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땅 보이지 않는 약속
사도행전 7 : 1~10
2016.07.24.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세상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보이는 것을 주로 인정하고 보이는 것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또한 보이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지금 믿고 구하는 것들에 대한 기도응답이란! 그들이 구하는 것이 눈으로 보는 날 응답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처음 믿게 된 때는 그의 나이 75세 때 였습니다. 그는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노인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생 마지막에 걸어 볼만한 큰 제안을 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해 준다.”는 제안입니다.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이 그를 통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아브라함이 정말 큰 복을 받는 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하루아침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동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잘 믿은 것도 아닌데, 또한 선한 일을 한 것도 없는데, 오히려 아버지 사업을 도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을 도와 우상을 배달하고 설치하는 일을 했는데, 믿음의 조상이라니, 큰 복이라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에게 오셔서 이렇게 큰 약속을 해 주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늘 말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야 하고, 하나님이 인도하는 땅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큰 복을 받는다는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아내 사래와 함께 그곳에서 얻은 소유와 사람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도하는 땅으로 갔습니다.
정말 큰 결단을 한 것입니다.
75세나 되고 이제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조심하며 즐기며 살아야 할 나이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땅으로 떠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조건이 있다면 바로 이것 하나입니다. 더 이상도 필요도 없습니다. 즉,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을 가지고 오셨고, 그는 그것을 아멘으로 받아드렸습니다. 이것이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는 조건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기독교의 구원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셔서 행복과 천국을 약속을 주시고, 죄의 자리를 떠나라고 할 때, 그냥 아멘하고 떠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우리 인간의 머리로 이해 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만 믿고 떠났는데, 그가 간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이 인도함을 받고 간 땅인데, 흉년이 들다니 이것을 어떻게, 무슨 믿음으로 받아 드려야 합니다.
혹시 아브라함이 잘 못 듣고 간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그가 정말 하나님의 응성을 제대로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갔는데 그런 일이 생긴다면 과연 이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기쁜 소식” 복음이 될까요?
보통의 경우 원망거리가 아닐 까요?
그런데 우리는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는 과정에서도 동일한 일을 본바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을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의 말만 믿고 400년 이상 살던 애굽땅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들이 간곳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물 한 목음 먹을 것 없는 황량한 사막이었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분명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 갔는데 광야라니 이것이 어찌 축복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상황이나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이것이 어떻게 복음이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라 나서면 모두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이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를 믿기로 작장한 모든 사람들의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복음서에는 우리가 이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한 예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7:13-14절의 교훈입니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이 말씀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 가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부르심 자체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시면서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의 의미를 다음 과 같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좁은 분으로 들어가는 것이 생명의 길로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자체가 너무 작아서 사람들이 잘 안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넓은 문은 넓어서 들어가는 가자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멸망의 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좁은 문과 좁은 길, 넓은 문과 넓은 길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좁은 길을 가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넓은 길로 간다는 것이요?
그런데 오늘 주님은 우리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 갈 것을 권하고 계십니다. 사실 주님의 주천하는 좁은 문은 이 세상의 민주주의 정신과 다수결의 정신에서 맞지 않습니다. 세상은 많은 사람들은 다수를 따라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고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이 권하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생명으로 가는 길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렇데 볼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의 번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것은 좀은 문은 문으로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일어나는 기근과 여러 가지 일은 좁은 길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순간은 좁은 문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좁은 길이 있는 것입니다.
훗날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실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이 바로 좁은 길의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좁을 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오셔서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을 권하셨는데, 우리는 아멘하고 그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좁고 협착하고 불편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온 결과 좁을 길을 가는 중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구속도 많고, 참아야 하는 것도 많습니다. 정욕을 죽여야 하는 때도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문으로 들어오면 생명으로 가는 길인 줄 믿습니다.
마 7장 14절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그러나 이곳에 참 행복이 있는데 이 행복은 세상에 얻을 수 없는 행복이 줄 믿고 감사하고 승리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만 믿고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들어가라는 곳으로 들어갔는데 축복은 언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벌써 고향을 떠난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났습니다. 좁은 길도 이런 좁은 길은 없습니다. 전혀 하나님의 축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25년이 되던 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하나를 덜렁 주십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장가를 가기도 전에 사랑하는 아내 사라는 가나안땅에서 먼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죽은 아내를 장래 하는 과정 속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아내를 장사 지낼 땅이 한 평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다가 땅을 사러 갔습니다. 그 사실에 대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창 23:3-4, 개정)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그래서 아브라함은 25년 만에 은 400세겔을 주고 처음 땅을 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 130년을 살면서 땅 한 평도 없이 살다가 애내의 묻을 곳을 위해 지금 땅 몇 평사는 아브라함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믿음조상은 땅도 많고, 건물도 많고, 돈도 많아 종들도 많아야 본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에게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복이다.”라고 생각하는 무엇이 있습니까?
100살에 얻은 아들이삭입니까? 137세에 산 40세겔짜리 땅입니까? 아무리 보아도 믿음의 조상이 받은 복이라곤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혹이 아브라함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과거에 에녹이 300년을 살고 무두셀라가 900년 이상을 산 것을 기대하고 이제부터 줄줄이 아들을 낳고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아내 사래의 죽음은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스데반은 본문에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절입니다. (행 7:5, 개정)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보이는 땅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발붙일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오늘 우리의 이 모든 설교를 이해하는 말을 했습니다.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주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발붙일만한 땅한 평도 주시지 않았지만 그의 후손에게 주신다는 약속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축복의 말씀은 땅이 나니라 약속이었습니다. 이제 문제는 이 말씀을 적용해 하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물진 만능 시대를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과연 이 말씀이 어떻게 은혜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모두는 약속이 아니라 땅을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보이는 땅, 땅을 살 수 있는 돈, 집을 지을 수 있는 땅, 그것도 내 대에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내가 복ㄹ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다음과 가팅 표현하고 있습니다.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천년이지만 주님께는 하루의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를 예를 들어 말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부르시고 상용하시는 개념은 내 대에 땅을 사고 교회를 짓고 수 천명의 교인들을 전도하는 것만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한국교회는 그동안 그렇게 생각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대로 생각하고 그것을 축복으로 알고 그런 보이는 것이 없으면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 결과 다음세대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하나의 축복은 땅이 아니라 약속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약속이 내 대에 이루어 질 수도 있지만 다음세대, 그 다음세대에 이루워 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의 약속은 언제 이루워 졌습니까?
오늘 스데반은 다음과 같이 설교를 했습니다.
7장 17절입니다. (행 7:17, 개정)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하나님은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잊지 않으셨고 그것들이 때가 되자 이루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번성으로 이뤄졌습니다. 이스라엘을 강력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민족을 통해서 이 땅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 우리교회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고 좁은 문으로 들어간 우리들이 좁고 협착한 길을 잘 가기를 바라고 응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위에 굳게 서서 진리를 지키고 오오 고는 사람에게 진리의 등불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보이는 땅만을 구하고 바라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귀하게 생각하야 할 것입니다. 보이지 약속은 보이는 땅보다 상위 축복입니다. 사랑, 비젼 열심 이것들은 보이는 것들이 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약속을 귀하여 여기시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땅에 주의 나라가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