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것을 말하지 말하지 말라 | 마태복음 17장 1~13절(9-13)
작성일
2026-07-24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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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마태복음 17장 1~13절(9-13)
2024.04.28.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2024.05.25. 장로회연합회 총회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사역중에 아들을 데리고 다니십니다. 교회 심방, 장례식, 결혼식, 제직회 공동회의에 여전도회 남전도회에 모임에 며칠 전에도 지방에 한 장례식 때문에 갔었는데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전에는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 복사님이 아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신학생이랍니다.
오늘 예수께서 세 명의 제자를 따로 데리고 산을 오르셨습니다. 그날 예수님과 함께 간 제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1절)입니다.
예수께서 오르신 산은 다볼산입니다. 다볼산의 높이는 약 570미터입니다. 관악산 연주봉 높이가 629미터이니까 그보다 조금 아래 정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 정도의 높이라면 그냥 간단한 동네 뒷산을 산책하는 것이 아닌 특별한 의도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어떤 의도가 있을까요? 시간도 꽤 걸릴 것 같은데, 그때 다른 제자들은 뭐 하고 있어야 하나요? 별로 좋은 그림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주님은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산행을 하시는 걸까요?
1절에 예수님의 의도가 보일만 한 구절이 있습니다. 1절입니다. (마 17:1, 개정)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엿새 전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엿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보았더니, 마태복음 16장인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이사랴 빌립보지역에서 사역하셨습니다. 그때 주께서 제자들에게 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러자 제자들이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에레미야, 더러는 선지자중에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말을 듣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의 말을 들으시고 아주 크게 반응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리고 덧붙이셨습니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극찬입니다. 그날 베드로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신앙고백을 주님께 했고, 그래서 그는 주님으로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난 잠시 후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16:21, 개정)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이 일을 비로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죽음에 대해서 오늘 처음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에 제자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반응을 보게 됩니다. (마 16:22, 개정)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아주 당황스러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16:23, 개정)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사탄이라니요.
조금 전에는 ‘복이 있다고 하셨고 이를(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탄이라니요. 내 뒤로 물러가라니요.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니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사라니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자라”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은 저를 무섭게 질책하셨습니다. 베드로 망신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지난 엿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엿새 후”라는 말은 ‘이 일이 있은 후’라는 말입니다. 즉, 6일 뒤에 주님께서 세 제자를 데리시고 산에 오르셨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이 산행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인가 어떻게 하려는 것이 틀림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그것은 예수님의 질문에 놀라울 정도로 신앙고백을 했다가 고난 이야기를 듣자 곧바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베드로가 안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사탄이 되고 사탄의 말을 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산행을 결심하셨을 것 같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시려는 걸까요?
여러분은 감이 오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지금 주님은 저런 제자를 앞에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저들을 좀 더 강하게 훈련을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계속 베드로를 주목하려고 합니다.베드로는 제자 중 늘 돋보이는 존재였습니다. 주님의 일에 늘 앞장섰습니다. 열심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그를 좋아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알려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놀라운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한순간에 사탄에게 흔들려 주님을 넘어 질만 한 말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다가 어떤 때 한순간은 사람의 일을 생각해서 주님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습니다.
이때 베드로 자신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요? 또 얼마나 자신에게 실망했을까요? 주님 앞에 죄송스러움도 있었겠지만, 자신에 대한 실망과 미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께서 베드로를 산으로 데리고 오르셨습니다. 이유는 그를 혼내 주시려는 것이 아니고 그를 더 강하게 키우시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보다 못해서가 나이라 더 훈련 시켜서 하나님의 귀한 그릇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다른 제자보다 더 잘나서 신비한 무엇을 보여 주시려고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질문했고 부탁을 했다면, 그리고 함께 변화산에 오르자고 했다면, 어디를 좀 가자고 했다면, 노회에 일 좀 하자라고 하셨다면, 우리를 좀 더 다듬고 훈련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큰 뜻을 이루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주님의 선택을 받고 산에 올라간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2절에 (마 17:2-3, 개정)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산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의 모습은 변화되어 해같이 빛났으며, 주의 옷은 빛과 같이 희어 졌습니다. 그때 언제 오셨는지 성경에 거장 모세와 엘리야가 오셨고 예수님은 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고 계셨습니다. 참으로 신비하고 놀라운 장면입니다,
이는 먼 훗날 저 영원한 나라에서 있을 모습입니다.계 1:14절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리고 계 1:16을 보면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오늘 본문의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잠시 후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 지라”(5)는 소리가 들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궁금했던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용을 정리해 보니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듣고 순종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산행의 목적은 여기에 있었습니다.주님께서 저들에게 보여주신 변화산에 일은 훗날 살게 될 천국인데 그것은 십자가 후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산행의 목적은 십자가의 고난을 돌파해 나갈 길을 말씀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세 명의 제자들은 변화산 위에서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것을 보았고, 들을 수 없었던 것을 들었습니다. 믿음의 거장들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천국은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믿음은 굳건할 수 있었습니다.
