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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원고

귀있는 자는 들으라

Author
gfgc
Date
2025-06-01 21:05
Views
55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태복음 13:1~9

2025.5.18.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말합니다.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 것은 5월이 계절 중에 가장 좋은 계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도 하지요. 5월을 가정의 달로 정한 것은 5월의 푸르름 만큼 가정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력을 보면 5월 중에 가정에 관한 날들을 모두 배치했습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근로자의 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성년의 날 또 있습니까?

5월은 농부들에게도 중요한 달 이지요. 일 년에 중요한 농사를 5월 중에 다 하거든요.
성경에는 특히 예수님이 들려주신 말씀 가운데 가정과 농사에 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왜 주님은 가정과 농사에 관한 말씀을 많이 하셨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심고 거두는 진리의 법칙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농사에서 씨를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렸습니다. 그 씨는 농부가 의도하는 곳에만 뿌려지지 않고 어떤 씨는 길에도 떨어지고, 어떤 씨는 돌밭에도 떨어지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 속에도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사에 덜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진 씨는 해가 나니까 말라 버렸고, 가시떨기 속으로 떨어진 씨는 싹이 나서 자라긴 했지만, 가시 때문에 더 이상 자라지 못하여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좋은 땅에 떨어진 씨에서만 30배, 어떤 것은 60배, 어떤 것은 100의 결실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들려주신 설교의 전부였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귀 있는 자들은 들으세요’라고 하시면서 설교를 마치셨습니다. 설교를 하시면서 어떤 예화나 부연 설명도 없으셨습니다. 무슨 뜻인지 논리적 근거나 적용도 말씀하시지고 마치셨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설교를 잘 이해하셨습니까? 은혜가 넘쳤습니까? 어떤 감동을 받으셨습니까?

물론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이 무슨 의도로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이런 비유를 해 주시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 왜 이 비유를 해 주셨을까요? 주님이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시고 싶으신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주님이 들여 주신 이 비유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주님이 이 이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분문을 관찰 해 보겠습니다.

1절을 보면, 그날 주님은 바닷가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바닷가에 많은 무리들이 모였습니다. 주님께서 설교를 하셨는데, 오늘 씨 뿌리는 비유 말고도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백합화를 보라, 어떤 사람이 빛을 졌는데, 어떤 사람이 잔치를 할새,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일꾼을 구하러 나가서,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났는데… 등” 의 비유로 이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럴 때 제자들이 조용한 시간에 주님께 나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어찌하여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13절에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14절에서는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15절에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16절에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절에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 하였느니라” 18절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또 무슨 말씀입니까?
한마디로 주님 말씀의 뜻은 주님의 설교는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것이 복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주님의 설교를 얼마나 잘 이해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주님 말씀에서 주의 의도를 아는 것입니다. 내용은 알겠습니다. 씨뿌리는 이야기입니다.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의도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안탑갑게도 오늘 주님 앞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주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있지만,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본문에는 주님의 의도를 잘 알 수 있는 핵심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9절의 말씀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이라”는 이 말씀입니다.

말씀을 잘 풀어가기 위해서는 핵심 단어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을 전하시는 현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저들 중에 귀 없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혹 귀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귀가 있어도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그들은 물리적으로 귀에 장애가 있거나 문제가 있어서 사람이나 사물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리적으로 정상적인 귀를 가지고 있지만, 그래서 현장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은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그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 길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신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이 말씀은 의미가 있고, 주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의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우리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일까?

저는 11절에서 중요한 단어를 발견했습니다. 허락이라는 단어입니다.
즉,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을 우리에게 허락되었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것은 허락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의 말씀을 읽고 듣고 잘 이해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허락이 안 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11절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인용하신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에도 있습니다. 15절이지요 “그들이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천국의 비밀을 저들이 알까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누구일까요? 15절 “마음이 완악한자”입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의 단어들을 관찰 해 보면서 주님이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하신 의도를 조금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들으라, 깨닫지 못함이라, 마음이 완악하여라는 단어들인데 종합해 보면 주님이 오늘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즉, 주님이 우리에게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 실제 농사가 아니라 농사짓는 일을 통해 우리 마음에 어떻게 열매가 있는지를 말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마음에는 이런 것들이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땅, 씨앗, 농부 말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영적인 농사에 적용하신 것입니다.
즉,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땅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농부는 예수님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열매란 구원의 결실을 말합니다.

주님은 이런 마음의 설정을 하시고 복음을 씨로, 사람의 마음을 땅으로 생각하시고 말씀의 씨앗을 뿌리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심으시는 말씀은 변할 수 없는 사실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복음의 말씀은 어린이에게는 다르고 그래서 가공하여 심어야 하고, 지식인들에게는 고상한 단어로 바꾸어 심어야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씨는 씨라는 사실입니다.

