭한 신앙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유의할 사항입니다. 당시 1세기는 과도기였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넘어온 상태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이었으므로 개중에는 그 신앙이 아직 구약의 상태로 머물러 있던 신앙인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10장 뒷부분을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를 통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혹시 그를 처음 믿는 초신자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아직 예수님을 소개받지 못했지만, 이미 그는 경건한 유대인들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소개 받고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모범이 된 것은 여러 가지 측면이 있지만 그 중 한가지가 바로 ‘가정 중심의 신앙인’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고넬료의 신앙을 가정이라는 앵글에 맞추고 본문을 보면 고넬료의 가정이 다음의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절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 ”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넬료는 혼자만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온 가족으로 하여금 다 함께 믿게 했습니다. 온 가족이 다 함께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정 행복의 기본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고 교회나 왔다 갔다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가치관이요, 인생관입니다. 말하자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며 방향감각입니다.

가족들이 신앙이 있고 없고 하면 서로 다른 가치관, 인생관을 갖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될 텐데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불화의 요소가 항상 내재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집안에 원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신앙이 통일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 복음화를 위해 수고해야 됩니다. 제일 좋은 것은 가장이 먼저 예수 믿고 그로 인하여 차례차례 믿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다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럴경우에는 가족 중에서 위치가 어떠하든지 먼저 믿은 사람이 우선 “내가 가정의 제사장이다” 생각하고 나머지 가족들을 기도하며 인도하면 됩니다.

이를 위해 특별히 자녀들에게 신앙을 잘 전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산 물려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공부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 물려주는 겁니다. 재산을 물려주고 공부를 시키는 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죠. 우선순위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분들이 우선순위를 지키지 못합니다.

본문 2절을 다시 보면 후반 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 ...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 ” 그랬습니다.

그의 가정은 받은 축복을 이웃과 나누는 가정이었습니다. 행10:24에는 베드로를 청해 놓고 일가친척들은 물론이고 친구들도 불러 모았습니다. 이웃과 복음을 나눈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넬료의 아름다운 인격은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행10:22)

이런 가정이었기에 하나님은 고넬료 가정을 사용해서 베드로의 편견(이방인을 배제하고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벗겨 주는 역할을 감당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가정에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구원의 복음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가족들끼리 말 먹고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웃과 세상을 향해 복을 나누는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의 목적이 바로 복의 근원(=복의 통로)이 되게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가정은 축복의 웅덩이가 아닙니다. 흘려보내는 축복의 시냇물입니다.

이렇게 사명을 감당할 때 그 가정을 하나님이 더욱 풍성하게 축복하십니다. 잠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구제하고 나누는데 신기하게 더욱 풍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넬료의 가정은 이처럼 신앙이 있고 사랑이 있고 사명이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행복이 있고, 영광이 가득한 가정이었습니다. 고넬료의 가정 같이 지상의 작은 천국 만드시고, 행복한 인생 의미 있는 인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강북꽃동산교회]]></author>
			<pubDate>Mon, 03 Aug 2026 18:04:25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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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베드로를 청하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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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https://gfgc.org/message/?mod=document&amp;uid=179]]></description>
			<author><![CDATA[강북꽃동산교회]]></author>
			<pubDate>Mon, 03 Aug 2026 17:42:3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fgc.org/?kboard_redirect=7"><![CDATA[무명게시판 2023-03-25]]></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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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 마태복음 17장 1~13절(9-1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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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마태복음 17장 1~13절(9-13)

2024.04.28.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2024.05.25. 장로회연합회 총회

1)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사역중에 아들을 데리고 다니십니다. 교회 심방, 장례식, 결혼식, 제직회 공동회의에 여전도회 남전도회에 모임에 며칠 전에도 지방에 한 장례식 때문에 갔었는데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전에는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 복사님이 아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신학생이랍니다.

2) 오늘 예수께서 세 명의 제자를 따로 데리고 산을 오르셨습니다. 그날 예수님과 함께 간 제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1절)입니다.

예수께서 오르신 산은 다볼산입니다. 다볼산의 높이는 약 570미터입니다. 관악산 연주봉 높이가 629미터이니까 그보다 조금 아래 정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 정도의 높이라면 그냥 간단한 동네 뒷산을 산책하는 것이 아닌 특별한 의도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어떤 의도가 있을까요? 시간도 꽤 걸릴 것 같은데, 그때 다른 제자들은 뭐 하고 있어야 하나요? 별로 좋은 그림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주님은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산행을 하시는 걸까요?

3) 1절에 예수님의 의도가 보일만 한 구절이 있습니다. 1절입니다. (마 17:1, 개정)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엿새 전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엿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보았더니, 마태복음 16장인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이사랴 빌립보지역에서 사역하셨습니다. 그때 주께서 제자들에게 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러자 제자들이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에레미야, 더러는 선지자중에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말을 듣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의 말을 들으시고 아주 크게 반응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리고 덧붙이셨습니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극찬입니다. 그날 베드로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신앙고백을 주님께 했고, 그래서 그는 주님으로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난 잠시 후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16:21, 개정)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이 일을 <b>비로소 말씀하셨습니다</b><b>. </b>당신의 죽음에 대해서 오늘 처음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에 제자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반응을 보게 됩니다. (마 16:22, 개정)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아주 당황스러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16:23, 개정) “<b>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b>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사탄이라니요.

조금 전에는 ‘복이 있다고 하셨고 이를(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탄이라니요. 내 뒤로 물러가라니요.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니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사라니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자라”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은 저를 무섭게 질책하셨습니다. 베드로 망신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지난 엿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b>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b><b>“</b><b>엿새 후</b><b>”</b><b>라는 말은 </b><b>‘</b><b>이 일이 있은 후</b><b>’</b><b>라는 말입니다</b><b>. </b>
<b>즉</b><b>, 6</b><b>일 뒤에 주님께서 세 제자를 데리시고 산에 오르셨다는 말입니다</b><b>.</b>

그럴 때 이 산행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인가 어떻게 하려는 것이 틀림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질문에 놀라울 정도로 신앙고백을 했다가 고난 이야기를 듣자 곧바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베드로가 안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사탄이 되고 사탄의 말을 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산행을 결심하셨을 것 같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시려는 걸까요?