왜 저들에게 굳건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까?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아버지게 가시면 그만이지만 제자들을 세상에 계속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십자가와 고난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 십자가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체험입니다. 하늘에 신비함을 미리 보고 듣는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이지요?
예수님의 기도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주님은 오늘 이 신비한 일들을 산 아래 있는 모든 제자들과 오늘 우리와도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산에 오르는 일이 힘듭니다.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래서 정리해 보았더니 하나님의 은혜는, 천국은 편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애쓰고 땀 흘리는 곳에 있습니다. 고난과 죽음 십자가 후에 있었습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는 이것을 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도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수고하는 동역자들에게 헌신하고 수고할 수 있는 기회를 먼저 주셨습니다. 잘 감당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이 특별한 은혜를 체험한 제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본문 4절을 이 보면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한 베드로가 주님께 한 가지를 제안합니다. “주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산 위에 일들에 너무 감격한 베드로는 그 변화산 위에 계속 머물러 있자고 한 것입니다.
주님의 생각은 어떠하실까요?그런데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는 저의 말에 이렇다 저렇다 하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일어나셔서 내려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또 무안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마 17:9, 개정) “...너희는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산에서 있었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 그러시는 걸까요? 왜 본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걸까요? 제자들이 본 것이 어디 작은 것입니까? 이스라엘 역사에서 신과 같은 존재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정말 너무 황홀하고 두려고 떨리기도 하여 엎드려서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체험을 어디서 할 수 있습니까? 모든 제자가 다 본 것이 아니잖습니까? 얼마나 귀해요. 말하고 간증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것은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여기에 있었습니다.‘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산에서 본 것을 말하지 말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 있기 전에는 본 것을 말하지 말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본 것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저는 제자들의 연약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산 아래는 아 홉명의 제자들이 있는데 내려가서 ‘우리 모세를 봤다. 엘리야를 봤다.’라고 하면 어떤 분위기가 될까요? 시기 질투 그런 거 생기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떠들고 다니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에 도움이 될까요?
사실, 그동안 제자들은 주님은 함께 역하시면서 수없이 많은 이적과 표적을 보았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 바람과 바다가 잔잔하게 되고 병든자에게 말하면 일어나고 귀신을 명하며 쫓겨가고 축사하면 먹을 것이 한없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저들을 보실 때 제자들은 변하게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부활 이야기가 도움일 될까요? 한 마디로 저들은 아직 한없이 약하기만 합니다.
지금 주님의 사역 말년인데 저들은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한 없이 약하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영광과 기적 앞에서는 언제나 신나 하면서 십자가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안에 이런 성도들 계시지 않습니까?큰 은혜를 받았을 때, 그곳에 머물러 있고 싶어 하고 박수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어려움 앞에서는 불편해 하고 누구 탓하는 분들 계시지 않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맥을못 추시는 그런 분들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에게는 변화산에 은혜가 필요합니다. 변화산은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주님도 모든 제자를 다 데리시고 가시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헌신이 봉사가 변화산의 은혜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산이 좋지만 내려와야 하는 이유입니다.
제자들이 변할 곳은 변화산이 아니라 십자가가 있는 곳, 즉 예수를 죽이려고 기다리는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거기에 저들을 변화시킬 성령이 임하십니다.
(행 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래서 제자들은 산에 초막을 짓고 그것에 살면 안 됩니다. 세상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저들이 변화되는 것은 저들이 산에서 보고 들은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섬리와 약속이 있는 현장에서 십자가를 체험해야 합니다. 십자에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이 새롭게 변합니다.
이 땅에 십자가 없이 죄문제를 해결한 성도 없고 예루살렘으로 강림하신 성령의 도움없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 성도는 없습니다.
전에 우리는 교회가 만들어 준 영광의 자리에서 성도들의 박수와 존경을 한눈에 받으면서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 감격은 너무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겠습니다.이제 그 변화산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거칠고 고단한 세상 한복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고, 가서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놀랍게도 성령님은 거칠고 고단한 세상 한복판에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우리와 만나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므로 전에 지금 우리가 본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내려가서 십자가 앞에 기다리는 성령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한 줄 믿습니다.
