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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강북꽃동산교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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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성령을 따라 행하라 | 갈 5:16~2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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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설교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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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gfgc]]></author>
			<pubDate>Mon, 02 Mar 2026 18:09:3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gfgc.org/?kboard_redirect=7"><![CDATA[무명게시판 2023-03-25]]></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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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성령을 따라 행하라 | 갈 5:16~2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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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성령을 따라 행하라

갈 5:16~25

2022.06.05. 강북꽃동산교회 성령강림주일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이천년전 하늘에 계시던 성령님께서 세상으로 강림하셨는데 교회는 이것을 중요한 일로 보고 기념하여 지키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말하는 살아있는 사람의 구성은 육과 정신입니다.

이때 숨은 쉬는데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그를 뇌사자라고 말합니다. 뇌는 육에 일부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정신은 온전할 수 있습니다. 말하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정신은 온전하지만 표현을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람의 구성은 다릅니다.
성경에 사람은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영이 죽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모양은 위에서 말하는 뇌사자와 반대로 보입니다. 영이 죽었지만, 몸은 움직입니다. 그러나 영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의사표현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람에 살았다는 것은 영과 육이 함께 산 것을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영과 육중에 하나라도 죽었다면 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서 활동하고 있지만, 영과 육이 다 살아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이 뇌를 다쳐서 말하고 움직이지 못하지만 그를 죽었다고 볼 수 없는 것처럼, 성경이 사람은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때 사람이 움직이고 큰 일을 한다고 영육이 다 살아 있다고 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뇌사자의 경우 한 달 만에 깨어 나는 경우도 있고 1년만에 깨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영의 세계에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 즉, 죽었던 영이 살아나 영적인 세계도 보고 하나님께 의사 표현을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은혜라고 말을 합니다.

이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일어날 일이 아니죠. 수 천 년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하나하나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내 신”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죽었던 우리 영이 사는 일은 성령님과 관계가 있습니다. 성령이 세상으로 강림하셨다는 것은 죽었던 세상에 영들이 살아날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지요. 하나님의 영은 예수님과는 달리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바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존재합니다. 이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들에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는 인격을 가지신 영이라서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시고 사람들의 마음에 참 평안을 주십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이시라서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또 한 보혜사이시라서 인생을 넉넉히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그분을 만나고 받아 드리기만 한다면 그는 세상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의 최고의 목표는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을 돕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영을 살려주고 그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죄를 깨우쳐 회개하고 예수를 믿도록 도우시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 그가 예수를 끝까지 잘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만드시고 계획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를 세상에 보내셔서 구원을 완성하신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지옥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 땅에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 일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교단은 성령님이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의미에서 성령강림 주일로 선포하고 예배를 드리는 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날을 기념하고 성령감림을 강조하며 예배를 드리는 중요한 이유는 성령강림과 나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즉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이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세상에 모든 사람이 다 자동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중요한 몇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고전 2:12, 개정)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은 성령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님은 받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른 말로는 영접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마 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구원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라면 성령님도 하나님이 주실 때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 중에서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을 어떻게 받아야 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예수께서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실 때 제자들에게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이 오실터이니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때는 유대인의 큰 절기인 오순절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은 제자와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것으로 임재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세상에 오셨지만, 모두가 다 받은 것이 아니라 주의 약속을 믿고 기다린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은 받는 것입니다.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강제로 사람에게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그분이 녹크하시고 감동을 주실 때 인정하고 영접하는 분들에게 주십니다.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죄를 회개한다는 의미이고 성령을 받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이미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 당신을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받으신 분들은 그분과 끊임없이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때를 승리하며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으로 돌아오면 성령을 받는 일과 관련해서 매우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갈 5:17, 개정)의 말씀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령을 받고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거스리는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 육체가 하는 일을 거스린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육체는 성령이 하고자 하는 일을 거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둘이 서로 대적하여 우리가 원한 것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성령, 우리 구원과 관계된 성령,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이기는데 반듯이 필요한 성령님이 다 좋은데 이게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것을 성령의 부작용 이라고 말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령을 받으면 우리 마음 안에서 나를 대적하는 일이 생기는데 그래도 성령을 받으시겠습니까? 한동안 매주 힘들 수도 있는데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성령을 받지 않으시려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까?
고전 2:14절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육에 속해 있으면 성령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에 속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육에 속한 사람이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말합니다. (요 3:6-7, 개정)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한 마디로 육에 속한 사람이란 성령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령강림 후 세상에는 사람을 구분하는 새로운 기준이 생겼습니다.
바로 성령 받은 사람과 성령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영적인 일에 대해 눈이 멀었고, 귀가 닫혀있습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고 그 음성을 들을 수 없고, 나아가 영이신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배드릴 수 없고, 믿음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린 이것을 영적 식물 인간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영적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보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을 매 예배 현장에서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b>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상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b><b>.</b>
성령이 우리안에 들어오면 거스리고 대적하고 못 하게 하는 일들이 생길 것인데 영접하겠느냐? 오늘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령을 받아들이면 내 인생에 엄청난 일들이 생기는데,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엄청난 갈등들을 감당하시겠습니까? 때로는 가정에 불화가 생길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친구들에게 따 돌림을 당할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사회에게 따가운 시선을 받을 수도 있는데 감당하시겠습니까?

참고로 믿음의 사람들은 다 그런 일들을 감수하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란! 다윗, 요셉, 다니엘, 에스더, 초대 사도들 근대에 손양원 주기철 등등입니다.

솔직히 성령님을 선물로 받은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유는 그분이 내 일생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체와의 대적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성령과 대적하는 육체의 욕심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그 육체의 욕심에 대해서 상세하게 나열을 했습니다. 19절부터입니다. (갈 5:19-21, 개정)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15가지나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열거한 육체의 욕심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죄와 관계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죄와 관련된 결과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결단하기가 쉬워졌을 것입니다. 육체의 욕심이 이런 죄와 관련이 있다면 받듯이 성령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음에서 갈등이 일어나더라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마음의 갈등이란! 대적이란! 이런 것입니다.
성령이 음행, 더러운 것, 술취함 분쟁, 분냄 이런 것과 싸우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하면 안 된다고 갈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무엇이 누가 이런 것을 이기게 하겠습니까? 오직 성령께서 만이 육체의 소욕을 이기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늘 동행하시고 그분에게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18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이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안에 수없이 많은 육체의 소욕이 있고, 세상에는 그것을 이기게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성령의 인도하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참고로 육체의 욕심은 율법과 관계가 있습니다.

25절에는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말인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되는 것입니까?

1) 우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동안, 설교를 듣는 동안, 기도하는 동안,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동안 우리 심령 속에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생각과 일으켜 주시는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주시해야 합니다.

2) 다음으로 그 생각과 마음을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것인지 아니면 내 육신의 욕망에서 나온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이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확인시켜주십니다. 우리 마음이 평안하고 또 그 일을 생각하면 기쁨이 가득합니다. 비록 장애물이 있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과 마음을 따라야 합니다. 주저하지 말고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기고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이때 성령께서 세밀하게 역사하십니다.

