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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원고

섬김의 비밀 | 마가복음 10:44-45

Author
gfgc
Date
2025-07-05 15:37
Views
50
섬김의 비밀

막 10:35-45(44-45)

20250629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주님의 사역 말기인 어느 날 두명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이런 청을 했습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주옵소서.”(37절)라고 말입니다.

야고보와 요한 왜 이러는 것입니까?

저들에게 어떤 느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영광중에 메시아로 등극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들을 특별히 우대해달라는 청을 드린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는 우의정 또 하나는 좌의정이 되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직분의 근거는 부르심에 있습니다. 부르심이 없는 직분은 없습니다. 직분은 지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주님의 나라에서 우의정 좌의정으로 써 달라는 요구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상황 판단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청하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죽임을 당할 것이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지금은 닥쳐올 고난을 대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고난 당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도 영광중에 메시아로 등극하실 것이라고 상황을 오판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공동체의 갈등을 야기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4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다른 열 제자가 이런 청을 듣고 화를 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지난 3년 동안 함께 고생을 했는데 자기들만 특별대우를 해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칫 공동체의 갈등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저 제자들의 간청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제자들의 행동이 조금 모자라 보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을 특별하게 써 달라는 제자들이 생각이 그냥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어떻게 주님께 그런 요구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저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저들을 연구해 보았더니 그러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음 성경이 이를 말해주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라고 했고, (막 9: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어부로서 형제입니다. 주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았고 특별한 사람을 받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셋을 데리고 챙기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자기들이 가장 먼저 제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고, 특히 예수님께서 가장 가까이 하셨던 세 제자 중의 두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자기들이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든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남다른 열정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며 남다른 훈련을 받았습니다. 참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저들의 지난 3년의 삶과 지금 저들의 말과는 왠지 매치가 안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아직도 그 사람 깊은 곳에는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한 마디로 저들은 자기중심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욕망을 어떻게 떠나보내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의 말씀에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38절을 보면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 두 사람이 몰라서 그런 것을 요청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엄마가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날이 선 칼로 식재료를 썰고 있습니다. 네 살짜리 꼬마가 자기도 해보겠다고 엄마에게 그 칼을 달라고 합니다. 엄마가 안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그 칼을 달라고 울고불고 떼를 씁니다. 엄마는 지금 이 녀석이 몰라서 그 칼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 두 제자를 보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고난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은 예수님만의 고난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도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밀려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리 욕심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가 주님께 구하는 것을 제대로 알고 구하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보실 때 우리가 구하는 것이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주님께서 보실 때 우리가 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쓸데없는 것이거나 오히려 우리를 망치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를 차분히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어떻게 보실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정말 우리를 위하는 것인지, 아니면 혹시 우리를 망치게 하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이어서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되물으셨습니다.
38절을 보면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먼저 주님께서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마시는 잔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때 잔이란 바로 십자가의 고난을 말합니다. 겟세마네의 기도 직후 체포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셨는데, 이것을 상징적으로 ‘잔’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께서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받는 세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롬 6: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 말씀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례는 바로 죽으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받은 세례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 대속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제자들 앞에는 고난의 잔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해야 할 세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축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주를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영광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에 참여해야 할 사람들이 모두가 부러워할 삶을 살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앞에 놓인 고난의 잔을 외면하고 축배만을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를 위해 고난을 겪으려 하지 않고 자신을 위한 축복만을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생각을 하지 않고 죄악 된 세상에서 잘 살 생각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준엄한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내가 받을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과 제자들에게 결론적으로 주신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43-44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입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들어볼 수 없는, 그리고 눈으로 그 예를 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원리입니다.

우선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여기서 크고자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간단히 말하면 공동체 안에서 존경받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앞에서 질문한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누구라도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기왕이면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합니다. 엑스트라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원리의 핵심은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려는 사람이 존경받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 한인 2세가 명문 컬럼비아대 의과대학에 지원했습니다. 공부도 잘해서 SAT 시험에 만점을 받았습니다. 집안 형편도 부유해서 무난히 합격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불합격 통지서가 날라왔습니다. 불합격 사유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귀하의 성적은 아주 우수합니다. 가정형편이나 여러 조건들도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 귀하의 서류 어디를 보아도 헌혈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 헌혈한 경험도 없는 귀하가 어떻게 환자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귀하는 의사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제도와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공부만 잘하면 의대에 입학이 가능하고, 학업 뒷바라지할 재력도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학교는 남을 위해 헌혈을 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집안이 좋아도 의사가 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고자 힘쓰고 또 클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면 크게 되는 것이 세상나라 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릅니다. 남을 섬기는 사람이라야 크게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섬김의 삶에 비밀 있습니다. 섬김에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남의 필요를 생각하고, 그 필요를 채워주려 힘쓰시기 바랍니다. 나보다 공동체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를 크게 세우실 것입니다.

다음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여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은 최고가 되려고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디에서나 1등이 되고, 어떤 자리에서나 가장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라도 으뜸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운동경기에서 1위를 하고 싶어합니다. 학교에서 1등을 하고 싶어합니다. 일터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면서 욕망이 과해서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1등 하지 못한 사람들을 루저라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종은 원문의 ‘둘로스’(δοῦλος)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둘로스는 주인의 뜻을 따르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뜻을 주장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필요와 요구를 이루어주기 위해 힘쓰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으뜸이 되기 위해 힘써서 으뜸이 된 사람이 으뜸으로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누리며 사는 것이 성공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우선 으뜸이 되려고 힘쓰지 않고 자신을 낮추려 힘쓰는 것, 그러면서 하나님의 섭리로 으뜸이 되더라도 자기 권리를 주장하거나 누리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고 도움을 주려는 것이 성공의 원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주님이 저들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불렀을 때 두말없이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주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저들을 특별한 자리에 참여시킨것도 저들의 결단을 위하게 보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결과 야고보와 요한은 훗날에는 볼 수 있는 모세와 엘리야도 만났던 특별한 체험을 한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무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새로운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남을 무시하고 자기들이 으뜸이 된다고 생각하고 주님께 무례한 요구를 다 했습니다. 저들을 분석해 보았더니 저들의 마음에 아직 육신의 욕망이 아직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면 저들의 욕망은 무엇으로 어떻게 다스릴 수 있습니까?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입니다.

섬김에는 비밀이 있었습니다. 섬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섬기면 욕망이 일어서지 못합니다. 인간이신 예수께서 죽으시는 그날까지 사명을 감당하실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이 세상에 온 목적 자체가 섬기려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섬김의 길을 묵묵히 따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적용~

겉보기에는 모순되거나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깊은 진실이나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을 역설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유치환의 깃발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 소크라테스의 역설중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말로,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는 것이 진정한 지식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특징은 상식과 반대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진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많은 부분이 역설적입니다.

마 23:12를 보면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높아지고, 낮추는 자는 낮아지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설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마 16:25를 보면“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구원하려면 잃고, 잃으려고 하면 찾는다는 것은 세상 이치로는 모순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침은 왜 사람들에게 이렇게 역설처럼 보일까요? 관점의 차이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관점에서 말씀하신 것인데, 사람들은 세상 나라의 관점에서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낯섭니다. 그리고 받아들이기가 정말 힘듭니다. 특별하게 그 가르침의 깊은 뜻을 깨닫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대로 살려는 사람은 정말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역설의 진리에는 큰 능력이 있습니다. 특히 주님의 말씀에는 욕망을 억제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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