적용~교회의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모이는 기능, 흩어지는 기능입니다. 열심히 모여 신비한 은혜를 체험하고 나가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장로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장로님들의 모임과 삶의 현장에 성령의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태복음 17장 1~13절(9-13)
2024.04.28.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2024.05.25. 장로회연합회 총회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사역중에 아들을 데리고 다니십니다. 교회 심방, 장례식, 결혼식, 제직회 공동회의에 여전도회 남전도회에 모임에 며칠 전에도 지방에 한 장례식 때문에 갔었는데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전에는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 복사님이 아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신학생이랍니다.
오늘 예수께서 세 명의 제자를 따로 데리고 산을 오르셨습니다. 그날 예수님과 함께 간 제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1절)입니다.
예수께서 오르신 산은 다볼산입니다. 다볼산의 높이는 약 570미터입니다. 관악산 연주봉 높이가 629미터이니까 그보다 조금 아래 정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 정도의 높이라면 그냥 간단한 동네 뒷산을 산책하는 것이 아닌 특별한 의도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어떤 의도가 있을까요? 시간도 꽤 걸릴 것 같은데, 그때 다른 제자들은 뭐 하고 있어야 하나요? 별로 좋은 그림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주님은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산행을 하시는 걸까요?
1절에 예수님의 의도가 보일만 한 구절이 있습니다. 1절입니다. (마 17:1, 개정)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엿새 전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엿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보았더니, 마태복음 16장인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이사랴 빌립보지역에서 사역하셨습니다. 그때 주께서 제자들에게 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러자 제자들이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에레미야, 더러는 선지자중에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말을 듣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의 말을 들으시고 아주 크게 반응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리고 덧붙이셨습니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극찬입니다. 그날 베드로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신앙고백을 주님께 했고, 그래서 그는 주님으로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난 잠시 후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16:21, 개정)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이 일을 비로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죽음에 대해서 오늘 처음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에 제자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반응을 보게 됩니다. (마 16:22, 개정)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아주 당황스러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16:23, 개정)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사탄이라니요.
조금 전에는 ‘복이 있다고 하셨고 이를(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탄이라니요. 내 뒤로 물러가라니요.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니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사라니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자라”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은 저를 무섭게 질책하셨습니다. 베드로 망신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지난 엿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엿새 후”라는 말은 ‘이 일이 있은 후’라는 말입니다. 즉, 6일 뒤에 주님께서 세 제자를 데리시고 산에 오르셨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이 산행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인가 어떻게 하려는 것이 틀림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그것은 예수님의 질문에 놀라울 정도로 신앙고백을 했다가 고난 이야기를 듣자 곧바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베드로가 안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사탄이 되고 사탄의 말을 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산행을 결심하셨을 것 같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시려는 걸까요?
여러분은 감이 오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지금 주님은 저런 제자를 앞에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저들을 좀 더 강하게 훈련을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계속 베드로를 주목하려고 합니다.베드로는 제자 중 늘 돋보이는 존재였습니다. 주님의 일에 늘 앞장섰습니다. 열심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그를 좋아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알려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놀라운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한순간에 사탄에게 흔들려 주님을 넘어 질만 한 말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다가 어떤 때 한순간은 사람의 일을 생각해서 주님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습니다.
이때 베드로 자신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요? 또 얼마나 자신에게 실망했을까요? 주님 앞에 죄송스러움도 있었겠지만, 자신에 대한 실망과 미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께서 베드로를 산으로 데리고 오르셨습니다. 이유는 그를 혼내 주시려는 것이 아니고 그를 더 강하게 키우시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보다 못해서가 나이라 더 훈련 시켜서 하나님의 귀한 그릇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다른 제자보다 더 잘나서 신비한 무엇을 보여 주시려고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질문했고 부탁을 했다면, 그리고 함께 변화산에 오르자고 했다면, 어디를 좀 가자고 했다면, 노회에 일 좀 하자라고 하셨다면, 우리를 좀 더 다듬고 훈련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큰 뜻을 이루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주님의 선택을 받고 산에 올라간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2절에 (마 17:2-3, 개정)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산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의 모습은 변화되어 해같이 빛났으며, 주의 옷은 빛과 같이 희어 졌습니다. 그때 언제 오셨는지 성경에 거장 모세와 엘리야가 오셨고 예수님은 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고 계셨습니다. 참으로 신비하고 놀라운 장면입니다,
이는 먼 훗날 저 영원한 나라에서 있을 모습입니다.계 1:14절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리고 계 1:16을 보면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오늘 본문의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잠시 후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 지라”(5)는 소리가 들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궁금했던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용을 정리해 보니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듣고 순종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산행의 목적은 여기에 있었습니다.주님께서 저들에게 보여주신 변화산에 일은 훗날 살게 될 천국인데 그것은 십자가 후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산행의 목적은 십자가의 고난을 돌파해 나갈 길을 말씀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세 명의 제자들은 변화산 위에서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것을 보았고, 들을 수 없었던 것을 들었습니다. 믿음의 거장들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천국은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믿음은 굳건할 수 있었습니다.