3)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우리 안에 성품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표현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의 열매”라고 한 점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의 열매를 단수로 표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 아홉 가지 열매를 성령의 열매들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하나의 열매로 표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홉 가지 성품의 모습은 한 가지 성품의 여러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은 할 수 있는데 충성이 부족하다. 나는 오래 참는 것은 잘하는데 절제가 잘안 된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열매로 이루어진 성품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본연의 성품의 특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성품을 새롭게 빚으실 때 이 아홉 가지 성품의 모습이 하나같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오래 믿으면서도 우리 성품 때문에 아직도 고민이 된다면 아직 성령의 열매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성품 때문에 주변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도 성령의 열매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온전히 성령께 맡기고 성령께서 우리 성품을 새롭게 빚어주시도록 다 맡겨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자의 심령 속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을 따라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분이 주시는 능력으로 육체의 일을 끊고, 그분께서 우리의 성품을 새롭게 빛어 주시기 바랍시니다.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b>키위새를 아십니까</b><b>? </b>
뉴질랜드에 있는 새인데 날지를 못합니다. 그렇다고 타조처럼 잘 달리지도 못합니다. 에뮤처럼 덩치가 큰 것도 아닙니다. 아주 작은 새인데 날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멸종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원래는 잘 날던 새입니다. 그런데 천적도 없고 땅에 지천으로 먹을 것이 널려있어서 날지 않고 오랜 세월을 지내다 보니 결국 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을 받았으나 성령의 능력이 없는 것은 키위새처럼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했던 것은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미 받으신 성령의 능력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이름을 부르시고 성령님을 의지하시고 성령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를 인격적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능력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적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육신이 통제가 안 되는 시대입니다. 시대가 지나도 말과 소는 재갈과 고삐로 통제가 가능합니다. 큰 배도 작은 키로 통제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시대가 기면 갈 수로 통제가 안 되는 것은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살게 될 줄 믿습니다.]]></description>
			<author><![CDATA[gfgc]]></author>
			<pubDate>Mon, 02 Mar 2026 18:07:2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gfgc.org/?kboard_redirect=2"><![CDATA[설교게시판 2015-09-25]]></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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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 | 창세기 41:37~4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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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

창세기 41:37~40

2022.05.29.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청계천에는 청혼의 벽이라는 곳이있습니다. 대형 멀티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지요. 그곳엘 남자들이 여자들을 데리고 갑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대형 스크린에 영화처럼 한 남자가 꽃을 들고 등장합니다. 그리고 음악과 함께 멋있는 목소리로 “선영씨 사랑해 우리 결혼해 내가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 그러면 여성분들이 감동을 받는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보니까 그곳에서 777번째 청혼 이벤트가 있었다고 하는데, 777번째 이벤트가 있는 날 청혼 성공률은 100%였다고 합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감동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이런 감동받고 싶어 하는 시대 흐름을 놓칠새라 마케팅 전략에도 ‘고객 감동 전략’을 세워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감동은 대다수가 인위적이라는 것입니다. 의도적이고, 가공된 것들입니다. 억지로 감동을 이끌어 내려고 만든 일종의 ‘쑈’요 ‘이벤트’일 뿐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마는 것입니다.

진정한 감동은 순수함에서 나옵니다. 진정한 감동은 자연발생적입니다. 진정한 감동은 잔잔함에서 우러나옵니다. 감동은 분명, 만족보다 차원이 높은 차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바로 감동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왠만한 말에는 반응이 없습니다. 웃기는 이야기를 해도 웃지를 않습니다. 슬픈 이야기를 해도 슬퍼하지 아니합니다. 놀라운 이야기를 해도 놀라지도 아니합니다.

성경은 이런 시대를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 11:17)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당시 최고의 강대국 나라인 애굽의 왕이 한 청년을 보고 이런 말을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오.” 라고 했습니다. 왕이 히브리에서 팔려 온 한 청년의 말을 듣고 한 말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가 꿈을 꾸었는데 애굽사람들은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는데 이 청년이 왕이 꿈을 해석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이 무슨 꿈을 꾸었는데 애굽사람들이 그 꿈을 해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까?

라일 강에서 살진 일곱 마리의 소가 올라오더니 풀을 뜯어 먹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강가에서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마리의 소가 나오더니 살진 소를 다 잡아먹었습니다. 바로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꿈같 아보였습니다. 다시 잠을 청하여 잠이 들었는데, 또 꿈을 꾸었습니다. 무성하고 충실한 한 줄기에가 보이더니 그 줄기에서 일곱 싹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후 가늘고 바른 일곱싹이 나오더니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싹을 다 삼켜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은 그 꿈을 단번에 해석했습니다. 애굽에 7년에 큰 흉년이 든다는 것입니다. 41장 25절~ 하입니다. “살찐 일곱 암소와 좋은 일곱 이삭은 7년을 풍년을 말하는 것이며, 마른 일곱 암소와 좋지 않은 일곱 이삭과 일곱 해를 말하는데 바른 소가 살진 소를 잡아 먹고 마른 이삭이 살진 이삭을 잡아 먹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땅에 7년 풍년이 들고 후에 7년 흉년이 든다는 뜻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청년의 말을 들은 왕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리고 이 청년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여기서 뭐 느끼시는 것은 없으신지요?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섬리하는 일들이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사용하시려고 이런 일을 사셨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누구는 요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당시에 최고의 나라의 왕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잠에서 깨어난 바로는 애굽의 술사들을 다 불러 놓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해석을 못 했습니다. 지난밤 왕이 불길한 꿈을 꾸었는데 애굽에 왕이 꾼 꿈을 해석해 줄 사람이 없는 것은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당시 왕이 돈이 없습니까? 권력이 없습니까?

그때 술관원장이 왕에게 요셉을 소개했습니다. 전에 자기가 감옥에 있었을 때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요셉이 해석해 주었고 그의 해석대로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그를 당장 데려오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요셉이 감옥에서 왕의 호출을 받고 바로의 왕궁에 오게 되었고 왕의 꿈을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이런 꿈을 꾸게 하시고, 요셉이 그것을 해석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전이나 지금이나 후에도 이런 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그렇게 사용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바로에게 이런 꿈을 주셨고 요셉을 왕궁으로 들어가 바로 앞에 서게 하셨을까요?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학교를 가고 직장을 다니고 사업을 하는 목적이 될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 제일 먼저 이런 말을 했습니다.
25절이지요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 이해하시기에 어렵지 않으실 줄 앎니다. 요셉의 말은 바로가 꾼 꿈은 하나님이 하시일을 바로에게 보여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입니다. 이것 중요한 말씀입니다. 바로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실 일이란! 도대체 어떤 일이기에 그것이 무엇인데 주의 종이나 선지자나 예언자가 아닌 악한 바로에게 보이셨다는 것입니까? 그것이 요셉을 사용하실 일이라면, 요셉에게 보여 주시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방의 왕에게 보여 주시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하실 일이란! 요셉을 통해서 애굽에서 출애굽의 역사를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훗날 우리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알게 하시려는 구원의 매뉴얼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중요하고 큰일을 하나님께서 이방의 왕에게 보여 주셨다는 것이고 요셉에게 그것을 해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여기서 느끼시는 것은 없으십니까? 저는 그런 것을 느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꼭 선지자나 예언자나 오늘로 말하면 목사나 장로나 주이 종들에게만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실 뿐만아니라, 심지어 세상에 악한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세상에 권력자, 부한자, 지식자, 유명인을 사용하시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린 그런 예를 구약에서 바사 왕 고레스(주전 538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이런 조서를 내렸습니다.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라고 공포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을 할 때 일입니다. 이방 나라왕이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게 감동을 받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바울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바울은 핍박자 였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셨고 그를 13권의 신약 성경의 저자로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함께 생각할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방 사람들을 통해서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요셉을 왕에게 보낸 것처럼 나를 보내실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어디를 가든지 누구앞에 서든지 늘 하나님 앞에 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은 왕 앞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했을까요?
28절 이하입니다. “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시는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라고 하면서 요셉은 요셉의 의견을 바로에게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29~33절입니다.
“왕이시여 앞으로 이 땅에 7년에 큰 풍년이 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는 7년 흉년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 왕께서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7년 풍년 기간에 오분의 일을 거두어 두었다가 흉년을 대비하여야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게 히브리에서 종으로 팔려 온 청년이 당시 세계최강의 나라 왕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저는 요셉이 애굽에 주는 영향력을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방식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세상에 주는 영향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은혜를 주시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인도해 주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나가야 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성령이 말씀을 주실 때 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그렇게 요셉은 바로의 궁으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바로의 반응입니다. 바로는 요셉의 꿈해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가 권하는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요셉에게서 선한 영향력이 나갔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이 설교를 듣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37절입니다. “바로와 그의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8절에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왕이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39절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은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 성경 중에 가장 은혜로운 말씀이 이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25절 때문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라”라고 했는데, 39절에서 바로는 “하나님이 이 모는 것을 네게 보이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서로 나 말고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보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은혜롭고 감동적인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의 역사인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빛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말이 아닌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 하나님의 말을 했으니 얼마나 큰 역사가 일어날까요?

