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집으로 영접한 사람
눅 19:1-10
2025.05.25. 강북꽃동산교회
직장인 10명 중 1명이 “왕따 경험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학창 시절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왕따 문화가 최근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왕따 문제의 결과를 알고 있지만, 직장 내 왕따는 퇴사로 이어지는 등 개인, 가정, 경제, 사회에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어 주의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왕따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꽤나 잘 나가는 부자로 알려졌는데, 사람들을 안 만났고, 집안에 칩거 중인지가 오래됐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아저씨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왕따를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체적인 약점이나 성격에 특별함이 있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살펴보았더니 이런 것이 보였습니다. 3절입니다. ‘키가 작고’라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키가 작은 것이 왕따가 될 만한 주원인으로 볼 만한 증거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2절에서 다음과 같는 구절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눅 19:2, 개정)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라는 구절입니다. 돈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돌림을 당했다는 어떤 구절도 없지만, 이 구절은 오늘 말씀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당시 유대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자기들이 점령한 나라 도시마다 세관을 두고 인두세와 지세를 징수했습니다. 로마는 그 세금을 효과적으로 거두어들이기 위해 그 지방에서 유대인을 발탁해 정해진 세금을 거둬 로마에 바치게 했습니다. 대신 통행세는 지방에 세리장이 챙기도록 했습니다. 이때 삭개오는 여리고 지방의 세리장이었습니다. 부를 축적하기에 좋은 조건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삭개오를 소개할 때 “세리 장이요. 또 한 부자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삭개오가 왕따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세금의 일부가 삭개오의 주머니로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리고 사람들은 삭개오를 싫어했고 삭개오를 매국노 적의 앞잡이라고 미워하고 왕따 시켰습니다. 당시에 모든 세리들은 같은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의 수근거리는 소리, 따가운 눈총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누가의 말대로 삭개오는 부자입니다.
그래서 넓은 주택에서 먹고 싶은 것 먹고 하고 싶은 다 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주변에 누구도 그를 사람대접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고독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입니까? 왜요?
어느 날 그에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기피 하며 숨어 살다시피 했던 그가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한 날은 견딜 수 없어 사람들 속으로 들어 갔습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입니까?
이유가 1절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라는 예수의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물론 그가 들은 소문은 그와 직접적 관계는 없습니다. 즉 예수께서 그리고 지나가시면서 삭개오의 집에 들리신다든가 삭개오를 만난다든가 하는 어떤 약속도 없습니다. 그가 들은 이야기는 다만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신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삭개오의 마음을 뛰게 한다는 것입니까?
이게 뭘까요? 여러분은 이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이런 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습니다. 내과에 갔습니다. 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찾아간 곳은 신경정신과입니다. 배가 아픈 날짜를 추론해 보았더니 사촌이 땅을 샀다는 날부터였습니다. 속담에 사촌이 당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것이 있습니다. 소문이 사람들의 마음을 뛰게 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그 귀에 들이는 소리에 따라 변화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귀에 전쟁의 소문이 들리면 그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평화의 소문이 들리면 행복한 것입니다.
늘 외톨이로 살던 삭개오의 마음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다름 아인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때부터였습니다. 예수의 소문은 기쁜 소식의 주체에게서 나오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소문은 삭개오의 마음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어떤 면에서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은혜에 능력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변화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삭개오는 일직이 불의한 돈에 손을 댓습니다. 신체적으로 컴플럭스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 인정받기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늘 죄인의 심정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사람이 스스로 사람들에게 나와서 교제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삭개오는 은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의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은혜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다고 예수의 소문을 들은 것으로 인생의 죄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도 예수의 소분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세상에 어떤 소문과도 다른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말입니다.
