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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 | 왕상 18:30-36

작성자
gfgc
작성일
2025-09-18 22:16
조회
150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

왕상 18:30-36

2025.09.14.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에는 제사 예배의 식이 있죠. 종교에서 제사는 최고의 신에게 드리는 최고의 정성 행위입니다. 그래서 종교에서 제사는 기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사나 예배의 기본 성격은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보러 간다. 보고 온다는 말은 틀린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관련해 헛갈려 하는 것은 제사 예배 대상이다. 세상에 모든 종교가 자기가 믿는 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죽으면 간 곳이 모두 천국간다고 합니다.

요즘 매일 뉴스에 나오는 통일교는 이름이 통일교회입니다. 저들의 믿음의 대상도 하나님입니다. 지도자의 명칭도 목사다. 예배의 형식도 교회와 비슷하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은 통일교회나 우리 개신교회를 같이 본다. 통일교 목사도 개신교 목사도 같은 목사로 본다.

오늘 분문에도 나오겠지만 구약시대에 영적 지도자를 선지가, 예언자, 제사장이라고 하는데, 이단도 똑같이 부른다. 그들이 믿는 대상자도 모두 하나님이이라고 한다. 그러니 백성들이 하나님네 대해서 얼마나 혼돈이 되겠는가? 저도 어렸을 때 달이 하나님인 줄 알았다.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은 복이다.

사회학에서는 인간을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와 달리 신을 찾는 마음이 있습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에게는 어느 시대나, 문화에도 종교가 있었고, 제사 또는 예배가 있어 왔습니다. 시대 시대마다 사람들은 신당에나 성전을 지어놓고 초월적인 존재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의 장소도 다양했습니다. 대자연 앞에서 제사를 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가정에서 제사를 드리기도 합니다. 그 형식도 다양하고 또 제사 때 바치는 제물도 다양합니다. 심마니들이 산삼을 캐러 산에 들어가며 제사를 드립니다. 등산가들이 고산에 오르며 나름대로 제사를 드립니다.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나가며 나름대로 제사를 드립니다. 새해를 맞으며 떠오르는 첫 태양을 바라보며 소원을 빕니다. 정월 대보름 휘영청 둥근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빕니다. 이런 현상들은 한결같은 공통점은 인간 저 깊은 곳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갈망이 있습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의 대상은 시대마다 문화마다 사람들의 생각마다 다 달랐습니다. 역사를 통해 보면 대개 제사의 대상은 인간보다 힘이 쎈 모든것들이 신이었다. 돌, 나무 짐승, 바다, 해달별, 심지어 돈많고 말 잘하고 쇼 잘하고 잘 속이는 사람을 신이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합니다.

오늘 갈멜산에 커다란 제단 두 개가 준비되었습니다. 제단 옆에는 어린 송아지가 두 마리가 제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깊은 산골짝기에 사람들이 구름 떼와 같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선지자들도 세마포 옷을 입고 대거 올라와 있습니다. 도대체 구약시대에 산속에서 이 거창한 제사는 무엇인가? 이 많은 사람들은 누구이며 왜 모였는가? 무슨 절기인가? 유월절, 칠칠절, 무교절…

오산리 금식기도원, 안양 갈멜산 기도원이 생각난다. 예전에 기도원이라고 이름하진 않았지만, 산에서 제사를 드린다면 오늘 기도원과 갖지 않은가?

그런데 좀 이상하다. 선지자들이 많이 왔는데 주로 한쪽 제단에만 관심을 둔다. 다른 한 쪽제단에는 사람이 없다. 한사람이 보이는데 몸에 털이 많은 사람이다.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있고 눈매가 부리부리하며 좀 강해 보인다. 하지만 혼자서 있습니다.

좀 이상한 것은 칼을 찬 사람들도 보인다. 왠지 분위기가 안 좋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오늘 본문 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상 18:20, 개정)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으니라”라고 했다. 아합의 명령이다.

아합왕이 이스라엘 모든 선지자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선지자들을 이 산으로 모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왕은 왜 선지자들을 이 산으로 모이라고 했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산 위에 제단이 있고 선지자들을 산으로 모이라고 했으면 제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제사를 위해서 모이라고 했습니다. 왕의 명령인 것을 보아 특별한 제사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특별한 제사입니다.