오늘 애굽의 왕은 요셉의 꿈 해몽과 그가 권하는 말에 크게 감동을 받고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습니다.
41절 “너는 내집을 다스리라 내 백서이 네 백성이다.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왕좌 분이다.”
42절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에 손에 끼워주고 세마포에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어 주었습니다.
44절에 온 애굽땅에 요셉의 허락 없이는 수족을 놀릴자가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날부터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하루아침에 왕이 가지는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 누구도 요셉이 애굽 왕궁에 들어가게 될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더더욱 그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혹 남이 모르는 사이에 요셉이 애굽 왕실에 들어가려고 공부를 했거나 준비를 한 것도 없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이인자가 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지금까지 살게 된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떤 노력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목사가 되고 직분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남들보다 의롭게 살고 이웃에게 구제를 많이 하고 늘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갈 수 있습니다.

혹 이유가 있다면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를 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조상 중에 믿는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불쌍히 여기셔서 천군과 천사를 보내셨고 성령님의 은혜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궁전에 들어가게 된 것과 그가 왕의 꿈을 해석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코 그의 실력이 아닙니다.

그가 왕의 꿈 해몽을 잘했습니다. 그리고 꿈과 관련해 왕이 해야 할 일을 아주 잘 말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왕은 큰 결단을 내리고 애굽을 새롭게 다스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일에도 누구의 실력이나 노력도 없었습니다. 여기에도 오직 하나님의 감동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은 애굽 온 나라를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애굽은 원래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감동은 이방의 나라라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주관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누구라도 세상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감동의 원천이십니다. 창 1장 4절을 보면 첫째 날 빛을 만드셨습니다. 성경은 그 빛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고 그 빛을 보시면서 감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매일 매일 감동을 연발하셨습니다. 특히 마지막 날에 인간을 만드시고 모든 창조를 끝내시고는 더욱 크게 감동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심히 좋았더라.”감동의 시작은 하나님이십니다. 감동의 하나님은 피조물을 통해 감동을 받으십니다. 감동을 받으신 하나님은 축복을 주십니다.

오늘 바로 왕은 요셉에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원래 바로는 요셉을 잘 모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자신의 시위대장의 부인을 겁탈을 하려다가 감옥살이를 했다는 사실 정도만 압니다. 자신의 신하로부터 꿈 해몽을 잘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도 별로 대단한 호감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꿈자리가 너무 사나와서 그리고 자신들의 술사들이 해석을 못 한다니까 그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의 꿈 해몽은 보통 사람들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창 41:38)“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바로에게 은혜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요셉에게 은혜는 하나님의 그의 머리와 마음과 온몸을 감동시켜 바르게 꿈을 해몽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령님은 보내셔서 감동을 받으시고 감동을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통해 감동을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봉사와 헌신에 감동하십니다. 우리의 예상치 못한 큰 믿음을 보시고 크게 감동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이 전능한 분이심을 알리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감동의 원천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마음을 움직여 주시고 찬양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죄를 생각나게 하시고 회개를 도와서 예수를 믿게 해 주십니다. 감동이 없는 시대에 살면서도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 가운데, 오셔서 만져주시고 자극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면 우리 마음이 움직입니다. 마음이 열립니다. 하나님의 감동의 역사를 경험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가 원래 기독교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이 나라는 우상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감동에 순종하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우리나라를 찾아온 선교사님들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우상의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이 이방 나라이든 그것이 감옥이든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왕이 자신을 찾을 때 특별히 잘 보이려는 노력이나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곳을 성공의 기회가 될 거라는 기대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 그가 기대를 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에 순종해야 합니다. 감동은 성령이 역사입니다. 성령이 믿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는 이유는 세상을 감동하시려는 것입니다.

바로은 요셉을 통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창 41: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성령에 감동된 사람입니다. (삼상 16:13)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적용

오늘 말씀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 감동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하더니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일개의 종이 왕에서 나가는 것만도 영광인데 나라의 운명을 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애굽은 요셉이 말하는 대로 움직여 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성령에 순종하여 세상으로 나가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면 세상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움직여진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은 그 어느 때 보다 세상이 악합니다. 무섭습니다. 이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받고 나가서 성령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직장도 나라도 마을도 지역도 감동시킬 수 있으며, 악하고 무거운 사람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한주간도 성령님과 동행하시고 성령에 감동되어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description>
			<author><![CDATA[gfgc]]></author>
			<pubDate>Mon, 02 Mar 2026 17:58:06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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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 | 창 41 : 37-4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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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gfgc]]></author>
			<pubDate>Mon, 02 Mar 2026 17:52:49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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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내 안에 거하라 | 요 15:1-1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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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gfgc]]></author>
			<pubDate>Mon, 02 Mar 2026 15:57:14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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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어려운 일을 감당하는 스승 | 열왕기하 2장 8 ~ 11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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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어려운 일을 감당하는 스승

열왕기하 2장 8 ~ 11절

2022.05.15. 강북꽃동산교회 스승의 주일

오늘 우리 교회는 스승의 주일로 지킵니다. 오늘은 스승의 날입니다. 언제부터 스승의 날이 공휴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학교에 안 가게 되었고 스승과 제자가 만나지 못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스승의 날에 말입니다.

전에 스승의 날에는 선생님과 학생들이 한 곳에 모여서 스승의 날 행사를 했습니다. 학생들이 스승의 날 노래를 불러드리고 스승의 가슴에 꽃을 달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스승의 날 제자와 스승이 만나지 못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생겼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아마도 스승과 제자간에 불미스러운 거래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촌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관은 스승의 날을 공휴일로 정했고 아에 그날에는 스승과 제자가 만나는 일이 없게 했습니다. 잘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것은 스승과 제자 관계에서 은혜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승의 날 노래 중에서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 수록 높아만 가네” 여기서 스승의 은혜가 이상하게 거래의 관계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제자가 돈을 내고 스승의 지식을 샀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돈만 많이 있으면 이름 있는 <b>큰 스승</b>의 만날 수 있고 큰 지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생긴 것입니다.

스승의 은혜를 제일 많이 강조하는 곳이 바로 우리 기독교입니다. 선교사님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교육기관을 제일 많이 세웠습니다. 교회를 세우기 전에 먼저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거기서 스승의 은혜를 가르쳤습니다. 스승의 은혜를 가르치게 된 이유는 예수님께서 최고의 스승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교회도 사회처럼 스승의 날을 촌지나 주는 날로 인식하고 쉬쉬하는 분위기로 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스승의 날을 어버이날처럼 어린이날처럼 잘 계승하고 지켜야 한다면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은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란! 보상이 아닌 선물이지요. 물론 학비를 내고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보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돈을 내고 배웠으면 스승의 것이 모두 내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사전에서 스승이란! 일상을 가르쳐 올바르게 이끌어주는 사람. 교사. 선생(마8:19). 특히 사리를 분별하여 이끌어 주는 교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딤후1:11).

교회에서 목사나 교사가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나 교사는 성도를, 학생들을 천국에 들어가도록 길을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책임을 가지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목사나 교사가 잘 가르쳤다고 저들이 다 천국에 들어 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사는 들어가고 안 들어가는 것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이게 교사의 역할입니다.