여러분은 감이 오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지금 주님은 저런 제자를 앞에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저들을 좀 더 강하게 훈련을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계속 베드로를 주목하려고 합니다.
베드로는 제자 중 늘 돋보이는 존재였습니다. 주님의 일에 늘 앞장섰습니다. 열심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그를 좋아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알려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놀라운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한순간에 사탄에게 흔들려 주님을 넘어 질만 한 말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다가 어떤 때 한순간은 사람의 일을 생각해서 주님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습니다.

이때 베드로 자신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요? 또 얼마나 자신에게 실망했을까요? 주님 앞에 죄송스러움도 있었겠지만, 자신에 대한 실망과 미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b>그럴 때 예수께서 베드로를 산으로 데리고 오르셨습니다</b><b>.</b>
이유는 그를 혼내 주시려는 것이 아니고 그를 더 강하게 키우시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보다 못해서가 나이라 더 훈련 시켜서 하나님의 귀한 그릇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다른 제자보다 더 잘나서 신비한 무엇을 보여 주시려고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질문했고 부탁을 했다면, 그리고 함께 변화산에 오르자고 했다면, 어디를 좀 가자고 했다면, 노회에 일 좀 하자라고 하셨다면, 우리를 좀 더 다듬고 훈련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큰 뜻을 이루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b>주님의 선택을 받고 산에 올라간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b><b>?</b>

2절에 (마 17:2-3, 개정)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산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의 모습은 변화되어 해같이 빛났으며, 주의 옷은 빛과 같이 희어 졌습니다. 그때 언제 오셨는지 성경에 거장 모세와 엘리야가 오셨고 예수님은 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고 <b>계셨습니다</b><b>. </b><b>참으로 신비하고 놀라운 장면입니다</b><b>,</b>

<b>이는 먼 훗날 저 영원한 나라에서 있을 모습입니다</b><b>.</b>
계 1:14절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리고 계 1:16을 보면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오늘 본문의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잠시 후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 지라”(5)는 소리가 들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궁금했던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용을 정리해 보니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듣고 순종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산행의 목적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저들에게 보여주신 변화산에 일은 훗날 살게 될 천국인데 그것은 십자가 후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산행의 목적은 십자가의 고난을 돌파해 나갈 길을 말씀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세 명의 제자들은 변화산 위에서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것을 보았고, 들을 수 없었던 것을 들었습니다. 믿음의 거장들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천국은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믿음은 굳건할 수 있었습니다.

왜 저들에게 굳건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까?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아버지게 가시면 그만이지만 제자들을 세상에 계속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십자가와 고난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 십자가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체험입니다. 하늘에 신비함을 미리 보고 듣는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이지요?

예수님의 기도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주님은 오늘 이 신비한 일들을 산 아래 있는 모든 제자들과 오늘 우리와도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산에 오르는 일이 힘듭니다.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래서 정리해 보았더니 하나님의 은혜는, 천국은 편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애쓰고 땀 흘리는 곳에 있습니다. 고난과 죽음 십자가 후에 있었습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는 이것을 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도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수고하는 동역자들에게 헌신하고 수고할 수 있는 기회를 먼저 주셨습니다. 잘 감당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b>그러면 이 특별한 은혜를 체험한 제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b><b>?</b>

본문 4절을 이 보면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한 베드로가 주님께 한 가지를 제안합니다. “주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산 위에 일들에 너무 감격한 베드로는 그 변화산 위에 계속 머물러 있자고 한 것입니다.

주님의 생각은 어떠하실까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는 저의 말에 이렇다 저렇다 하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일어나셔서 내려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또 무안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마 17:9, 개정) “...너희는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b>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b>.”라고 했습니다. 오늘 산에서 있었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 그러시는 걸까요? 왜 본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걸까요?
제자들이 본 것이 어디 작은 것입니까? 이스라엘 역사에서 신과 같은 존재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정말 너무 황홀하고 두려고 떨리기도 하여 엎드려서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체험을 어디서 할 수 있습니까? 모든 제자가 다 본 것이 아니잖습니까? 얼마나 귀해요. 말하고 간증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것은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산에서 본 것을 말하지 말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 있기 전에는 본 것을 말하지 말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b>그러면 왜 주님은 본 것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b><b>?</b>
저는 제자들의 연약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산 아래는 아 홉명의 제자들이 있는데 내려가서 ‘우리 모세를 봤다. 엘리야를 봤다.’라고 하면 어떤 분위기가 될까요? 시기 질투 그런 거 생기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떠들고 다니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에 도움이 될까요?

사실, 그동안 제자들은 주님은 함께 역하시면서 수없이 많은 이적과 표적을 보았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 바람과 바다가 잔잔하게 되고 병든자에게 말하면 일어나고 귀신을 명하며 쫓겨가고 축사하면 먹을 것이 한없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저들을 보실 때 제자들은 변하게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부활 이야기가 도움일 될까요? 한 마디로 저들은 아직 한없이 약하기만 합니다.

지금 주님의 사역 말년인데 저들은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한 없이 약하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영광과 기적 앞에서는 언제나 신나 하면서 십자가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안에 이런 성도들 계시지 않습니까?
큰 은혜를 받았을 때, 그곳에 머물러 있고 싶어 하고 박수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어려움 앞에서는 불편해 하고 누구 탓하는 분들 계시지 않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맥을못 추시는 그런 분들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에게는 변화산에 은혜가 필요합니다. 변화산은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주님도 모든 제자를 다 데리시고 가시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헌신이 봉사가 변화산의 은혜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b>중요한 것은 변화산이 좋지만 내려와야 하는 이유입니다</b><b>. </b>

제자들이 변할 곳은 변화산이 아니라 십자가가 있는 곳, 즉 예수를 죽이려고 기다리는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거기에 저들을 변화시킬 성령이 임하십니다.

(행 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래서 제자들은 산에 초막을 짓고 그것에 살면 안 됩니다. 세상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저들이 변화되는 것은 저들이 산에서 보고 들은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섬리와 약속이 있는 현장에서 십자가를 체험해야 합니다. 십자에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이 새롭게 변합니다.

