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의 왕
롬 5:17-21
20250810 강북꽃동산교회
요즘 세상이 많이 험하지요? 서울 강남에 한 오피스텔에서 모여가 살해된 것은 이별 통보를 받은 박학선이라는 사람의 분을 참지 못해서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이날 박학선은 교제하던 60대 여성 A씨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았습니다. 가족들이 교제를 반대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박학선은 A씨의 딸인 B씨에게 직접 확인하겠다며 이들이 근무하는 사무실로 올라가 B씨를 살해했습니다. 이어서 도망가는 A씨를 쫓아가 살해했습니다. 지난 8일,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박학선에게 1-2심에서 선고한 무기징역 원심판결을 확정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상을 공개했습니다. 어제 어쩌다 보았는데 무섭게 생겼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이런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일도 자주 일어나지요? 자동차가 남의 가계를 뚫고 들어가는 일 말입니다. 본인들은 급 발진이라고 주장을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자동차 잘못 통제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자동차는 달리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조정이 되어야 달릴 수 있습니다. 혼자 스스로는 갈 수 없습니다. 조절 없이는 자동차가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사람은 움직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도 스스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람안에 무엇인가 움직이도록 조정을 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분을 참지 못하는 것은 자기 조절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안에 나를 움직이는 무엇인가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자동차를 생각하면 쉽게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자동차는 달리는 존재입니다. 잘 달리는 자동차는 우수한 자동차입니다. 그가 사고가 나고 그래서 인생이 다치고, 죽었다 하더라도 자동차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죄는 자동차를 운전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동차에게 잘못을 전가 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사람이 남에게 해를 끼치고 죄를 지으면 사람에게 죄가 없는 것입니까? 세상은 사람에게 죄를 묻습니다. 그래서 자동차와 사람을 비유하는 것은 모순이네요.
그런데 우리가 조금만 성경을 알고 인생을 연구해 보면 인생은 자동차와 같은 존재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동차 안에 운전자가 있듯이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존재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왜 그렇게 악한지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사실때문입니다. 그가 나를 조절하는데 그가 나를 잘 못 통제할 때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즉 갈 때 가고 서야 할 때 서야 하는데 반대로 합니다. 참을 때 참아야 하는데 참지 못합니다. 함부로 말하고 던지고 때리고 찌릅니다. 여기서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무엇이 있는 것입니까?
인간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죄의 본성은 어느 시대에 어느 나라나, 어느 문화에도 다 같습니다. 어느 때나 나라에 십계명에서 지적하는 범죄는 늘 있어 왔습니다. 살인, 강도, 도둑질, 성범죄, 패륜, 사기 등, 물론 시대적 상황에 따라 범죄의 형태는 달라져도 그 죄의 본질은 늘 같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볼 때 악한 것이지 악한 사람이 보면 악해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아무리 천사 같은 아기가 세상과 고립된 마을에 태어나서 고이고이 자라도 그에게는 죄의 본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죄를 짓게 되고, 그 마을에도 같은 죄가 창궐할 것입니다. 그도 그 본성에 따라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죄를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언제부터 죄의 본성이 생겼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죄의 본성을 넣으셨는가?
우리는 그 답을 창세기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창 1:31을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일을 좋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와 무관한 상태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인간은 왜 그리고 언제부터 이렇게 죄의 본성을 지니게 된 것일까요? 우리는 그 답을 창세기 3장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창 3:1, 개역)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했습니다.
뱀이 하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하와를 미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하셨느냐”고 하면서 왜곡된 질문을 했습니다. 하와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뱀의 말을 듣고 나더니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께서서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왜곡해서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왜곡입니다.
(창 2:17, 개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하와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뱀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고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게 될까봐 먹지 말라 하신 것이라고 음모론을 펼칩니다. 결국 하와는 이 음모론에 속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고, 아담도 따먹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저지른 일입니다. 개인 일 아닙니까? 개인 죄 아닙니까? 가정일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세상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다시 창세기 3장을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이 부분입니다. (창 3:1, 개역)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창 3:2, 개역)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창 3:4, 개역)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부분은 뱀이 여자에게 왔다는 사실입니다. 즉 행복하게 살던 하와에게 뱀이 왔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뱀이 와서 여자에게 여러 말을 했고 그 과정에서 하와는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있는 여러 일들 중에 그 원인이 같습니다. 이단이 온 것입니다.