학교에서 교사는 학생들이 목표로 하는 것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서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모두가 서울대, 연대 고대를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교사는 저들이 그런 대학에 못 들어간 것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이게 교사의 역할입니다.

오늘 분문에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에 좋은 사례가 있어 소개하려고 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스승과 제자 관계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의 스승입니다.
어느 날 스승 엘리야가 제자인 엘리사에게 작별을 고했습니다. 왕하 2:6 “너는 여기 머물거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신다.” 그러자 엘리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떠나기를 거절하고 따라 갔습니다.

그래서 둘이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스승 엘리야가 겉옷을 벗더니 둘둘 말아 가지고 요단강을 쳤습니다. 그러자 요단강이 이리저리 갈라지더니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마른 땅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요단강을 건넌 엘리야가 제자 엘리사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엘리사야! 하나님께서 나를 데려 가실턴데, 내게 구할 것 있으면 구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잘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엘리사가 스승에게 무엇을 구했나 보시기 바랍니다.

엘리사가 스승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구했습니다. “당신이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내게 갑절이나 있게 하소서”라고 구했습니다. 9절입니다.

여러분! 에게 무슨 말입니까?
구약시대의 최고의 영적 지도자 엘리야가 사역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살아있는 그 모습 그대로 하늘로 데려가신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과정을 생략 시키고말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내려와서 엘리야를 태우고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그 과장에서 엘리야가 제자에게 무엇인가 주고 싶어서 구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제자인 엘리사가 스승에게 역사했던 성령의 역사가 자기에게 갑절이나 일어나기를 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마디로 엘리사가 스승에게 성령을 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그래서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성령을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제자 엘리사에게 성령이 하시는 갑절의 역사를 줄 수 있을까요?

전에 부흥회 하시는 분들 보면 이것을 본문으로 설교하시는 분들 참 많으셨습니다. 그때 강사님들께서 설교하시고 기도하시면서 성도들을 향해 “불 받아라. 성령의 불을 받아라.”하시는 것을 본 적이 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아멘, 아멘 하고 불을 달라고 소리를 치시는 성도님들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강사님이 성도들에게 성령을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성령을 줄 수 있습니까? 그것도 자신이 받은 것에 갑절을 말입니다. 또한 부흥회가 강사님이 성도들에게 성령의 불을 줄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요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구하는 엘리야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이거 잘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스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거 잘 못 말하고 잘 못 해석하면 바른 교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엘리야의 대답입니다. 10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왕하 2:10, 개정) “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주가)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엘리야의 입장이 어떠한 것입니까? “어려운 일”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갑절의 성령의 능력을 제자에게 주는 일은 어려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갑절이기 때문에 어렵다는 뜻입니까? 갑절이 아니고 조그마한 일이면 가능하다는 뜻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엘리야가 말하는 어려운 일이란! 자신이 성령의 능력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신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역사는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 분이시며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람에게서만 나타납니다. 그래서 엘리야에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면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령 하나님은 엘리야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엘이야가 기도를 많이 하고 도를 많이 닥아서 그의 몸에 많이 채운 어떤 기운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만든 기술이나 실력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왕이시며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은 홀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게 계시는 성령님을 내 맘대로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사고파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사도들이 안수함으로 성도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들고 성령의 능력을 사려고 사도들에게 갔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 8:18-24, 개정)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스승인 엘리야는 그에게 어떻게 가르쳤을까요?

다시 10절입니다. (왕하 2:10, 개정) “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 도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실 수 있습니까?

제자 엘리사가 구한 일이 어려운 일이지만, 가능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즉, “그가 나를 데려가가시는 것을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리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오늘 말씀 중에서 가장 복음적이 말씀인데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오시는 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주어가 생략되었지만, 주께서 나를 데려가시는 것을 네게 보면 네게 구하는 성령의 역사가 임하게 될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 보면 안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주께서 엘리야를 데려가시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즉, 엘리야가 불 말들이 끄는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여기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즉, 하늘에서 내려온 불 수레는 앞으로 있어질 성령의 역사를 상징했습니다. 아직 본격적인 성령의 시대는 아니지만, 오늘 하나님은 스승의 제자의 관계에서 본격적인 성령 시대가 올 것을 말씀해 주시고 계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을 인생이 이해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육적인 일도 사람의 간교와 술수도 잘 알지 못하는데 인생이 영이신 하나님과 영과 육을 동시에 지니신 성자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과 예수님의 영을 동시에 가지고 계시는 성령을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성 삼위 사역을 여러 가지로 비유하는데, 고속도로 비유가 있습니다. 대통령이 서울과 부산을 잊는 경부고속도로를 기획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잊는 구원의 길을 계획 하셨다는 것입니다. 현대건설이 경부 고속를 건설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을 잊는 길을 내셨습니다. 자동차가 물건을 싣고 고속로 나르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세상에 사람들을 싣고 천국으로 나르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스승에게 구한 성령은 세사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늘로 실어 나르는 일을 하는 자동차와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이 엘리야가 마음대로 줄 구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네가 내가 불수례를 타고 가는 것을 보게만 된다면 네가 구한 일이 일루어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엘리사가 스승이신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가는 것을 보면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엘사가 그것을 보면 가능하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 엘리야의 영적인 눈이 밝아질 것이고 성령의 역사를 알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게 은혜와 믿음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 보면 엘리야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엘리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입니다.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라고 했습니다.
그날 엘리사는 하늘에서 내려온 불말들이 끄는 불수레를 보았고 그 불수에에 스승이신 엘리야가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신기했을까요?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을 받았을까요?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불수레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는데 그 불 수레에서 원가가 하나 떨어졌습니다. 달려가 잡았더니 스승의 걷옷이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 스승이 둘둘 말라서 요단을 쳤더나 요단이 이리 저리고 갈라지게 했던 그 옷 말입니다. 엘리사가 그 옷을 잡고 자신도 모르는 사실이 스승처럼 요단강을 쳤더니 물이 이리 저리로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리사가 다시 강을 건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단강을 가른 옷을 자신의 옷이 아닌 스승의 못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엘리사에게 엘리야에게 나타났던 것보다 갑접의 은혜라 임했다는 것입니까? 저는 임했다고 믿습니다. 이유은 그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수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불수례의 성령을 의미합니다. 또한 스승의 옷을 받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는 스승의 가르침을 계승했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은혜를 사람들을 통해서 주십니다. 특히 스승을 통해서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계승을 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령에 의해서 사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성령님은 이 말씀이 사도들에게 주신 이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계승 되어지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면 왜 엘리사는 성령의 능력을 원했습니까?

그것은 스승 엘리야를 오래 지켜봐 온 결과 때문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스승이 없는 세상이 너무 악하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b>이세벨이 왕비가</b> 된 이후 이스라엘 땅에 우상 숭배는 그야말로 창궐했습니다. 그 누구도 그 기세를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엘리야가 홀로 이 거대한 영적 흐름에 맞섰습니다. 그리고 끝내 영적 흐름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자인 엘리사 생각에 스승 엘리야의 위대한 승리의 원동력은 다름 아닌 영감에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그 능력만으로 만 영적 전쟁을 이길 수 있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스승 엘리야처럼 영감의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감이 있어야 스승의 뒤를 이어 선지자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적용~

지금은 성령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우리들에게 성령을 주시기 원하시데,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주시기 원하십니다. 이유는 성령님의 역사가 너무도 신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사에게 성령을 능력을 주시되 엘리야를 통해서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대에 최고의 스승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시기 원하십니까? 먼저 개교회에 하나님이 세우신 주의 종들을 통해 배우시기 아시기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실 줄 믿습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description>
			<author><![CDATA[gfgc]]></author>
			<pubDate>Mon, 02 Mar 2026 15:40:5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gfgc.org/?kboard_redirect=2"><![CDATA[설교게시판 2015-09-25]]></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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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어려운 일을 감당하는 스승 | 왕하 2:8-1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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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설교원고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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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gfgc]]></author>
			<pubDate>Mon, 02 Mar 2026 15:37:1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gfgc.org/?kboard_redirect=7"><![CDATA[무명게시판 2023-03-25]]></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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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한 사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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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설교원고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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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gfgc]]></author>
			<pubDate>Mon, 02 Mar 2026 15:12:37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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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자동차보험료비교견적사이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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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escription>
			<author><![CDATA[KS]]></author>
			<pubDate>Sat, 28 Feb 2026 18:42:06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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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말씀으로만 하옵소서 | 마태복음 8장 5~18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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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마태복음 8장 5~18절 (10-13)

2026.01.18. 강북꽃동산

로마가 유대를 점령했을 때, 유대 거리에는 로마 군인들이 제 집처럼 할부하며 다녔습니다.
로마는 유대를 점령한 뒤 2~3개 군단(약 1만~1만5천 명)과 다수의 보조 군을 주둔시켰습니다.