이 땅에 십자가 없이 죄문제를 해결한 성도 없고 예루살렘으로 강림하신 성령의 도움없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 성도는 없습니다.

전에 우리는 교회가 만들어 준 영광의 자리에서 성도들의 박수와 존경을 한눈에 받으면서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 감격은 너무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제 그 변화산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거칠고 고단한 세상 한복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고, 가서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놀랍게도 성령님은 거칠고 고단한 세상 한복판에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우리와 만나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므로 전에 지금 우리가 본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내려가서 십자가 앞에 기다리는 성령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한 줄 믿습니다.

적용~
교회의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모이는 기능, 흩어지는 기능입니다. 열심히 모여 신비한 은혜를 체험하고 나가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장로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장로님들의 모임과 삶의 현장에 성령의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gfgc]]></author>
			<pubDate>Fri, 31 Jul 2026 10:26:1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fgc.org/?kboard_redirect=2"><![CDATA[설교게시판 2015-09-25]]></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은혜로 사는 사람들 |  창세기 6장 5 ~ 8절]]></title>
			<link><![CDATA[https://gfgc.org/?kboard_content_redirect=176]]></link>
			<description><![CDATA[은혜로 사는 사람들

창세기 6장 5 ~ 8절

2024.04.21. 강북꽃동산교회

5년전 우리노회 게시판에 슬픈 소식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경기도 평택에서 목회를 하시는 후배 목사님이신데,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참 마음이 아픈 기도제목 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중간 중간에 아이가 계속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난주 게시판에 다시 글이 올라왔습니다. 목사님들 기도 덕분에 완쾌판정을 받았다는 감사의 글입니다.

며칠 전 지방에 장례식이 있어 다녀오는 중에 그 목사님과 동승 하게 되어 치료받는 과정을 다 듣게 되었는데 오진 때문에 고생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백혈병으로 알고 치료를 받고 달이 넘어가는 어느 날 의사 선생님께서 심각하게 보호자를 부르더니 심각하게 말씀하시더랍니다. 백혈병이 아니라 림프종 암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너무 죄종하구요. 빨리 항암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 목사님 심정이 어떠했냐고 물었더니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사가 하나님 이시냐 그럴 수 있지요”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그러는 과정에서 암은 뇌를 제외한 온몸에 퍼졌고 항암을 하는 과정에서 두번에나 실신했고 중환자실에 들어가기 전 아버지는 무거운 아이를 안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생명에 주인인 것을 알게 되었고 인생이 무엇을 한들 의미가 있겠느냐는 말을 했습니다.

5년이 지난 지난달 완쾌판정을 받고 지금은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고 주의 일에 더욱 충성을 다한다고 했습니다. 전 그분에게 함께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 하루도 한 시간도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무엇입니까?
아무런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조건 없이 라는 것은 아무런 단서를 달지 않고 그냥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값없이 라는 것은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거저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공기와 햇볕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매일 그냥 마십니다. 조건 없이 그냥 공짜로 얻는 것이지만, 생명처럼 귀하고 값진 것들입니다. 없고 못 마시면 죽는 게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습니다. 조건 없이 그냥 주십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영혼에 생명처럼 귀하고 없으면 영혼이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 은혜로 살고 이 은혜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진정 은혜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만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나타나셔서 방주를 만들라고 하시면서 방주의 설계도를 상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길이는 300규빗(135M), 너비 50규빗(22.5M), 높이 삼십규빗(13.5M) 재료는 고르페 나무로 만들고, 3층으로 하고, 칸들을 막고, 역청을 칠하고, 창은 위에 하나 내고, 옆에 문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방주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이미 하셨습니다.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당에 가득함으로 그 끝날이 내게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창 6:5~6을 보면 매우 심각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에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가 살던 시대에 와서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다 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좋다고 하시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좋다고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인하여 한탄하시고 근심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절을 보면 큰결심하셨습니다.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을 다 없애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다 없애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땅에 역사상 전무후무한 홍수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홍수로 다 죽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점을 심각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노아 시대 이후 이 세상에는 죄악이 점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노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죄악이 가득하다는 사실과 사람들의 생각에는 온통 악한 것들로 가득하게 되었다는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죄악과 사람들 생각의 악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근심하신다는 사실과 그 근심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근심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기 마냥 좋으시고 기다리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관한 절대 권한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마치 농부가 당신이 운영하는 농장을 아름답게 가꾸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시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눅 13:7)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에 농장에 풀처럼 죄가 자라서 판을 치는 것을 간과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다면 세상에는 심판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다면 노아는 심판을 면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구절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가지는 노아가 만든 방주가 구원의 방주라고 할 때, 오늘의 교회가 구원의 방주로 비유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 세상을 심판하시고자 하실 때 노아를 지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실 때,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노아에게 오셨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다면 노아와 그의 가족을 위해서 방주를 지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지으라 하신 방주는 당시 모든 사람이 누구나 다 들어오게 설계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선 누구나 다 들어오는 방주라면 만들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은 다른 방법으로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의 심판은 노아의 방주를 중심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곳에 교회를 세우라고 하셨으면 세상에 심판이 있을 것이고 그 심판에서 먼저 우리와 우리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심판은 교회를 중심으로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아는 것이 복이고 그래서 준비한다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꽃동산교회는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우리와 우리 가족의 영혼 구원을 위해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구원의 방주를 허락하신 이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아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아는 어떤 사람이기에 땅이 모든 사람이 다 타락하고 하나님이 세상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실 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찾아오셨다는 말입니다.

노아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맑히고 있습니다.

6:9을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했고 6:22을 보면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이상을 보면 노아는 분명 세상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세상의 죄인들과 구분되는 의인이었기 때문에, 세상에 불완전한 자와 달리 완전한 자였기 때문에 당연히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세상 그 누구와도 달리 하나님의 약속을 순종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만 노아를 평가한다면 노아에 대해서 큰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노아의 아름다운 행위를 좋아하셨고 노아의 아름다운 행위로 구원받았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빠짐없이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6절 8절을 그냥 지나가면 오늘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6장 8절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7:23입니다.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유일하게 노아와 그 가족들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노아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굼궁한 일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받은 은혜를 찾아보았더니 9절입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라고 했는데 이 부분은 계속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탄하실 만큼 세상이 타락했는데 어떻게 그만 의인이고 완전 한자가 될 수 있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위에서도 한번 오해를 했었는데 또 만났습니다. 의인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말에 또 신경이 쓰입니다.