오늘 삭개오는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주님의 소문은 봄날에 햇빚과도 같습니다. 차가운 봄날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면 사방에서 잠들었던 모든 생물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햇빛 되시는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잠시 지나가시기만 해도 죄와 편견과 오해와 따 돌림으로 움크러져 있던 겨울 같은 땅에 봄기운이 돈 것입니다.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디서 모였는지 예수님은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습니다. 그렇게 소외된 삭개오도 나간 것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 인생에 죄 문제와 구원의 문제와 행복의 문제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일차적인 일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삭개오를 비롯한 죄인들이 사는 곳으로 찾아오신 일입니다. 우린 이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찾아오신 일은 우리 기독교에 가장 중요한 교리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죄인이 신을 찾지만, 우리 기독교는 신(하나님)이 죄인 사람을 찾아오시는 종교입니다. 그 옛날 아담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도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도 하나님이 먼저 가인을 찾아오셨습니다. 인류가 죄에 빠져 지옥으로 가게 될 때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들에게 오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그분이 먼저 나에게로 오셔서 용기를 주셨고 죄를 깨닫게 해주셔서 회개하게 하셨고 예수를 구주로 믿도록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세상을 승리하며 살 수 있는 것도, 주님 재림하실 때 영접할 수 있고 천국에 가게 되는 일도 그분이 도와주셔서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여리고에 들어서시자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그중에도 주최할 수 없을 정도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 바로 삭개오에게라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에 들어오셨다는 말을 듣는 순간 자리를 벅차고 박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적중에 기적입니다.
병이 났고, 귀신이 나가는 것만이 꼭 기적이 아니라, 왕따가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훗날 구원받은 내 입장에서 보면 내가 예수 앞에 달려와서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한일, 이것이 기적중에 기적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나 우리가 영혼에 햇빛 통해 주 앞에 나왔다고 해서 인생의 문제가 다 해결되고 왕따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삭개오는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앞에 나왔지만, 예수님을 볼 수도 만날 수도 부를 수도 없습니다. 신체적으로 키가 작으니 볼 수가 없고, 사람이 많아서 볼 수가 없고, 보도록 누가 도와주지 않아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아저씨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예수님은 그냥 지나가고 마시는 것입니까? 그래서 삭개오는 다시 왕따의 삶을 살고 사람을 기피하고 숨어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다시 삭개오를 좀 더 관찰 해 보겠습니다.
어느새 삭개오는 관중 속으로 들어갔고, 사람들 사이를 비비고 다녔습니다. 예수님을 뵈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리속에서 나왔습니다. 포기하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동선을 파악했고 그것에 있는 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성경은 그런 사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했습니다.
4절입니다.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돌무화가 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삭개오의 또 다른 열정을 보고 있습니다.
물론 그 열정은 자신이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의 귀에 우연히 들린 예수의 소문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은혜받은 삭개오는 주님이 주시는 뜨거운 가슴과 열정으로 억누르지 않고 멀리 숨어 버리지 않고 영혼의 햇빛 되시는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갔습니다. 그러자 그는 더 주최할 수 없는 열정과 지혜로 주님이 꼭 지나가실만한 길목에 한 나무위로 올라가는데 성공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대단한 열정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보면 하나님의 은혜의 줄에 끌려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삭개오 이야기를 수 십번 들어 왔습니다. 오늘도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왜 삭개오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했으며 교회는 왜 자주 삭개오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그것은 삭개오 이야기 속에 인생이 주님을 만나 구원받는 진리가 가장 쉽게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강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마실 수 있습니다. 그 은혜는 사람들은 몸을 주체할 수 없는 정도로 강력해서 한 번쯤은 교회에 나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교회에 정착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다는 이유로, 키가 작아 예수를 볼 수 없다는 이유로, 거기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맘에 안 든다는 이유로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냥 포기한 상태입니다.
흔히 학자들은 인생이 성공할 기회가 세 번 있다고 하는데 그 기회 중에 두 번 이상은 하나님이 그에게 오신 일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회를 어떻게 했느냐입니다. 삭개오처럼 주님께로 가까이 나갔느냐 아니면 여러 이유로 멀리 갔느냐입니다.