한 군단은 약 5,000~6,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군단 안에는 천 명단위, 백 명단위로 나눠 관리했는데 천명을 관리하는 사람은 천부장, 100명을 관리하는 사람을 100부장이라고 했습니다.

군단의 주된 업무는 유대인들을 감시하고 반란을 막는 일입니다. 예루살렘과 가이사리아 등 주요 거점에는 상시 주둔 병력이 있었으며, 반란 시에는 추가 병력이 파견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저들은 불랙리스트를 만들고 관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저들에게 예수님은 관리대상 1호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구름떼와 몰려 다녔으니, 그래서 저들은 매일 예수님의 동선을 파악하고 혹 반란이 나지 않는가를 늘 주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가버나움이라는 곳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로마의 백부장이 몇 명의 군사들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말을 타고 왔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입니까? 백부장은 예수님이 계시는 공간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유대 상황을 아는 사람이라면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반란을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왜 왔는지 궁금합니다. 그가 와서 예수님께 이런 말을 합니다.
(마 8:6, 개정)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말입니다. 다행입니다. 반란 그런 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입니다. “하인이 중풍병으로 쓰러져 몹시 괴로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와서 고쳐 달라는 것도 아니고, 하인을 데리고 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기도를 해 달라는 어떤 말도 안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당황스럽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한 젊은 유대인을 찾아와 왔다는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오해를 받을 반한 일이죠. 당시 백부장은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런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부하가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한다고 했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래서 백부장이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도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 8:9, 개정)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 아래 있는 군사를 보내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인이 아픈 일을 가지고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께 나왔다는 것 아닙니까? 무슨 의도입니까?

이상하지요.
하인이 중풍으로 쓰러졌다면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당시 유대에는 자기들이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병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하인이 쓰러졌는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여러분은 이 백부장의 의도를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은 집으로 모시고 가려는 것 아닙니까?

<b>백부장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b><b>?</b>
정말 하인의 일 때문입니까요? 혹시 다른 의도는 없는 걸까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어떤 말을 하는지 상황을 관찰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말을 들으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입니다.(7절)

이제 그가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 8:8, 개정)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이건 무슨 말입니까? 오시라는 말입니까? 오시지 말라는 말입니까?
저는 “내 집에 오지 말라”는 것을로 들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상하지요.
주께서 가서 고쳐 주겠다는데 오지 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이 백부장 왜 이러는 것 같습니까?
혹시 저가 바리새인들과 짜고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누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백부장이 예수님께 와서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가서 고쳐 주겠다고 해셨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가려고 온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시지 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8장 5–13절에 나오는 백부장과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상황을 조금 더 깊게 살펴보면 백부장의 의도가 보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직접 나아와 자신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심하게 고통받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에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가려 했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그는 단지 예수님의 권능을 의지하여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당시 사회적·문화적 배경을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로마인) 사이에는 교제에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백부장이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은 오히려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고 곧바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b>여기에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을 것입니다</b><b>.</b>

정리해 보면 백부장이 하인을 위해서 예수님께 나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가려는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려고 합니다.

아마도 백부장에게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갈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백부장이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갈 수 없는 이유가 무엇 같습니까?

당시 많은사람들이 예수님은 집으로 모시고 가는 것이 최고로 복을 받는 길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가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백부장이 자기 집에 오심을 거절한 것에 대해서 <b>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b><b>? </b>

그날 백부장은 로마 화려하고 권위적인 장교의 옷을 입고, 말을 타고 왔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 주변에는 호위병 몇몇 함께 왔을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 얼마나 당당하고 위엄 있어 보입니까?

반면 예수님은 늘 정해진 휘장 같은 옷에 햇빗에 그을린 검으 수르한 모습은 왠지 없어 보이고 초라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가서 고쳐준다고 하는데, 내 집에 오지 말라니 혹 홀대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오늘 성경은 편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백부장이 예수님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숨김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8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주여! 나는 주님이 1)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2)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집의 하인이 넉넉히 낳겠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백부장이 생각할 때 예수님은 너무도 귀하신 분이시라서 감히 내 집처럼 천한 곳에 모시기에 너무도 송구스럽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백부장 마음속에는 감히 예수님 앞에 서 있는 것조차도 부끄럽기 한이 없는 죄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가려고 온 것이 아니고 다만 예수님께 종의 이야기를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관심을 가지시면 주님이 어디에 계시든지 낳을 것을 믿는 확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종의 이야기를 했던 것인데 주님이 직접 오신다고 해서 얼마나 황송하옵고 당황했는지 몰라했습니다. 백부장 마음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놀라운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백부장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말씀 한마디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써 지금도 말씀으로 바람과 바다도 잔잔케 하시고 귀신들을 명하여 쫓아내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 한마디만 하면 자기의 종을 중풍병에서 일어서게 할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 특별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믿음과 다르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가고 싶어도 모시고 가지 못하는데 예수님이 직접 가신다고 하는데 하인이 일어나는 것은 보장된 것이아닙니까? 그런데 오시지 말라니요? 그러다가 괜히 못 고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것입니까?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그는 예수님을 창조자로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b>백부장에게 이런 믿음이 있습니다</b><b>.</b>

8절입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는 그의 말에 믿음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엔 주어와 여러 가지 문구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의 말을 해석해 보면 이렇습니다. “주여!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면 내 하인은 우리 집에서 낫겠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게 어떻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일을 보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 어떤 도구도 사용하지 않으시고 오직 말씀으로만, 물리적인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물론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는 흙이라는 물리적인 재료를 사용하셨지만, 그것은 사람을 특별하게 만드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섬리이셨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백부장이 다만 말씀으로만 하오소서라는 것은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던 것처럼 말씀하시면 내 집에 하인이 낳을 수 있다는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저에게 어떻게 그런 믿음이 있는 것입니까? 그가 말했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말씀이라는 중요한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배웠습니다. 은혜의 방편 세 가지는 말씀, 기도, 성례라고 말입니다.