세상에 하나님 외에 완전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노아를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리해 보았더니 그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노아가 남달리 의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가 120년동안 배를 짖는 일에 가족이 협력한 것 그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노아가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 지는 것은 노아는 어떻게 이런 은혜를 입었느냐는 것입니다. 다음 구절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노아가 의인으로 살 수 있게 되고 120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산 위에서 배를 지으면서 변함이 없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니 의인이 될 수 있고 믿음의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세상에서 의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침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은혜로 허락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로 허락하셨습니다.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에 들어가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노아에게 그 무엇보다 큰 은혜가 저 방주였던 것처럼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 큰 은혜는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엡 2:8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습니다. 은혜 중의 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것이 다 은혜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은혜, 최고의 은혜, 반드시 있어야 할 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감격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찬송이 이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모세는 홍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6:8에서 본격적으로 노아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노아를 소개하면서 처음 운을 뗀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노아가 은혜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심판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히 9:2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노아 시대의 홍수 대신 이제 하나님께서 심판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홍수와 같은 형태의 벌은 없을 것이고 대신 죽은 이후에 심판이 준비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 시대에 홍수가 준비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다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 홍수를 대비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7:23입니다.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유일하게 노아와 그 가족들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출 2장을 보면 모세가 태어날 때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왕이 이스라엘 아기가 태어나면 남자 아이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석 달 동안 모세를 죽이지 않고 숨겼습니다. 더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담아 강에 띠워 보냈습니다.

바로 그 때 하필 바로의 딸 그러니까 공주가 목욕하러 그곳에 나왔습니다. 공주의 눈에 발견되어 공주가 양자로 삼아 키우게 됩니다. 그런데 또 하필 요게벳이 모세의 유모로 채택이 됩니다. 모세를 품에 안아 키우게 됩니다. 이렇게 모세가 태어나 자라나는 동안 이 ‘하필’의 기적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태어나 자라는 동안 이런 하필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하필의 기적,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후 12장을 보면 바울은 남다른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남들에게 없는 육체적인 질병이 있었습니다. 복음 전하는 데 큰 장애였습니다. 마치 가시가 박혀있는 것처럼 자기를 괴롭혔습니다. 이것 좀 고쳐달라고 간절하게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냉정하십니다. 응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가시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질병도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선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질병 때문에 늘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늘 하나님 의지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주신 남다른 은사들 하나하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준비하시고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질병까지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준비하시고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이 모두가 은혜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돌아보면 그 어느 하나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하게 됩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여기 이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장차 하나님 부르시는 날까지 이 땅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적용~

그렇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내가 믿음이 커서 봉사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능력이 많아서 봉사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결심이 굳건해서 봉사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구원 받고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믿음을 지키지 못합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서는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일찍이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서 단적으로 답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삽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살게 하고, 나를 구원하고, 나를 헌신케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새벽 3시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하는 사람들이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gfgc]]></author>
			<pubDate>Fri, 31 Jul 2026 10:23:37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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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내일을 위하여 거룩하라 | 여호수아 7장 10~13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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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kboard-title””">내일을 위하여 거룩하게 하라
여호수아 7장 10~13절
2024.04.07. 강북꽃동산교회</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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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의 고단한 삶을 마친 후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것은 제대로 된 군사도 없고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광야 사람들이 여리고 성을 함락시켰고 그곳에 진입했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여리고 성은 저들의 상대가 될 수 없는 곳입니다. 여리고 성은 견고하고 그 안에는 잘 훈련된 군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 성을 매일 한 바퀴 육 일을 돌고, 칠 일째는 일곱 바퀴를 돌고 소리를 쳐서 성을 무너트렸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돌고 소리친 것밖에는 없는데 그 견고한 여리고 성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은 무엇일까요?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하는 과정을 좀 더 관찰 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여리고 성의 점령은 가나안 점령의 시작일 뿐입니다. 가나안에는 기브온 성을 비롯해 수십 개의 성이 있습니다. 헷족속, 가나안족속, 아모리, 히위, 여부스족이 살고 이 있습니다. 저들은 이스라엘에 싸움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두를 저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여리고에 입성한 이스라엘은 이제 가나안을 하나하나 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가나안을 축복의 땅으로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일은 저들의 몫입니다. 저들은 그곳에서 생육하고 번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가나안을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 옛말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맡기신 것과 같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완전히 정복하고 그곳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방법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과정 과정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또 하나님께서 저들을 도와주셔서 저들은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두 번째 점령하려는 성은 아이 성이었습니다. 늘 그래 했듯이 여호수아는 아이 성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아이 성을 정탐하고 온 정탐꾼의 보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이 성은 작은 성입니다. 그러니 이 백성을 다 보내지 마시고 2~3천 명만 보내셔서 그 성을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오니 모든 백성을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7:3)라고 했습니다.
정탐꾼이 보고한 대로 아이 성은 작은 성으로 인구는 약 1만 5천 명입니다. 여리고 성 5만 명에 비하면 3분지 1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정탐꾼의 말대로 2~3천 명만 보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전쟁이 있을 텐데 일부는 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합리적인 제안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정탐꾼의 말대로 3천 명만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스라엘은 아이 성에 들어가자마자 저들의 전략에 말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36명이 죽었고 바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얼마 전 그 어마어마한 여리고 성도 한 명의 희생자 없이 무너트렸고 들어왔는데, 여리고에 3분의 1도 안 되는 작은 아이 성에 갔다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40명 가까이 죽고 나왔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그것을 본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상황에서 여호수아의 군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성경을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2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점령하기 전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3절에 정탐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성이 작고 사람이 적으니 2~3천 명만 보내시지요.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는 것은 수고스러운 일입니다.” 고했습니다. 그래서 4절입니다. 여호수아가 3천 명을 보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아이 성 전투에서 여호수아가 한 일의 전부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여호수아가 무엇을 잘못 했습니까? 혹 여러분은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 발견하셨습니까?
전 아무리 봐도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민하면서 계속 묵상해 보았더니 그런데 조금 우려가 되는 부분이 보였습니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냄새가 납니다.
인본주의란! ①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는 사상입니다. 즉, 인간의 가치를 주된 관심사로 삼는 주의이며, 신의 실재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며, 인간의 본성에 가치를 부여하고 인간의 이상을 실현을 위해 종교적 감성을 활용한다.
‘인본주의’라 할 때 대체로 다음의 몇 가지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① 인간의 고통을 극소화하고 복지를 증진 시키려는 사회적 운동을 통칭하는 것으로 본다. ② 신(神)이나 자연이 숭배 대상이 아니라 오직 인간성(humanity)만이 존귀하다고 믿는 인간성 숭배의 사상을 일컫는다. ③ 예수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고 그 인격성(人格性)만을 주장하는 신학 사상을 일컫는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신앙과는 완전히 대치되는 사상이지요?
성경에서 인본주의 모습이 시작된 곳은 사무엘상 8장입니다.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와서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세우자고 해서 그때 세워진 왕이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전에는 철저히 신본주의 나라였습니다. 사울은 인본주의 대표적인 왕이지요.