속담에 콩심은데 콩나고, 팟심은데 팟 나듯이 복음을 심은데 복음이 나는 것입니다. 누구도 콩을 팥으로 만들어 심을 수 없습니다. 땅이 작다고 콩을 잘라서 심을 수 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심어야 합니다. 물론 요즘은 씨앗을 싹을 내서 심기도 합니다. 이것을 설교에 적용하면 예화나 시청각 자료 재미 등등을 이야기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씨는 씨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밭입니다.
열매를 내고 안 내고의 문제는 밭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복음이 심길 마음의 밭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에는 네 가지 마음의 밭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길가와 같은 밭, 돌밭 가시밭, 좋은 땅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결론을 알지만, 열매는 좋은 땅 외에 하나도 없었습니다.
길이 아무리 넓어도, 돌밭이 마무리 커도, 가시밭이 아무리 많아도, 그곳에서는 어떤 열매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열매를 내지도 못하는 땅들을 왜 이야기하시는 것입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열매를 내지도 못하는 땅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까? 주님의 의도가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를 내지 못하는 땅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길가와 같은 땅입니다. 4절
길가에 덜어진 씨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4절입니다. 새들에게 발각되어 저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길가는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열매를 얻기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은 아무리 좋은 천국의 씨앗을 심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악한자가 와서 그 뿌린 것을 빼앗아 갔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다는 것입니까? 19절이지요. “천국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한 자”라고 말입니다.

문제는 깨닫지를 못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저들은 왜 깨닫지 못할까요? 말씀이 어려워서일까요? 아닙니다. 농사 이야기, 고기잡는 이야기, 그 어떤 쉬운 말로 이야기를 해도 저들은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요 며칠전에 있었습니다.
노회 끝나고 목사님들과 잠시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목회 현장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모두가 공감하며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목사님만 웃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너무 웃으니까 무슨 일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 데이블에서 함께이야기를 했는데, 무슨 일이냐니요? 자기는 딴 생각을 하느냐고 한마디도 못 들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비유를 통해서 이 땅에는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도 복음의 씨앗을 뿌려질 수 있으나 열매를 맺기가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말씀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세상에 악한 것들에 의해서 빼앗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그런 사람 안 계십니까?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땅을 고쳐야 합니다. 우선 그 땅에 다른 것이 밝지 못하도록 줄을 쳐 놓아야 합니다. 땅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회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쉬울까요? 그래서 성령의 은혜가 임하도록 구하고 기도하고 섬기는 일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음은 돌밭과 같은 땅입니다. 5
돌밭은 돌이 많은 땅입니다. 흙이 있기는 한데, 돌이 많이 있는 땅이지요. 씨는 흙에서 자랍니다. 그래서 돌밭이라도 흙이 있기 때문에 싹이 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돌 때문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해 해가 나면 견디지 못하고 말라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결국 돌밭에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데, 주님은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21절입니다. 말씀을 받을 때는 기쁨으로 받지만, 말씀으로 인해 환란이나 박해가 오면 곧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씨가 돌밭에서 싹이 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돌밭과 같은 사람들 마음에서도 싹이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는 것입니까? 다시 21절입니다. “뿌리가 없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이는 영접과 결단에 문제입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마음에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못한 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분 안 계십니까? 이런 분은 어떻게 해야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마음의 땅에 돌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돌을 골라내야 할 합니다.

그것도 기도와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주인으로 영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는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와 함께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돌을 제거해 주시고 말씀의 씨앗이 자라게 하는 옥토를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다음은 가시와 같은 땅입니다.
가시 떨기속에도 씨가 자라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키가 자라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시가 기운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여기서도 열매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마음의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이해도하고 기쁘게 받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꽤 괜찮은 신앙인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무엇인 문제입니까? 22절입니다. 세상에 염려와 재물의 유혹(모두 가시죠)에 말씀이 막혀서 결시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마음의 땅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어떻게 해야 좋은 결실을 할 수 있을까요? 가시가 문제이기 때문에 가시를 걷어 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힘으로 마음에 있는 가지를 거둬낼 수 있을까요?

이는 성령 충만으로 가능합니다. 불같은 성령은 마음의 가지를 태우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좋은 땅입니다.

23절에 보면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씨가 떨어지면 적어도 30배 많게는 100배의 결실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좋은 땅이란! 신앙의 열매를 맺는 좋은 마음의 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좋은 땅이 되었습니까?
23절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 비유에서 좋은 땅이란!
돌이 없고, 가시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 아니라, 씨앗이 잘 자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말씀을 듣고 깨닫기 때문에 좋은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쁜 땅이란! 돌이 있고, 가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 때문에 씨앗이 자라 수 없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씨앗이 잘 수 있도록 돌이 치워지고 가시가 거둬지면 그 땅은 언제든지 좋은 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길가와 같이 딱딱한 땅을 돌밭, 가시밭과 같은 인생의 마음이 밭은 말씀이 뿌려지면, 고쳐질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단 깨달을 때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말씀은 나뿐 땅을 좋은 땅에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무엇인데 가능한 것입니까?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사랑하는 성도 여려분!

우리 마음은 원래 길가와 같이 딱딱했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복음 뿐아니라 좋은 것을 잘 간수자히 못하고 마귀에서 빼앗기기 일수 였습니다. 원래 우리의 마음은 수순하지 못하고 모난 돌이 투성이였습니다. 그래서 좋은 것을 받아도 오래 유지 하지 못하고 금새실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의 말씀이 뿌려지기 시작하더니 좋은 땅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이 보내신 영적인 농부가 있습니다. 저들은 신학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심는 주의 종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의 밭을 기경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완악한 마음을 기경해 주십니다. 그리고 씨가 뿌려지면 은혜의 단비를 내려 주시고 따스한 햇볏으로 비춰 주셔 싹이나고 자라고 열매 맺게 하십니다. 이 은혜로 2025년 여러분들에게 많은 열매가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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