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성령님을 만났을 때
마 4:1-11(1-6)
2025.02.23. 강북꽃동산교회, 78회 새한서 봄 정기노회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를 잃은 일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 행사에 참여하려고 예루살렘에 왔다가 집으로 가는 중에 예수를 잃어버렸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나이는 12살이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18년 후에 일입니다. 정확히는 예수님 나이 서른 살 때, 예수님의 모습이 수일째 보이질 않았습니다. 수일이 뭡니까? 한 달이 넘게 예수님의 근황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화도 핸드폰도 없는 시대에 제일 답답한 사람은 예수님의 부모일 것인데 성경에서 그 부모가 예수님을 찾았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어디에 가 계시는 것입니까?
오늘 성경은 조금 당황스럽게 합니다. 1절에 보니까 예수께서는 광야에 계셨습니다. 저녁이면 맹수의 소리가 나고 낯이면 덥고 밤이면 추운 곳,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하나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그런 곳입니다. 마실 물 먹을 음식도 없는 곳입니다. 다행히 해를 피할 그늘은 있었지만, 밤에 추위를 피할 마땅한 어떤 공간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맹수로부터 위험이 있는 곳입니다. 주님 왜 이곳에 계시는 것입니까?
주께서 이곳에 계신지가 꽤 오래됐습니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막 1:13, 개역)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셨고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이나 저나 주님은 왜 여기에 와 계시는 것입니까?
무슨 특별히 기도할 일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큰 능력을 받으시려는 것입니까?
성경은 그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지금 광야에 와 계신 것은 성령에 끌려 가셨다는 것입니다. 특별하지만,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 방언을 하시는 분들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사람의 혀나 입술을 주장하면 사람의 의지와 관계없는 말을 하게 되는 방언입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이나 발을 움직이게 하면 광야아니라, 어디는 못 가겠습니까? 선교지에 가는 것, 장기 금식하신 분들 다 성령이 인도로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성령께서는 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잘 못 본 것은 아니겠지요? 제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에 (마 4:1,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신 것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서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무조건 믿으면 되는 것입니까?
더 당황스런 마귀가 예수를 시험한다는 것이지요?
마귀가 예수님은 시험하다니,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어떻게 시험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십니까? 성자 하나님 아니십니까? 그런데 시험을 한다니요. 이런 성경 구절은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약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예수님 앞이 나타났습니다.
마귀가 미친것 아닙니까?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나타나냐 말입니다. 그가 진실로 예수가 하나님이 아들인 것을 모르는 것입니까? 아니면 실수로 잘못 온 것입니까? 실수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예수께서 40일 금식기도 한 것을 모르는 것입니까? 마귀는 40일 금식기도하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나 봅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했다는 어떤 분들 보니까 대단합니다. 사람들을 한줄로 세워놓고 쉬쉬하면 그 사람들이 펑펑 나가떨어집니다.
오늘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왔다면 큰 실수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가 정말 예수를 시험하는지 보려고 합니다. 3절입니다. (마 4:3, 개역)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와서 돌로 떡을 만들라고 시험했습니다. 저가 예수께서 40일 금식하여 주리신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마귀라면 이 정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다음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마 4:5, 개역)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라고 했고, 8절에 (마 4:8, 개역)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데리고 다니면서 시험을 한다. 다 말로는 예수께서 마귀에게 끌려 다니신다.’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난해 구절입니까? 주님 나라에 가서 주님께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마귀가 어떻게 예수님을 끌고 다니면서 시험했는지, 주님께서 왜 마귀에게 끌려다니시면서 시험을 받으셨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답은 간단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마귀가 볼 때, 예수님은 시험을 해도 되는 존재로 보였을 것입니다.