인본주의가 우리 신앙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중요시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나라가 사람을 중요시하고, 사람 중심의 사회를 만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세상에서 사람을 제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어 영원히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위해 독생자 예수를 대신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사랑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인본주의에서 가장 흔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할 것은 자기 공로, 자신의 지식과 판단으로 어떤 성과를 냈고, 그것을 들어내고 싶어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요즘 그런 일들을 세상 정치가들에게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욕심이 생기고 판단이 흐려립니다. 그 결과 하나님일 것과 내 것을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인본주의 사상이 뿌리가 깊게 내려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선 인본주의는 신본주의 반대개념이지요.
여호수아와 사람들이 다 잘했습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생각해서 모든 군인을 다 보내지 않고 3천 명만 보낸 것도 잘한 그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 성경에는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점령하려고 할 때 하나님과 나눈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6일 동안 매일 한 바퀴식 성을 돌라. 7일이는 일곱 바퀴를 돌라는 메시지를 받았는데, 아이 성을 점령하려고 갈 때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기도를 안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습니다. 아이 성과의 전투를 앞두고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히려 정탐군의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2~3천 명만 보내라고 했더니 정확하게 여호수아는 3천명을 보냈습니다. 저는 이게 전쟁의 실패 원인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것이 어떻게 아이 성 점령 실패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까? 물론 이것이 전쟁의 실패 원인이 된다는 그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지도자 여호수아도 그것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너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꿰 앞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 쓰고 날이 저물도록 슬프게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음과 같이 응답하셨습니다. 10~11절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너무도 놀랐습니다. 11절 때문입니다. (수 7:11, 개정) “이스라엘이 범죄 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놀란 것은 이스라엘에 범죄 하였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 범죄는 하나님의 명령과 관련된 것인데, 온전히 바친 물건이라고 했습니다. 13절에도 보니까 “너희 가운데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참고로 하나님은 “그 온전히 바친 그 물건을 너희 가운데서 제하기 전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서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온전히 바친 물건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현재로선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다음 구절에서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11절입니다.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들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 두었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즉, 전쟁 중에 누가 온전히 바친 물건을 도둑질했고, 그것을 자기들의 물건들 가운데 두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제가 되는 물건은 이미 온전히 바쳐진 물건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을 누가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둑질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 물건이 자기들 물건 가운데 두었다는 점입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은 13절과 연관을 시켜야 합니다. “너는 일어나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물건이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의 물건과 섞여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오늘 이스라엘이 아이 성에서 패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물건을 누가 훔쳐다가 거룩하지 못한 곳에 섞어 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은 이 일을 큰 문제로 여기셨습니다. 심지어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거룩이란! 구별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셔서 죽게 하신 것은 사람을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지금까지 인도하신 것은 저들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하나님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늘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면 거룩한 삶일 것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인본주의가 아닌 신본주의의 삶을 기대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기억하시고 거룩한 삶을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4)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아이성의 실패는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 표명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오늘 저와 여러분은 모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도 이것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하나님의 거룩에 도전하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지파를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진 자를 찾기 위해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때 유다 지파 중에 아간이라는 사람이 뽑혔습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청하노니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숨기지 말라” 다시 말해서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물건을 찾는 일은 여호와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명예가 회복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때 아간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은 외 투 한 벌, 은 200세 겔, 금덩이 하나 탐나서 땅속에 감추었나이나”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사람을 보내어 감추어진 물건들을 찾아 여호와 앞에 두었고 아간과 그의 아들들과 딸들과 소와 양, 그리고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끌고 아골 골짜기에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 8:1, 개정)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결론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신본주의 삶을 권해드립니다. 그 일이 크든 작든 늘 하나님께 기도해 보고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그래서 행동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기를 권해드립니다.
이스라엘의 아이성 실패에 가장 큰 원인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 점령을 앞두고는 철저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성과의 전투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했던 흔적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아무런 흔적도 없었습니다. 정탐꾼의 이야기만 듣고 전쟁했습니다.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이는 인본주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성의 실패는 단순히 아간의 욕심 때문이 아닙니다. 아간 욕심 뒤에는 이미 사단이 있었고 아간은 사탄의 괴임에 넘어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거록한 것을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누구라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사단에 넘어가고 사단은 욕심을 줄 것이고 욕심은 죄를 짓게 할 것입니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적용
지금 지구상에 일어나는 그코 작은 전쟁의 원인은 사람들의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인본주의의 사실입니다. 자신의 명예, 권력의 유지, 결과를 내려는 것 모두가 욕심입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사람이 요구하는 왕정 정치를 허락하신 것은 그곳에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따라서 영혼을 사랑하고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힘쓰는 자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의 가는 길을 지켜 주시는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신 일은 우리를 세상 가운데서 구원하시려고 보내셨습니다. 세상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구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죽으신 목적은 우리의 구별입니다. 구별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목표입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아이 성에 실패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물건을 자기 것들과 섞은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원수들 앞에 능히 서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구별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구별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최고 관심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을 거룩하게 구별하면 승리하는 삶을 살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 편입니다. 거룩의 반대는 세상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편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편에 서는 자들과 함께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은 내일 위하여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거룩은 내일을 위한 저축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일이 행복하시기 원하십니까? 오늘 거룩한 편에서시기 바랍니다. 내일도 거록한 편에 서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늘 행복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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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gfgc]]></author>
			<pubDate>Tue, 28 Jul 2026 06:54:1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fgc.org/?kboard_redirect=2"><![CDATA[설교게시판 2015-09-25]]></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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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본 것을 말하지 말하지 말라 |  마태복음 17장 1~13절(9-13)]]></title>
			<link><![CDATA[https://gfgc.org/?kboard_content_redirect=173]]></link>
			<description><![CDATA[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마태복음 17장 1~13절(9-13)
2024.04.28.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2024.05.25. 장로회연합회 총회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사역중에 아들을 데리고 다니십니다. 교회 심방, 장례식, 결혼식, 제직회 공동회의에 여전도회 남전도회에 모임에 며칠 전에도 지방에 한 장례식 때문에 갔었는데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전에는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 복사님이 아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신학생이랍니다.