권진법사에 온 것입니다. 유혹이 온 것이죠. 저들이 한 개인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런데 그 파장은 온 세상을 떠들석 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일은 개인 일이 아닌 인류의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호주에는 원래 토끼가 없었습니다. 1859년 사냥감으로 24마리의 토끼를 들여온 후 현재는 2억 마리가 넘는 토끼가 호주 전역에 창궐하여 호주 생태계를 유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주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오랜 세월 토끼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효과가 없다고 합니다.
아담이 저지른 이 죄가 그렇습니다. 죄가 없던 이 세계에 시작된 후 죄가 번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온 창조 세계에 이 죄가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죄 때문에 이 세계가 철저하게 유린되고 말았습니다. 나아가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짓밟히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죄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왜 이렇게 악한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릅니다.
신학은 성경을 종합적으로 연구해 다음과 같은 결과를 말했습니다. 어느 한순간에 죄가 시작되었고, 바로 그 죄 때문에 모든 죄가 생겨났고, 이 세상이 죄로 가득 차게 되었고, 창조의 그 원모습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학은 이것을 원죄(Original Sin)라 했습니다. 처음으로 저질러진 죄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든 죄의 뿌리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원죄가 얼마나 심각합니까? 원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는 다음 성경구절이 말씀해 줍니다.
본문 12절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단어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들어오고’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이 세상에는 죄가 없었는데, 어느 날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한 사람이라는 단어입니다. 한 사람을 대표성도 있지만 죄의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단이 한 사람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선물이든 뇌물이든 받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는 주변과 여러 사람이 죄인이 되는 일이 되었습니다.
원죄는 존재론적인 죄입니다.
이 원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치명적으로 훼손시켰기 때문에 존재론적입니다.
창 3:8-1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피해 숨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 숨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 이상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이 원죄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원죄는 인간 자체를 변질시켰습니다.
엡 4:17-19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영이 치명적 손상을 입게 됐다는 것입니다. 즉, 시각장애인처럼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됐고, 청각장애인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됐고, 그리고 촉각을 잃은 사람처럼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 것도 모르게 됐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시 14:2-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영적인 것뿐 아니라 마음과 양심도 치명적 손상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더러워져서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양심도 화인을 맞아서 선을 알면서도 선을 행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선하게 살 마음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원죄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원죄 때문에 사망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죽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원죄로 인하여 죽음이 찾아왔고, 인간을 비롯하여 생명체들이 죽음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원죄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면 왜 우리가 원죄를 말하는가요?
원죄는 아담과 하와가 지었는데, 왜 우리가 그 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까요? 그러나 이것은 오늘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선은 우리도 그 원죄의 영향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원죄가 우리의 존재 자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 51: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자신을 돌아보며 참회하는 말이었습니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악 중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성왕이 되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창조하실 때 그 모습이 아닙니다. 원죄로 치명적 손상을 입은 그 상태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 14:1-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줄도 모르고 당연히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 자체가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됩니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원죄의 치명적인 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죄를 이야기하게 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여기서 은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은혜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분수에 넘치는 호의 또는 친절이다. 그것은 그저 주어지는 선물일 뿐만 아니라 전혀 받을 만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값없는 선물이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고 아무 희망도 없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은혜를 베푸시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요 3: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원죄로 치명적 손상을 입은 세상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대로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만 계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원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게 하셨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괴롭히던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셨습니다. 이 은혜로 원죄 문제를 해결할 길을 여신 것입니다.
본문 2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그동안 죄가 악한 왕처럼 우리를 지배해 왔지만, 이제는 은혜가 선한 왕처럼 우리 지배하면서 우리를 구원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원죄로 손상 받은 인생은 은혜로만이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하나님을 알게 됐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은혜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죄의 역설이 있습니다. 죄를 모르면 은혜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모르면 은혜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죄를 알아야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아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문제는 죄를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죄로 보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죄를 모르는 곳에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인간은 은혜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사는 지금은 더더욱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돌보심이요, 용서와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어린 자녀가 부모의 돌보심이 필요하듯, 인생은 하나님의 돌보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은혜로 표현됩니다. 은혜는 죄를 아는 자에게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죄 이야기 자체를 듣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문제는 은혜를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간동안도 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성결하게 살 것을 다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