마귀의 생각은 잘 모르겠지만,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충격이 되는 것은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시험할 만한 존재로 보았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일은 작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음 성경 말씀입니다. 히 4:15-16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와 상정이 같으신 분이기에 마귀의 시험에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인간에 연약함에 동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예수의 인성만을 보고 시험하려고 덤벼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중요한 일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와 상정이 같으신 분이시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이 인간이시기에 우리의 죄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증명해 주실 뿐아니라 시험받으실 자리까지 낮추신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시험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체휼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귀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마 4: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주께서는 여유 있으시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마귀가 물러서지를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데리고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다시 시험을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예수께서 마귀에게 끌려다녔다는 일은 주께서 우리 인생들의 고통과 시험을 체휼한다 것으로 답을 얻은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입니다. 6절입니다. (마 4:6, 개역)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같지 않습니까? 마귀가 한 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인용한 말씀은 시편 9:11-12절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마귀도 예수님처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은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성경을 인용할 줄 알고 말씀으로 예수를 시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물러서지 않고 예수를 다시 끌로 높은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무엇은 느끼십니까? 마귀가 예수님을 끌고 다닐 뿐만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한다는 사실에서 말입니다.
마귀는 성경도 잘 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된 말씀은 (행 19: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마술사를 덮쳤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읽어야 하며 알아야 마귀를 이길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기도를 하면 얼마난 많이 해야 마귀를 물리칠 수 있을까요?
실제로 교회는 마귀를 이기려면 성경을 많이 잃어야 하고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말씀의 주,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의 주에게 말씀을 인용하면서 시험을 하고 있으니, 또한 온전히 40일을 금식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시험했으니 어떻게 결론을 얻으면 좋을까요?
참고로 바리새인은 서기관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박사들입니다. 저들이 마귀를 이기는 자입니까? 어떤 바리새인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시간 시간 선전 올라사거 기도하는데 그들이 마귀를 이기른 것입닊라”(눅 18:12)
결론적으로 예수는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번이나 마귀의 시험을 당하신 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물러가게 했습니다.
(마 4:10, 개역)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그러자 마귀가 떠나고 천사들이 나오서 예수를 수종들었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결국은 예수를 더 이상 시험하지 못하고 예수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마귀를 대적하신 것은 별다른 것이 없어 보입니다. 기록되었으되~ 새로운 것이 있다면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라는 부분이 다릅니다.
그런데 마귀는 무엇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에서 물러갔을까요>
바리새인도 그렇게 하면 사단이 물러갈까요?
정리해 보면 주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쳤던 것으로 정리되었습니다. 그것은 진리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설교자는 성도에게 이 세상에서 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라고 늘 가르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영물입니다.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안다하여도 마귀만큼 알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마귀를 물러가라고 말하고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는데, 중요한 것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말씀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바로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예수님 위에 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때부터 예수님께서 성령과 함께하시게 되셨고 성령에 이끄심을 받으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겪으신 첫 번째 일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신 것이 성령 받기 이전이 아니라 후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공사역을 하시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감당하시기 힘드실 것을 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먼저 성령을 보내셔서 함께 하시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시험을 가볍게 이기실 수가 있게 말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께서 예수님을 이끌고 시험의 자리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시험을 하긴 했지만, 성령이 이 시험을 주도하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가 시험을 할 때, 성령의 감동으로 넉넉히 이기셨습니다.
우리가 마귀에게 시험을 당할 때 쩔쩔매는 것은 나 혼자서 마귀의 시험에 맞서기 때문입니다. 또 마귀가 시험을 하는데 마귀의 시험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라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마귀를 대적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일고 안다고 마귀를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율법)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은 바리새인 서기관들 일것입니다. 이들이 마귀를 대적하고 쫓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먼저 성령에 이끌려야 한다는 것이고 진리가 성령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중요한 말씀은 그런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 성령님은 마귀가 득실거리는 광야로 예수님을 이끄시고 나가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성경에서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진리가 성령을 만났다는 것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진리가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마귀가 시험 할 때 그것이 마귀의 시험인지 알기가 어렵고, 또 안다고 해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 능력이 없습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께서 능력이 있고 마귀가 어리석은 것은 예수께서는 성령에 이끌리어 왔다는 사실이고 마귀는 그것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적용~
지금은 진리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진리가 혼탁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판단으로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수 없이 많은 성경, 설교, 간증, 논리, 예배 찬양, 이적 표적이 넘쳐 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한데, 한편으로는 헛갈리고 혼동이 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눅 7: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럴 때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답은 진리가 성령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처럼 성령과 함께 해야합니다. 특히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말씀이 성령을 만나야 마귀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총알과 같고 성령은 총과 같습니다. 한 주간도 진리의 말씀이 성령을 만나 강한 힘을 발휘하서서 능력있는 한주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