오늘 예수께서 세 명의 제자를 따로 데리고 산을 오르셨습니다. 그날 예수님과 함께 간 제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1절)입니다.
예수께서 오르신 산은 다볼산입니다. 다볼산의 높이는 약 570미터입니다. 관악산 연주봉 높이가 629미터이니까 그보다 조금 아래 정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 정도의 높이라면 그냥 간단한 동네 뒷산을 산책하는 것이 아닌 특별한 의도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어떤 의도가 있을까요? 시간도 꽤 걸릴 것 같은데, 그때 다른 제자들은 뭐 하고 있어야 하나요? 별로 좋은 그림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주님은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산행을 하시는 걸까요?

1절에 예수님의 의도가 보일만 한 구절이 있습니다. 1절입니다. (마 17:1, 개정)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엿새 전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엿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보았더니, 마태복음 16장인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이사랴 빌립보지역에서 사역하셨습니다. 그때 주께서 제자들에게 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러자 제자들이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에레미야, 더러는 선지자중에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말을 듣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의 말을 들으시고 아주 크게 반응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리고 덧붙이셨습니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극찬입니다. 그날 베드로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신앙고백을 주님께 했고, 그래서 그는 주님으로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난 잠시 후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16:21, 개정)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이 일을 비로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죽음에 대해서 오늘 처음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에 제자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반응을 보게 됩니다. (마 16:22, 개정)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아주 당황스러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16:23, 개정)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사탄이라니요.
조금 전에는 ‘복이 있다고 하셨고 이를(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탄이라니요. 내 뒤로 물러가라니요.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니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사라니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자라”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은 저를 무섭게 질책하셨습니다. 베드로 망신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지난 엿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엿새 후”라는 말은 ‘이 일이 있은 후’라는 말입니다. 즉, 6일 뒤에 주님께서 세 제자를 데리시고 산에 오르셨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이 산행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인가 어떻게 하려는 것이 틀림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그것은 예수님의 질문에 놀라울 정도로 신앙고백을 했다가 고난 이야기를 듣자 곧바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베드로가 안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사탄이 되고 사탄의 말을 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산행을 결심하셨을 것 같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시려는 걸까요?

여러분은 감이 오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지금 주님은 저런 제자를 앞에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저들을 좀 더 강하게 훈련을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계속 베드로를 주목하려고 합니다.베드로는 제자 중 늘 돋보이는 존재였습니다. 주님의 일에 늘 앞장섰습니다. 열심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그를 좋아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알려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놀라운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한순간에 사탄에게 흔들려 주님을 넘어 질만 한 말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다가 어떤 때 한순간은 사람의 일을 생각해서 주님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습니다. 
이때 베드로 자신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요? 또 얼마나 자신에게 실망했을까요? 주님 앞에 죄송스러움도 있었겠지만, 자신에 대한 실망과 미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께서 베드로를 산으로 데리고 오르셨습니다. 이유는 그를 혼내 주시려는 것이 아니고 그를 더 강하게 키우시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보다 못해서가 나이라 더 훈련 시켜서 하나님의 귀한 그릇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다른 제자보다 더 잘나서 신비한 무엇을 보여 주시려고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질문했고 부탁을 했다면, 그리고 함께 변화산에 오르자고 했다면, 어디를 좀 가자고 했다면, 노회에 일 좀 하자라고 하셨다면, 우리를 좀 더 다듬고 훈련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큰 뜻을 이루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주님의 선택을 받고 산에 올라간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2절에 (마 17:2-3, 개정)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산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의 모습은 변화되어 해같이 빛났으며, 주의 옷은 빛과 같이 희어 졌습니다. 그때 언제 오셨는지 성경에 거장 모세와 엘리야가 오셨고 예수님은 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고 계셨습니다. 참으로 신비하고 놀라운 장면입니다,