아합왕 당시 이스라엘에 3년이 넘도록 비 한 방울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3년하고도 반년이 되어가는 시점입니다. 온 나라에 가움에 먼지 바다가 되었습니다. 생물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죽음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제사가 당연히 기후제 같은 제사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꼭 기후제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제사가 무슨 제사인지 내용을 좀 더 관찰하려고 합니다.
두 개의 제단 중에 혼자 서 있던 사람이 말을 했습니다. 그의 말은 21절입니다. (왕상 18:21, 개정)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말하는 사람은 엘리야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두 개의 제단에 왜 엘리야 혼자 서 있습니까? 20절에 아합왕이 사람을 보내어 이스라엘 선지자를 갈멜산으로 모으라 했는데, 어찌 엘리야 혼자 서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엘리야의 말을 조금 더 관찰해 보려고 한다.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 머뭇머뭇하려느냐”라고 했다. 해석하겠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아마도 선지자도 많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저들은 지금 왜 머뭇머뭇하고 있는 것인가? 왕이 무서워서 그러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말입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다를지리”라고 했다. 그런데 백성중에서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리해 보면 갈멜산의 제사는 기후제사가 아니었다. 그 제사는 누가 믿는 신이 참 하나님인지 판견나는 제사였다. 백성들은 그날 그것에서 참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지만, 세상에 하나님이 참 많다. 통일교도 하나님, 천주교도 하나님 이슬람도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참 헛갈려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헛갈리는 것은 여호와도 하나님 이고, 바알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오늘 백성들에게 참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갓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사는 왕이 소집을 했지만, 엘리야가 소집 제안을 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 똑같은 두 개의 제단을 쌓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는 바알 하나님을 위하여 쌓고 불은 집히지 말고, 제사를 드릴 때 하늘에서 제단에 불이 내려오는 곳에 있는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신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훈 받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고 본다. 즉, 성도와 교회가 세상에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세상에 참 하나님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신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이 참하나님 이라고 합니다. 통일교도 천주교도 신천지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세상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절에나 어디를 다니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믿음의 대상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여호와가 참 하나님 이심을 보여 주어여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좀 더 괄한 것은 갈멜산 모인 종교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증거했는지 배우려고 합니다.

갈멜산에는 두 개의 제단에 준비되었습니다. 세사로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먼저 바알을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제자를 드립니다.
저들이 송아지를 끌어다가 목에서 피를 내고, 각을 떠서 제단에 올려 왔다. 그리고 그들의 제사 순서대로 기도를 하고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한다. 그때 어떤 이는 서서 두 손을 들로 찬양을 부른다. 그러자 발알의 선지가 450명이 함께 일어선다. 저들이 함께 뒤며 찬양하자 아세라를 섬기는 자들 400명 함께 뒤어 들어 춤을 춘다. 여기저기서 감동하여 울며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제사를 드린다고 할 수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감동적인 것은 28절에 있습니다. (왕상 18:28, 개정)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라고 했다. 그야말로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정말 놀라운 정성의 제사이다. 누가 봐도 감동적이다. 하나님이 그런 제사를 받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당황스런 것은 이런 정성의 제사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갈멜산의 제사를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엘리야의 제사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기도 불이 내려오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요? 우선 사람이 없다. 반주고 춤추는 사람도 피를 내는 사람도 없다. 선지자나 백성들이 그 가멜산에 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여하지 않는다. 엘리야가 말하기를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믿으라고 할 때 아무말도 안하고 있습니다. 걱정이 됩니다.

엘리야가 제사를 드릴 차례입니다.
엘리야가 혼자 제사를 드립니다. 초라해도 이렇게 초라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엘리야가 이상한 일을 한다. 나무를 말려야 불이 잘 탈턴데, 제단에 물을 부르라고 합니다. 그것도 세번이나 말이죠? 바알의 선지자들이 비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립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하늘을 향하여 뭐라고 뭐라고 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습니다. 성경을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왕상 18:38, 개정)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라고 말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 궁금한 것은 엘리야가 어떻게 제사를 드렸기에 무슨 말을 했기에 하나님께서 저의 제사를 받으셨냐는 것입니다. 저에게 불을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엘리야가 제사를 드리기 전 한 일을 찾아 묵상하고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1) 무너진 제단을 수축했습니다.
(왕상 18:30, 개정)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엘리야가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제단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과정에서 춤을 추고 뛰놀고 하는 과정에서 엘리야가 제사를 드려야 하는 단을 무너트렸다. 그래서 엘리야는 그 무너진 단을 수축하려고 백성들을 나오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에게 열 두개의 돌을 취하여 그 위에 단을 쌓도록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습니다. 아합왕이 명령에 단이 잘 쌓여졌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제단에 아니었다. 결정적인 것은 그 단이 훼손되었다. 엘리야는 그 단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상징하는 열 두돌을 기초로 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을 이런 제사를받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그런 예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 예배는 그런 예배가 되는 것으로 믿습니다. 예배 전 성전을 청소하고 준비합니다. 지난주에도 했는데 또 했습니다. 예배전 성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준비기도, 준비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송, 권사님들 일찍오셔 성경찬송 찾아 놓으신다. 토요일에 봉투 가지고 가셔서 헌금 준비하시는 것, 다리미로 다려서 주일에 헌금합니다.