요즘 우리는 믿음을 주제로 40일영성회복 새벽예배를 하는데, 지난 27일동안 믿음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앞으로 12일 남았습니다.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은혜의 방편을 통해서 하나님께 받는 선물입니다. 은혜는 믿음을 전달하는 반편입니다. 오늘 예배에 혹 은혜가 됩니까? 그 안에 믿음이 있을 것입니다. 말씀이 있고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 마음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믿음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은혜의 방편인 하나님의 말씀이 심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믿음을 심었을 것입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놀라운 믿음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인격적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전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주께서 여기서 말씀을 하시면 집에 있는 하인이 낳을 것을 믿는 믿음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발견한 백부장의 믿음이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평가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하셨습니까?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 하였느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주님께서도 그의 믿음에 놀라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중에서 이런 믿음의 보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찾아올 때부터 그의 믿음을 보고 계셨습니다. 이런 부분이죠
6절에 “이르시되 주여”, 8절에서 “이르시되 주여”라는 부분입니다. 백부장은 처음 뵙는 예수님 앞에서 “주여”라고 말했습니다. “주”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잘 아는 대로 당시 로마가 유대를 장악하고 있을 때 “주”는 오로지 로마의 황제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백부장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백부장에게 있는 예수는 메시아이며 왕이시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감히 주 예수를 집으로 모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다 알고 계신 주님이 새삼 놀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11~13절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11~12절인데 이 백부장과 같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이고, 이스라엘의 본 자손들은 바같 어두운데 쫓겨나 울며 이를 갈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없으면 고백할 수도 없고, 고백이 없으면 유대인 일찌라도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13절에 백부장이 믿음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대로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지 않았지만 하인은 중풍병에서 일어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상정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우리의 “주”이십니다. 예수를 주로 믿는 이 믿음은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험악해도 우리를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지금 우리는 성령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 시대의 특징은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기도하면 저기서도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에 관심이 많으신 이유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기 때문입니다.

 ]]></description>
			<author><![CDATA[gfgc]]></author>
			<pubDate>Sun, 25 Jan 2026 19:10:01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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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말씀으로만 하옵소서 | 마태복음 8장 5~18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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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gfgc]]></author>
			<pubDate>Sun, 25 Jan 2026 19:01:06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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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자동차보험료비교견적사이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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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div>]]></description>
			<author><![CDATA[김소영]]></author>
			<pubDate>Tue, 13 Jan 2026 17:31:54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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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자동차보험료비교견적사이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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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div>]]></description>
			<author><![CDATA[김소영]]></author>
			<pubDate>Thu, 08 Jan 2026 20:50:46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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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div>]]></description>
			<author><![CDATA[김소영]]></author>
			<pubDate>Sun, 04 Jan 2026 20:41: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gfgc.org/?kboard_redirect=2"><![CDATA[설교게시판 2015-09-25]]></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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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자동차보험료비교견적사이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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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div>]]></description>
			<author><![CDATA[김소영]]></author>
			<pubDate>Sun, 21 Dec 2025 04:14:13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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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표적을 보여주시는 목적 |  요 4:46-5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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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표적을 보여주시는 목적

요 4:46-54

2025.09.28. 강북꽃동산교회

“1.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야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2.벼슬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지식으로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야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임승원씨가 작사하고 백광재씨가 작곡한 아동성가입니다.

어렸을 때 교회를 나가본 사람은 다 알만한 노래입니다. 믿음을 강조한 노래이지요. 이 노래는 교회 본질과 기독교의 본질을 말 할 수 있는 대표적인 노래입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예수님을 급히 찾아왔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급히 찾아온 것은 아들이 병이 들어서 위독한데, 찾아온 이유는 오셔서 좀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예수께서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 갑자기 초면 일턴데 ‘너희’라고 하면서 싸늘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래서 성경을 보니까 예수님을 급하게 찾아온 사람은 왕의 신하였습니다. 그에게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병이 나서 위독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왕의 신하가 아들이 병이 들었으면 병원에 가야지 왜 예수님께 온 것입니까? 병원에는 안 갔던 것입니까?

혹 돈이 없는 것입니까? 의사가 없는 것입니까? 왜요? 갈 곳 다 가보았고, 유명하다는 의사에게 왜 안 가봤겠습니까? 그런ep 어떻게 예수님을 다 찾아왔다는 것입니까?

47절에 보이시죠?
(요 4:47, 개정)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b>오셨다는 것을 듣고 </b>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중요한 단어rk 보이시지요? 즉,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소문은 그를 예수님께 오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어떤 소문을 들었다는 것입니까? 죽은 자를 살리는 소문, 바다를 잔잔케 하셨다는 소문, 귀신을 쫓아내는 소문, 눈 먼자를 보게 했다는 소문,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했다는 소문, 무슨 소문을 들었을까요? 아마도 병자를 고쳤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또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지금까지 예수님은 그런 기적을 일으키신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사적을 막 시작하신 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것은 하나 있습니다. 갈리리 가나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일입니다. 오늘 주님이 갈릴리 가나에 다시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들을 고쳐 달라고 온 아버지가 들은 소문은 예수께서 얼마 전에 있었던 혼인집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소문을 듣고 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그렇지요? 아들이 죽에 생겼는데, 그 소문을 듣고 병을 고져 달라고 온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는 누구인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왕의 신하는 누구일까요? 왕의 신하는 당시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신하를 말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b>이 사람은</b> 헤롯 안디바의 친척이거나 왕궁의 고위 관리이거나, 아니면 왕궁 수비대의 고급 장교일 것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이 사람은 당시 신분이 높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자기의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당시 의사도 아니고 낮고 천한 신분의 한 청년, 목수의 아들이었던 예수님 앞으로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가나 지역까지 말입니다. 거리가 얼마나 될까요? 약 34킬로나 되는 먼 길입니다. 그가 그렇게 와서 예수님께 겸손히 머리 숙여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자존심 체면 다 내려놓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저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요 4:48,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친절한 말씀 아닙니다. 혼나는 뜻한 말입니다. 자존심 상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회담이라면 결렬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중요한 단어와 메시지가 있습니다.
중요한 두 개의 단어가 보이죠? 하나는 표적과 기사, 그리고 또 하나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이 두 단어를 이렇게 상용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아니한다고 말입니다.

이를 정리해 보면 <b>믿음은</b>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온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왕의 신하에게 ‘너희는’이라고 했는데,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들뿐이겠습니까? 주님의 제자들이나 오늘 우리도 물이 갈라지고, 죽은 사람이 일어나는 표적을 보지 못했지만, 주님이 주시는 표적이 버금가는 것들을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중요한 일입니다.
믿음이 표적과 기적와 관계가 있다는 말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표적을 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왕의 신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들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요 4:47, 개정)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말에서 상태가 위중한 것은 거의 죽게 되었다는 말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 4:49, 개정)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는 말이 아들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b>그는 예수님을 모시고 가서 죽어가는 아들을 살릴 수 있을까요</b><b>?</b>
다음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 4:50,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b>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b>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당황스럽지 않습니까? 이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예수님을 모시고 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들이 산다는 것입니까? 기도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먼 길을 달려왔는데 그냥 가라니요.

여러분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냥 갈 수 있습니까? 갈 수 있다면 무슨 근거로 갈 수 있습니까? 혹시 이런 의심은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는 말씀 말입니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기에 충분은 말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왕의 신하에게 그것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왕의 신하에게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라고 하시자 왕의 신하가 바로 일어나서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요 4:50, 개정) “....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는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만 믿고 바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 와서 아무것도 본 것이 없습니다. 아들이 낳았다는 어떤 증거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낳았다는 말씀만 들었을 뿐입니다. 증거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말씀만 믿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는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왕의 신하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아들을 고치기 위해 그 먼 길을 달려왔을 뿐입니다. 예수님께 헌금을 드린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왔다가 꾸중같은 말만 들었습니다. (요 4:48)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낳았다니 그것을 어떻게 그 말씀을 믿으라는 말입니까? 어떻게 그 말씀만 듣고 돌아가란 말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람은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돌아갔습니다.
아직 표적을 보기 전입니다. 이게 오늘 말씀에 핵심입니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할까요?

저는 두 가지 때문에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한가지는 소문 때입니다. 그에게는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 소문은 그 마음에 믿음을 주었고 그 소문은 그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여 30킬로가 넘는 그 먼 길을 한순간에 달려오게 했습니다.

여러분! 이 소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소문은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 속에는 믿음이 있다는 사실이지요. 그리고 그 믿음은 그가 예수님께로 나오기에 넉넉한 믿음인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 앞에 나온 것은 큰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요? 우리의 이성과 판단 결정으로 우리는 오늘 주 앞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앞에 나와 예배하며 헌신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듣고 배웠던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예가 너무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와서 병 고침도 받고, 이적과 표적을 보기도 했습니다. 베세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만드신 기적의 떡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단지 은혜에 불과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에서 작은 믿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믿음 큰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습니다.