이는 먼 훗날 저 영원한 나라에서 있을 모습입니다.계 1:14절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리고 계 1:16을 보면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오늘 본문의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잠시 후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 지라”(5)는 소리가 들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궁금했던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용을 정리해 보니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듣고 순종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산행의 목적은 여기에 있었습니다.주님께서 저들에게 보여주신 변화산에 일은 훗날 살게 될 천국인데 그것은 십자가 후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산행의 목적은 십자가의 고난을 돌파해 나갈 길을 말씀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세 명의 제자들은 변화산 위에서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것을 보았고, 들을 수 없었던 것을 들었습니다. 믿음의 거장들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천국은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믿음은 굳건할 수 있었습니다.
왜 저들에게 굳건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까?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아버지게 가시면 그만이지만 제자들을 세상에 계속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십자가와 고난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 십자가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체험입니다. 하늘에 신비함을 미리 보고 듣는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이지요?
예수님의 기도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주님은 오늘 이 신비한 일들을 산 아래 있는 모든 제자들과 오늘 우리와도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산에 오르는 일이 힘듭니다.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래서 정리해 보았더니 하나님의 은혜는, 천국은 편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애쓰고 땀 흘리는 곳에 있습니다. 고난과 죽음 십자가 후에 있었습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는 이것을 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도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수고하는 동역자들에게 헌신하고 수고할 수 있는 기회를 먼저 주셨습니다. 잘 감당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이 특별한 은혜를 체험한 제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본문 4절을 이 보면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한 베드로가 주님께 한 가지를 제안합니다. “주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산 위에 일들에 너무 감격한 베드로는 그 변화산 위에 계속 머물러 있자고 한 것입니다. 
주님의 생각은 어떠하실까요?그런데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는 저의 말에 이렇다 저렇다 하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일어나셔서 내려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또 무안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마 17:9, 개정) “...너희는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산에서 있었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 그러시는 걸까요? 왜 본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걸까요? 제자들이 본 것이 어디 작은 것입니까? 이스라엘 역사에서 신과 같은 존재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정말 너무 황홀하고 두려고 떨리기도 하여 엎드려서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체험을 어디서 할 수 있습니까? 모든 제자가 다 본 것이 아니잖습니까? 얼마나 귀해요. 말하고 간증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것은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여기에 있었습니다.‘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산에서 본 것을 말하지 말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 있기 전에는 본 것을 말하지 말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본 것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저는 제자들의 연약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산 아래는 아 홉명의 제자들이 있는데 내려가서 ‘우리 모세를 봤다. 엘리야를 봤다.’라고 하면 어떤 분위기가 될까요? 시기 질투 그런 거 생기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떠들고 다니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에 도움이 될까요?
사실, 그동안 제자들은 주님은 함께 역하시면서 수없이 많은 이적과 표적을 보았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 바람과 바다가 잔잔하게 되고 병든자에게 말하면 일어나고 귀신을 명하며 쫓겨가고 축사하면 먹을 것이 한없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저들을 보실 때 제자들은 변하게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부활 이야기가 도움일 될까요? 한 마디로 저들은 아직 한없이 약하기만 합니다.
지금 주님의 사역 말년인데 저들은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한 없이 약하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영광과 기적 앞에서는 언제나 신나 하면서 십자가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안에 이런 성도들 계시지 않습니까?큰 은혜를 받았을 때, 그곳에 머물러 있고 싶어 하고 박수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어려움 앞에서는 불편해 하고 누구 탓하는 분들 계시지 않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맥을못 추시는 그런 분들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에게는 변화산에 은혜가 필요합니다. 변화산은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주님도 모든 제자를 다 데리시고 가시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헌신이 봉사가 변화산의 은혜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산이 좋지만 내려와야 하는 이유입니다. 
제자들이 변할 곳은 변화산이 아니라 십자가가 있는 곳, 즉 예수를 죽이려고 기다리는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거기에 저들을 변화시킬 성령이 임하십니다.
(행 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래서 제자들은 산에 초막을 짓고 그것에 살면 안 됩니다. 세상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저들이 변화되는 것은 저들이 산에서 보고 들은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섬리와 약속이 있는 현장에서 십자가를 체험해야 합니다. 십자에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이 새롭게 변합니다.

이 땅에 십자가 없이 죄문제를 해결한 성도 없고 예루살렘으로 강림하신 성령의 도움없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 성도는 없습니다.
전에 우리는 교회가 만들어 준 영광의 자리에서 성도들의 박수와 존경을 한눈에 받으면서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 감격은 너무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겠습니다.이제 그 변화산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거칠고 고단한 세상 한복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고, 가서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놀랍게도 성령님은 거칠고 고단한 세상 한복판에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우리와 만나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므로 전에 지금 우리가 본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내려가서 십자가 앞에 기다리는 성령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한 줄 믿습니다.
적용~교회의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모이는 기능, 흩어지는 기능입니다. 열심히 모여 신비한 은혜를 체험하고 나가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장로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장로님들의 모임과 삶의 현장에 성령의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gfgc]]></author>
			<pubDate>Fri, 24 Jul 2026 12:22:0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gfgc.org/?kboard_redirect=7"><![CDATA[무명게시판 2023-03-25]]></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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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은혜로 사는 사람들 |  창세기 6장 5 ~ 8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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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은혜로 사는 사람들
 창세기 6장 5 ~ 8절 
2024.04.21. 강북꽃동산교회 