왜 저들에게 굳건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까?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아버지게 가시면 그만이지만 제자들을 세상에 계속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십자가와 고난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 십자가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체험입니다. 하늘에 신비함을 미리 보고 듣는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이지요?
예수님의 기도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주님은 오늘 이 신비한 일들을 산 아래 있는 모든 제자들과 오늘 우리와도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산에 오르는 일이 힘듭니다.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래서 정리해 보았더니 하나님의 은혜는, 천국은 편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애쓰고 땀 흘리는 곳에 있습니다. 고난과 죽음 십자가 후에 있었습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는 이것을 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도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수고하는 동역자들에게 헌신하고 수고할 수 있는 기회를 먼저 주셨습니다. 잘 감당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이 특별한 은혜를 체험한 제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본문 4절을 이 보면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한 베드로가 주님께 한 가지를 제안합니다. “주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산 위에 일들에 너무 감격한 베드로는 그 변화산 위에 계속 머물러 있자고 한 것입니다.
주님의 생각은 어떠하실까요?그런데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는 저의 말에 이렇다 저렇다 하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일어나셔서 내려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또 무안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마 17:9, 개정) “...너희는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산에서 있었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 그러시는 걸까요? 왜 본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걸까요? 제자들이 본 것이 어디 작은 것입니까? 이스라엘 역사에서 신과 같은 존재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정말 너무 황홀하고 두려고 떨리기도 하여 엎드려서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체험을 어디서 할 수 있습니까? 모든 제자가 다 본 것이 아니잖습니까? 얼마나 귀해요. 말하고 간증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것은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여기에 있었습니다.‘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산에서 본 것을 말하지 말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 있기 전에는 본 것을 말하지 말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본 것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저는 제자들의 연약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산 아래는 아 홉명의 제자들이 있는데 내려가서 ‘우리 모세를 봤다. 엘리야를 봤다.’라고 하면 어떤 분위기가 될까요? 시기 질투 그런 거 생기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떠들고 다니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에 도움이 될까요?
사실, 그동안 제자들은 주님은 함께 역하시면서 수없이 많은 이적과 표적을 보았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 바람과 바다가 잔잔하게 되고 병든자에게 말하면 일어나고 귀신을 명하며 쫓겨가고 축사하면 먹을 것이 한없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저들을 보실 때 제자들은 변하게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부활 이야기가 도움일 될까요? 한 마디로 저들은 아직 한없이 약하기만 합니다.
지금 주님의 사역 말년인데 저들은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한 없이 약하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영광과 기적 앞에서는 언제나 신나 하면서 십자가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안에 이런 성도들 계시지 않습니까?큰 은혜를 받았을 때, 그곳에 머물러 있고 싶어 하고 박수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어려움 앞에서는 불편해 하고 누구 탓하는 분들 계시지 않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맥을못 추시는 그런 분들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에게는 변화산에 은혜가 필요합니다. 변화산은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주님도 모든 제자를 다 데리시고 가시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헌신이 봉사가 변화산의 은혜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산이 좋지만 내려와야 하는 이유입니다.
제자들이 변할 곳은 변화산이 아니라 십자가가 있는 곳, 즉 예수를 죽이려고 기다리는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거기에 저들을 변화시킬 성령이 임하십니다.
(행 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래서 제자들은 산에 초막을 짓고 그것에 살면 안 됩니다. 세상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저들이 변화되는 것은 저들이 산에서 보고 들은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섬리와 약속이 있는 현장에서 십자가를 체험해야 합니다. 십자에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이 새롭게 변합니다.
이 땅에 십자가 없이 죄문제를 해결한 성도 없고 예루살렘으로 강림하신 성령의 도움없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 성도는 없습니다.
전에 우리는 교회가 만들어 준 영광의 자리에서 성도들의 박수와 존경을 한눈에 받으면서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 감격은 너무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겠습니다.이제 그 변화산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거칠고 고단한 세상 한복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고, 가서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놀랍게도 성령님은 거칠고 고단한 세상 한복판에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우리와 만나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므로 전에 지금 우리가 본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내려가서 십자가 앞에 기다리는 성령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한 줄 믿습니다.
적용~교회의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모이는 기능, 흩어지는 기능입니다. 열심히 모여 신비한 은혜를 체험하고 나가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장로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장로님들의 모임과 삶의 현장에 성령의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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