다음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왕의 신하는 오늘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께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네 아들이 살아있다.” 그의 믿음은 여기서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믿음의 말씀을 하셨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은 소문을 듣고 30킬로가 넘는 곳을 한숨에 달려 온 것도 믿음이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는 순간 더 큰 믿은 성숙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이 믿음의 원칙은 동일합니다. 주님이 선포하시면 그 순간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능력이 나갑니다. 낳았다고 하면 믿으면 낳았고 두려워 말라고 하셨으면, 두려워 안 하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얼마든지 주의 은혜가 있다면 그 작은 믿음으로 주 앞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오면 더 큰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받은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경험이 있어야 하고 주께서 인정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의 말씀만 믿고 순종하며 집으로 가는 왕의 신하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주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과 말씀을 듣는 사람이 이런 믿음이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b>왕의 신하가 주님 말씀을 믿고 자기 집 가버나움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b><b>. </b>
집으로 가는 도중에 멀리서 하인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주인의 아들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자초지종 들어보니 그 아이가 나은 시각이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아있다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시각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운 소식입니까?

왕의 신하의 마음에 큰 결단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바로 하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자신의 일가와 친척들을 다 집으로 초청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직 이 사람이 집으로 가서 아들이 나은 것을 <b>확인했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b><b>.</b> 물론 집으로 가서 아들이 나은 사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이 아들이 어떤 병에 걸렸었는지 그 병세가 얼마나 중한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병이 나은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역시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할까요? 그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일가와 친척 온 집이 다 이 사실을 알고 믿기를 원했습니다. 53절입니다.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주님이 행하진 7개의 표적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가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은 첫 번째 표적입니다. 본문 54절을 보면 “두 번째 표적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20:30~31에 보면 표적의 목적이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두 가지이지요. 하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믿고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인 많이 있는데 일곱 개만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지만, 오직 이것만을 기록한 것은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과 그로 인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두 번째 표적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표적을 보여주는 이유는 당시에 사람들과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에게 큰 믿음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적용

주님의 사역은 그 자체가 표적과 기사의 장이었습니다. 움직임 자체가 표적이었습니다. 소문자체가 기사였습니다.

왜 주님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까? 믿음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였고 따르는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요 2: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b>제자들이</b> 그를 믿으니라”
(요 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b>제자들이</b>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 20:25) “다른 <b>제자들이</b>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표적은 은혜요 선물입니다. 표적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표적 자체가 믿음이거나 구원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신 것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표적을 보이고 계십니다. 크고 작은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놀라운 일을 체험하게 하시기도 합니다.

지금 세상에는 표적이 필요합니다. 표적이 필요한 이유는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질서를 지키고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하나님의 표적이 필요 없다고 하는 시대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아도 못 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못하는거 없습니다. 병도 고치고 사람도 만듭니다. 하늘도 올라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은혜 기적이 없으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믿음을 얻기 위해 교회를 나오고 믿음으로 교회를 다닐 수 있고 믿음이 있어야 구하기도 하고 믿음이 있어야 찬양도 하고 봉사도 할 수 있다. 믿음으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천국을 믿고 믿음으로 구원을 믿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세상이 평안하고, 세상이 험해도 험한 세상을 이길 수 있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축복과 상을 기다립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에는 표적인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근거가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표적이나 은혜를 주셔야 믿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은혜인 표적을 보여 달라고 기도해야 겠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다음 말씀으로 정리했습니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오늘도 예배 중에 은혜를 받으시고 큰

 

이 눈에 아무증거 아니뵈어되]]></description>
			<author><![CDATA[gfgc]]></author>
			<pubDate>Fri, 05 Dec 2025 16:50:50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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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설교원고는 
https://gfgc.org/message/ 
있습니다.]]></description>
			<author><![CDATA[gfgc]]></author>
			<pubDate>Fri, 05 Dec 2025 16:20:30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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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GFGC]]></author>
			<pubDate>Fri, 05 Dec 2025 15:42:55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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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장자의 명분

창세기 25:27-34

2025.09.21. 강북꽃동산교회

전에 손을 다쳐서 초음파 검사를 해 본적이 있는데, 참신기했습니다.
초음파 스케너로 다친 손에 대고 모니터를 통해서 보는데 피가 흐르는 것이 보이고 뼈와 뼈 사이 관절이 다 보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끊어진 곳에 상태인데 잘 연결됐습니다. 의사가 제 엄지손가락을 잡더니 살짝 구부렸습니다. 그때 신기한 건 인대가 살 속에서 들어갔다 나왔다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보고 살짝 움직여 보라고 해서 했더니 인대가 고무줄처럼 팔쪽으로 올라갔나가 내려왔다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참 좋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살 속에 감추어진 것까지 다 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임신한 여성분들 아이가 세상으로 나오기 전에 어머니 뱃속에 아이 상태도 미리 볼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천년전 한 여인이 아이를 잉태했는데 배가 너무 이상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창 25:22, 개정)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 25:23, 개정)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라고 했습니다. 쌍둥이라는 것입니다.

4천년 전, 아직 의술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 아기엄마 태속에 두 명의 남자아기를 임신했고 그 아이들이 태 속에서 싸운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분이시고 영이시기에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심지어 생각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머리카락까지 세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중요한 것은 태속에 두 아이가 있는데 싸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그 결과 나중에 큰 자가 어린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들의 탄생과 이들이 세상에 나와서 싸우는 과정을 볼 것이고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될 것입니다.

<b>해산의 기한이 차서 여인이</b><b>(</b><b>사라</b><b>) </b><b>아이를 낳았습니다</b><b>.</b>
한 아이가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데 범상치 않았습니다. 얼굴이 붉고 머리가 시커멋습니다. 우렁찬 울음소리, 팔뚝에 떨이 보글보글했습니다.

이어서 또 한 아이의 모습이 보이는데 손이 먼저 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당황스런 것은 손 때문입니다. 손이 형의 발목을 꼭 잡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얼굴이 먼저인데 얼굴은 안 보이고 손이 보였습니다. 아주 특별한 과정입니다.

부모는 아이들의 이름을 지을 때 이들의 출생과 관련해서 지어 주었습니다.
먼저 나온 아이, 털이 많아서 붉다는 뜻의 이름을 자진 에서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아이는 <b>잡았다는</b> 뜻을 가진 야곱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치고 박고 살았던 아이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는데, 이제부터는 저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엄마에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섬기는 자가 되는지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아도 저들이 자라면서 얼마나 치고 박고 살았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 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어서 추측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27~34절까지의 이야기입니다.

내용을 보니까 야곱이 자기는 차자로 에서의 동생이 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마음속에는 차자에 대한 불만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좋게 생각하면 축복에 대한 열망이 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불만이 많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 야곱을 어떻게 생각하시는 하지요? 우리가 이 야곱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야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계속 따라가 보겠습니다.
야곱이 장성하여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직까지도 장자권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31절 “야곱이 이르되 형에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장성한 지금까지 장자에 대한 명분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장자권을 살 수만 있다면 사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딱 기회가 온 것입니다.
형에서는 날때부터 야성적이라서 밖으로 다니고 사냥을 즐겼습니다. 아버지는 에서가 잡아 온 사냥 고기를 즐겨 먹었습니다.

오늘도 에서는 사냥을 하러 들로 나갔습니다.
이것이 야곱에서 기회가 되었습니다. 꼭 이날을 의도적으로 기다렸다기보다는 어떻게 하나다 보니까 지금이 형에게 장자의 명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될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어머니에게로 달려가서 음식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 대한 특별한 연민이 있었습니다. 28절에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도 야곱에서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둘이 기발한 꾀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올 시간에 맞추어서 음식을 만들고 그 음식 냄새를 풍길 작정을 한 것입니다.