여기에 놀라운 진리는 하나님은 그런 자들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기가 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백성들의 예배가 받아지도록 말입니다. 그러므로 갈멜산에 불의 응답은 엘리야 혼자의 응답이 아닙니다. 백성들의 제자를 받으셨습니다. 확신하기는 그날 열두 돌을 취하고 제단을 수축하는 일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셨다고 믿습니다. 저들에게 참 하나니이 누구신지 믿는 믿음을 주셨을 것입니다.

2) 물을 부으라는 것입니다,
(왕상 18:33, 개정)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라고 했습니다. 물을 부으라는 말, 정말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혹 기름을 부르라면 이해가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제사는 불을 기다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물을 얼마나 많이 부었으면 35절에 제단으로 두로 흐리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했겠습니까?

제단에 왠 물입니까? 그리고 백성들이 물동을 들고 뭇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물은 세례를 의미하기도 하고 진정한 회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엘리야는 제사를 드리기 전 백성들과 함께 제단에 물을 부으면서 그동안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한 일을 회개했습니다.

조금 전 엘리야가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 나오라고 했지만, 아무도 안 나왔지만 이제 나와서 제단에 물을 붓는 것은 회개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와 백성들의 일을 어떻게 보실까요?
간단하지 않습니까? 물을 부어도, 물이 아니라 강이라도 하나님의 불은 그를 태운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엘리야의 믿음은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 이실뿐 아니라 그의 불이 내려오며 물을 태우고도 남음을 믿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혼돈에 빠져 있던 백성들이 여호와를 참 하남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가 있는 성도들에게 있는 은혜입니다.

3) 그의 간구에 있었습니다.
(왕상 18:37, 개정)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라고 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이 백성이 주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과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엘리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구약시대에 최고의 능력의 종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릴뿐아니라 자연을 다스리는 종입니다. 이스라엘에 3년 육개월 비가 안 오는 것은 그의 말 때문입니다.
(왕상 17:1)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못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기도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말, 실력. 구제. 봉사로도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마음을 돌려주세요.

엘리야의 이런 믿음이 행위와 용기와 기도는 어떤 결과를 가져 왔습니까?

(왕상 18:39, 개정)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엘리야의 제사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 심을 세상에 보여주었습니다.

적용~
최근 예배에 대해 우리에게 강한 도전을 주는 책 두 권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A.W. 토저가 지은 [예배인가 쇼인가]라는 책입니다.
이 책 내의 소제목들 가운데 눈에 띠는 것이 있습니다. “종교적 쇼를 중단하라”, “예배는 연예오락이 아니다” 한 마디로 오늘의 예배가 점점 볼거리, 들을 거리, 즐길 거리로 채워지고 있고 그래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문희곤이 지은 [예배는 콘서트가 아닙니다]라는 책입니다.
예수전도단 한국대표인 저자는 소위 “열린예배”의 문제를 신랄하게 파헤치며, 젊은이들의 예배 행태를 비판합니다. 스타화 되어가는 설교자들과 실력 있는 세션으로 포진된 찬양 인도자들의 화려하고 차별된 설교와 연주를 찾아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배가 점점 콘서트화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배가 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예배의 위기는 단지 예배를 보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자가 아니라 예배 구경꾼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드려야 합니다.
드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배 안에서 우리가 마음을 찢으며 회개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뜨거운 간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결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성껏 준비해 온 헌금을 드리고 감사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배자입니다. 예배에 모두 참여해야 합니다. 헌신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봉사로 참여해야 합니다. 기도로 참여해야 합니다. 전도로 참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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