오늘 본문에 삭개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 아무리 큰 은혜가 왔다하더라고 무시하고 멀리 가버리면 다시 주 앞이 나오기 힘들 것입니다. 힘 자체를 잃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빛을 받고 주 앞에 가까이 나가면 계속 갈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지금 삭개오는 예수님이 소문으로 주신 은혜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곳까지 거부하지 않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목, 그것도 나무 위에 올라와 있는 상태입니다. 다른 변수만 없다면 오늘 삭개오는 예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삭개오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선용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삭개오는 예수님을 꼭 봐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키가 작아서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을 뵐 수 없는데 어디쯤 계시는지 알았으면 됐지 꼭 얼굴을 뵈야하고 눈과 눈을 마주쳐야 하는 건가요? 이 정도 했으면 잘한거 아닙니까? 교회로 말하면 주일 출석한 거 아닙니까? 나머지는 이제 주님께서 축복으로 인도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세무서장 쯤되어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꼭 나무 위로 올라가냐 하느냐 말입니다. 잘못하다가 미끄러지거나 떨어져 다니면 어떻게 하려고 말입니다. 도대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하시려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삭개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목 나무위에 올라가 있고, 위에서 예수님을 내려다보았다고 해서 그가 구원을 받았고 예수님의 친구가 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삭개오가 나무 위로 올라간 사실을 아주 크게 보도하고 우리에게는 박수를 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요즘 교회에 예수님을 몰래 보고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냥 멀리서 예배도 보고, 예수님도 보고, 목사님도 보고, 성도들을 살펴보고 그냥 가는 분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분들이 다 구원을 받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왜 일까요? 우리 기독교의 특징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특징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의 대상자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 똑같은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주 앞와 나와서 주님이 나를 기억하도록 해야 하고 주님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오늘 본문은 그런 과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주님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이 나를 아셔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나무에 올라가든 소리를 지르던 예수님께 자신의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도와 주셔야 하겠지요 (중풍병자)
여기에 우리 기독교의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진리는 내가 주님을 보고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모습을 주님께 보여 드리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모습을 예수님께 보여 드릴 수 있을까요?
5절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눅 19:5, 개정)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개인적으로 만나주시겠다는 극적인 장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삭개오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주님의 제안일 뿐입니다. 이제 선택은 삭개오에게 달려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영접을 하든지 아니면 됐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냥 멀리서 예수님을 본 것으로 만족하고 헤어질 수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영접의 종교입니다. 그냥 내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친하게 지내는 것과 영접은 같지 않습니다. 영접은 내 집으로 마음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기독교의 구원은 반드시 영접을 통해서만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영접해야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영접의 종교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마 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 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삭개오는 예수님 제안에 어떻게 했습니까? 6절입니다. (눅 19:6, 개정)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아직 주님과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집안을 정리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하려면 집안을 청소해야 합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가서 제일 먼저 죄를 청소했습니다.
(눅 19:8, 개정)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우리는 이것을 한마디로 삭개오의 회개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을 회개라고 보는 것은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라는 구절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그런 일에 대해서 지금 회개하고 있습니다. 뉘게서 불의로 착취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값고, 생각나지 않는 것에 대해선 공탁 즉,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구원은 어디까지 왔습니까?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9절입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성도 여러분! 삭개오는 오늘 처음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짧은 시간에 그게 가능한가요? 하지만 그에게는 구원받는데 필요한 모든 여정이 다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들어오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삭개오의 마음은 요동쳤고, 삭개오는 그 마음을 억누르거나 피하지 아니하고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왔더니 예수님이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집에 유하시기를 원하셨고 삭개오는 기꺼이 주님을 집으로 모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주님을 집으로 모시는 과정에서 핍박과 모욕이 있었지만, 주님의 불가 학력적인 은혜로 주님을 집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집으로 모시게 되자, 그는 주앞에 자신이 말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즉석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를 구원자로 선포했습니다.
적용
성도 여러분! 구원은 주님이 내게 오심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오시면 마음에 감동이 일어납니다. 그 감동을 무시하지 않고 주님께 가까이 나오면 주님은 우리에게로 들어오시길 원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허락만 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들오셔서 죄를 회개할 수 있도록 강력한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회개하면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포하고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구원을 받으신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구원에는 분명한 과정이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구원의 여정이 있습니다. 그냥 어떤 사람이 아무런 과정 없이 천국에 갈 수는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반드시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를 영접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의 선포가 있어야 합니다.
삭개오가 그랬드시 우리 주변에는 주님의 은혜로 인해 예수님은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삭개오 주변에는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도록 돕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먼저 왔다고 그가 예수를 만나는데 가로막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려고 할 때 죄인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결단
하나님이 일하시는 구원 사역은 분명합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먼저 믿은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구원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변에 구원받을 만한 사람이 있는지 먼저 관심을 갖고 그가 예수님께 잘 나오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은 만나서 집으로 영접한 것처럼, 예수를 만나고 나의 마음의 집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