5년전 우리노회 게시판에 슬픈 소식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경기도 평택에서 목회를 하시는 후배 목사님이신데,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참 마음이 아픈 기도제목 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중간 중간에 아이가 계속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난주 게시판에 다시 글이 올라왔습니다. 목사님들 기도 덕분에 완쾌판정을 받았다는 감사의 글입니다. 
며칠 전 지방에 장례식이 있어 다녀오는 중에 그 목사님과 동승 하게 되어 치료받는 과정을 다 듣게 되었는데 오진 때문에 고생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백혈병으로 알고 치료를 받고 달이 넘어가는 어느 날 의사 선생님께서 심각하게 보호자를 부르더니 심각하게 말씀하시더랍니다. 백혈병이 아니라 림프종 암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너무 죄종하구요. 빨리 항암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 목사님 심정이 어떠했냐고 물었더니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사가 하나님 이시냐 그럴 수 있지요”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그러는 과정에서 암은 뇌를 제외한 온몸에 퍼졌고 항암을 하는 과정에서 두번에나 실신했고 중환자실에 들어가기 전 아버지는 무거운 아이를 안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생명에 주인인 것을 알게 되었고 인생이 무엇을 한들 의미가 있겠느냐는 말을 했습니다. 
5년이 지난 지난달 완쾌판정을 받고 지금은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고 주의 일에 더욱 충성을 다한다고 했습니다. 전 그분에게 함께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 하루도 한 시간도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무엇입니까? 아무런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조건 없이 라는 것은 아무런 단서를 달지 않고 그냥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값없이 라는 것은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거저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공기와 햇볕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매일 그냥 마십니다. 조건 없이 그냥 공짜로 얻는 것이지만, 생명처럼 귀하고 값진 것들입니다. 없고 못 마시면 죽는 게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습니다. 조건 없이 그냥 주십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영혼에 생명처럼 귀하고 없으면 영혼이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 은혜로 살고 이 은혜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진정 은혜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만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나타나셔서 방주를 만들라고 하시면서 방주의 설계도를 상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길이는 300규빗(135M), 너비 50규빗(22.5M), 높이 삼십규빗(13.5M) 재료는 고르페 나무로 만들고, 3층으로 하고, 칸들을 막고, 역청을 칠하고, 창은 위에 하나 내고, 옆에 문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방주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이미 하셨습니다.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당에 가득함으로 그 끝날이 내게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창 6:5~6을 보면 매우 심각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에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가 살던 시대에 와서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다 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좋다고 하시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좋다고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인하여 한탄하시고 근심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절을 보면 큰결심하셨습니다.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을 다 없애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다 없애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땅에 역사상 전무후무한 홍수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홍수로 다 죽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점을 심각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노아 시대 이후 이 세상에는 죄악이 점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노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죄악이 가득하다는 사실과 사람들의 생각에는 온통 악한 것들로 가득하게 되었다는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죄악과 사람들 생각의 악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근심하신다는 사실과 그 근심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근심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기 마냥 좋으시고 기다리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관한 절대 권한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마치 농부가 당신이 운영하는 농장을 아름답게 가꾸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시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눅 13:7)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에 농장에 풀처럼 죄가 자라서 판을 치는 것을 간과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다면 세상에는 심판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다면 노아는 심판을 면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구절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가지는 노아가 만든 방주가 구원의 방주라고 할 때, 오늘의 교회가 구원의 방주로 비유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 세상을 심판하시고자 하실 때 노아를 지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실 때,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노아에게 오셨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다면 노아와 그의 가족을 위해서 방주를 지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지으라 하신 방주는 당시 모든 사람이 누구나 다 들어오게 설계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선 누구나 다 들어오는 방주라면 만들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은 다른 방법으로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의 심판은 노아의 방주를 중심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곳에 교회를 세우라고 하셨으면 세상에 심판이 있을 것이고 그 심판에서 먼저 우리와 우리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심판은 교회를 중심으로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아는 것이 복이고 그래서 준비한다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꽃동산교회는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우리와 우리 가족의 영혼 구원을 위해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구원의 방주를 허락하신 이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아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아는 어떤 사람이기에 땅이 모든 사람이 다 타락하고 하나님이 세상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실 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찾아오셨다는 말입니다. 

노아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맑히고 있습니다.
6:9을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했고 6:22을 보면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이상을 보면 노아는 분명 세상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세상의 죄인들과 구분되는 의인이었기 때문에, 세상에 불완전한 자와 달리 완전한 자였기 때문에 당연히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세상 그 누구와도 달리 하나님의 약속을 순종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만 노아를 평가한다면 노아에 대해서 큰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노아의 아름다운 행위를 좋아하셨고 노아의 아름다운 행위로 구원받았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빠짐없이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6절 8절을 그냥 지나가면 오늘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6장 8절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7:23입니다.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유일하게 노아와 그 가족들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노아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굼궁한 일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받은 은혜를 찾아보았더니 9절입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라고 했는데 이 부분은 계속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탄하실 만큼 세상이 타락했는데 어떻게 그만 의인이고 완전 한자가 될 수 있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위에서도 한번 오해를 했었는데 또 만났습니다. 의인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말에 또 신경이 쓰입니다. 
세상에 하나님 외에 완전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노아를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리해 보았더니 그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노아가 남달리 의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가 120년동안 배를 짖는 일에 가족이 협력한 것 그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노아가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 지는 것은 노아는 어떻게 이런 은혜를 입었느냐는 것입니다. 다음 구절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다시 말해서 노아가 의인으로 살 수 있게 되고 120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산 위에서 배를 지으면서 변함이 없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니 의인이 될 수 있고 믿음의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세상에서 의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침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은혜로 허락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로 허락하셨습니다.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에 들어가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노아에게 그 무엇보다 큰 은혜가 저 방주였던 것처럼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 큰 은혜는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엡 2:8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습니다. 은혜 중의 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것이 다 은혜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은혜, 최고의 은혜, 반드시 있어야 할 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감격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찬송이 이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모세는 홍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6:8에서 본격적으로 노아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노아를 소개하면서 처음 운을 뗀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노아가 은혜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심판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히 9:2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노아 시대의 홍수 대신 이제 하나님께서 심판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홍수와 같은 형태의 벌은 없을 것이고 대신 죽은 이후에 심판이 준비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 시대에 홍수가 준비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다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 홍수를 대비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7:23입니다.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유일하게 노아와 그 가족들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출 2장을 보면 모세가 태어날 때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왕이 이스라엘 아기가 태어나면 남자 아이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석 달 동안 모세를 죽이지 않고 숨겼습니다. 더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담아 강에 띠워 보냈습니다. 
바로 그 때 하필 바로의 딸 그러니까 공주가 목욕하러 그곳에 나왔습니다. 공주의 눈에 발견되어 공주가 양자로 삼아 키우게 됩니다. 그런데 또 하필 요게벳이 모세의 유모로 채택이 됩니다. 모세를 품에 안아 키우게 됩니다. 이렇게 모세가 태어나 자라나는 동안 이 ‘하필’의 기적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태어나 자라는 동안 이런 하필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하필의 기적,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후 12장을 보면 바울은 남다른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남들에게 없는 육체적인 질병이 있었습니다. 복음 전하는 데 큰 장애였습니다. 마치 가시가 박혀있는 것처럼 자기를 괴롭혔습니다. 이것 좀 고쳐달라고 간절하게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냉정하십니다. 응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가시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질병도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선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질병 때문에 늘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늘 하나님 의지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주신 남다른 은사들 하나하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준비하시고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질병까지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준비하시고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이 모두가 은혜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돌아보면 그 어느 하나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하게 됩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여기 이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장차 하나님 부르시는 날까지 이 땅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적용~
그렇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내가 믿음이 커서 봉사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능력이 많아서 봉사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결심이 굳건해서 봉사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구원 받고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믿음을 지키지 못합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서는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일찍이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서 단적으로 답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삽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살게 하고, 나를 구원하고, 나를 헌신케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새벽 3시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하는 사람들이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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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4 Jul 2026 11:46:22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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