오늘은 에서는 마음먹은 대로 사냥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29, 30절을 보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왔는데 많이 피곤해 보입니다. 32절에는 죽을 만치 힘들어 보였습니다.

때가 왔습니다. 하루 종일 짐승을 쫓아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던 에서가 들에서 돌아왔습니다. 구수한 냄새가 집안을 가득 메웠습니다. 야곱이 의도했던 대로 되었습니다.

에서가 집으로 오더니 어머니 리브가에서 죽 한 그릇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무슨 일입니까? 동생 야곱이 가로막으면서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에 자기의 허락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장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이것은 농담도 장난도 아닌 진심이었습니다. 야곱은 만든 이 그림은 장난이 아닌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형의 장자권을 정말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에게 정식으로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31절입니다.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라는 것입니다. 붉을 것을 줄테니 형의 장자권을 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집에서 상상외에 일이 생겼습니다. 형의 반응입니다. 32절에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장자권이 넘어 갔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거래의 현장을 보고 있습니다.
동생이 형에게 붉은 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의 명분을 샀습니다. 역사적인 일입니다. 형인 에서가 동생이 되고 동생인 야곱에 형이되는 순간입니다. 집안에 서열을 바퀴는 순간입니다.

물론 이 일에 어떤 문서나 공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처럼 인감, 호적등초본이 있는 시대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증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부모들이 들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들은 애들 장난이라고 치부해 버릴 것 뻔합니다. 야곱이 장자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건을 사고 판 것처럼 영수증이나 거래 증명서도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제부터 이 집에 장자입니다.

형이나 부모는 장난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야곱은 이 일에 진지했고, 그것에 인생을 걸고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야곱은 왜 이처럼 장자의 명문에 집착하는 것일까요?
장자의 명분 없으면 못사는 것입니까? 물론 우리는 그 이유를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자의 명문이 에서에게서 야곱에게로 넘어가는 순간 분명히 달라진 것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의 형에게 보게 될 것입니다.
<b>장자의 명분을 동생에게 넘긴 형 에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b><b>? </b>

34절입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이 여김이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에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냥 배고파서 장난으로 해 본 말인지 모르겠으나, 에서에 인생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우수워졌습니다. 그래서 책임감도 없어졌습니다. 무기력해졌습니다. 소망도 없습니다. 기쁨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일이 장자권을 동생에서 넘기고 난 후부터 그랬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요?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장자권을 너가지라고 하기 했지만, 외형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그러는 것입니까?

바로 이 부분이 우리들의 간과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에서가 어떻게 이렇게 무기력해져 가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29~30절을 보면 그는 심히 피곤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성공을 위해서, 육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32절에 “내가 죽게 되었는데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고”고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에서의 인생에 문제가 생기게 시작한 것입니다. 원래 그의 신분은 장자의 신분이었지만, 그것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고 먹고 마시고 사는데 그 장자의 명문이 무엇이 필요하냐는 생각은 자신을 장자로 세우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비신앙적인 행입니다. 하나님의 섬리를 인전하는 않는 행위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지 않음으로 그는 직분은 가볍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장자의 명문을 소유한 야곱의 마음은 어떠한가?

야곱은 형으로서 형이가지는 권한들을 생각하며 행복 해 했습니다. 그것은 에서가 자기에게 형 대접을 안해주고 형이라고 불러주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이거 참 웃긴 일입니다. 야곱 혼자만 자기가 형이라는 것입니다. 형이 한 번도 야곱에게 형이라고 한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도 야곱을 맏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27장 1절입니다. (창 27:1, 개정)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b>맏아들 에서</b>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 혼자만 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동생으로 태어나서 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야곱, 이 사람 왜 그러는 것입니까?
보통 사람들 같으면 둘째로 테어나는 것은 하늘의 뜻으로 믿고 그렇게 순종하고 사는 것이 일반인데 야곱은 생각이 다릅니다. 장자로 태어난 것은 자기의 의도와는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어려서는 몰라서 그렇다 쳐도 지금을 왜 이러는 것입니까? 이것 때문입니다.

1) 장자가 누리는 <b>특권 때문입니다</b><b>.</b>
<b>오늘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b><b>.</b>
<b>그러고 보면 </b>야곱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장자의 특권이 무엇인지 알았던 것입니까? 당연히 세상에 나와서 살면서는 장자가 가지는 특권은 하늘이 내린 특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장자가 되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장자의 특권이 무엇이길래 야곱은 그 특권을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까?
우선 고대 사회에서 장자란! 족장으로서, 아버지의 뒤를 잊게 되고,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게 되고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게 되고, 또한 자손에게 축복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이것은 장자로서 대단한 영예이며, 권한이기도 합니다. 신약 신대에서 장자가 가지는 권한은 예수님을 장자로 표현할 만큼 귀한 것이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특원의 명분입니다. 오늘 성경이 이것을 중요하게 다루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달라지는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귀하여 여기라는 의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구주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자녀는 특권입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b>2) </b><b>신분의 변화입니다</b><b>. </b>
오늘 야곱이 장자의 권한을 산 이야기는 단순히 야곱이 형이 되어서 형을 이기고 형 대접을 받고 형이 누리는 권한과 명예를 누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의 원래의 신분은 축복의 신분이 아니었지만, 그의 신분이 축복의 신분으로 바귀였다는 이야기가 핵심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의 신분에 맞게 그를 보호하시고 축복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야곱은 누구도 자기를 장자로 인정해 주지 않았지만,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받았던 이후로 누구도 알 수 없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장자로서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장자로서 책임감도 생겼습니다. 장자로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조상이 된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 변화되건 벌로 없습니다. 그러나 훗날 야곱은 믿음의 조상에 반열에 당당하게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조상 족장을 말할 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을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이 아무리 의지가 강하고 머리가 좋고 싸움을 잘해도, 하나님의 섬리와 도움이 없이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야곱이 붉은 것을 지불하고 장자권을 산 이후로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장자의 자존감이 생긴 것은 운명이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섬리와 도움심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교훈을 나누고자 하는 것은 야곱은 신분의 전환을 위해 힘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냥 평범하게 살다가 가는 신분에서 축복의 신분자로서, 축복도 받고 후손들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자로 살려고 애썼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그런 삶을 살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족장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현재 우리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그래서 축복된 삶이 보장되어 있습니까? 후손들에게 믿음의 조상으로써 축복을 빌어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장자입니까?

우리 모두 우리의 신분을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세상의 아들로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신분 그대로 살다가 죽는다면 지옥엘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신분의 변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분전환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야곱처럼 무엇을 주고, 돈 주고 사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행이 우리에게는 신분을 바꿀 수 있는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 말입니다.

여러분! 아직까지 하나님의 아들로 신분이 변하지 않은 분 계십니까? 예수를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축복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신분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집니다. 이 세상살 때도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축복받고 잘 살다가 천국에 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직분이 있습니까? 아버지, 어머니, 장남,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여러분에게 이 직분은 어떤 것입니까? 명예 영광 권세 축복, 아니면 부담, 챙피 그래서 숨기며 살고 있습니까? 에서처럼 가볍게 여기시는 일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직분은 크던 작던 하나님이 주신 직분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께 장자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께 장자의 직분을 주시 이유는 그를 세상에 보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직분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직분은 혼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직분은 대상이 있을 때 직분입니다. 예수님의 장자의 직분 대상은 세상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를 우리를 대신 죽게 한 후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에도 대상이 있습니다. 우리 직분의 대상은 좁게는 강북구입니다. 넓게는 온 세상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게 주어진 직분을 귀하여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귀하게 생각하고 여러분이 그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권세적으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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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5 Dec 2025 15:37:28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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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1 Dec 2025 13:10:23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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