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받으라 | 사도행전 2:37-42

gfgc gfgc
작성일 2025-08-03 20:07
조회 261
성령을 받으라
행 2:37-42
2025.07.27. 강북꽃동산교회

더위가 무섭습니다. 37도와 38도는 체감이 다르네요. 아스팔트 위를 걷다 보면 바닥에서 불이 올라 올 것만 같습니다.
2천년전 예루살렘 도시를 뜨겁게 달군 일이 있습니다. 그날 유대인들은 도시로 몰려왔고 어느 한 방에 120명 정도가 모여 있었습니다. 그날 불은 120명이 모인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120명의 사람들은 같은 뜻을 가지고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는데, 갑작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들 뛰고 일어나더니 울고불고 이상한 말들을 하는 것입니다.

때는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 오순절인데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이 절기를 지키려왔다가 난리치는 이 사람들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 보습을 본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미쳤다. 새 술에 취했다.” 그러면서 놀라는 것은 저들이 하는 말이 들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냐 저들은 갈리릴 사람들이 아니냐”
성경은 저들의 반응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6절에 소동하여 7절에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4절에 저들의 말을 듣게 됨이 어찜이냐 11절에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듣는도다 놀라며 당황하여 어찌된 일이야 13절에 어떤 이들은 조롱했다.
그런데 이 일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아직 절기가 끝나지 않았을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더니 길거리 광장에서 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본문에는 베드로와 열한사도가 서서 소리를 높여 말했다고 했는데 그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1) 우선 우리가 취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제 삼시라는 말입니다. 선지가 요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7~18절은 요엘선지가가 예언한 내용입니다. (행 2:17-18, 개정)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라고 했고 중요한 것은 21절입니다. (행 2:21, 개정)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2) 그리고 예수를 말했습니다. (행 2:23, 개정)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일은 다시 일어 있습니다.갈릴리 사람이 아니냐고 조롱하고 심지어 미쳤다 새 술에 취했다고 했던 저들이 베드로와 사도들 앞에 오더니 무릎을 꿇고 이런 말을 합니다. (행 2:37, 개정)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왜 덜 이러는 것입니까?

(행 2:3, 개역)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최대 절기인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120명의 성도들이 모인 곳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 것입니다. 그 불이 모여 있는 사람들 머리에 하나씩 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들 뛰고 난리를 친 것입니다.

그러면 그날 하늘에서 내려온 불은 무슨 불이었기에 불을 받은 사람들이 요동을 차는 것이고 그 요동을 본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느냐는 것입니다.
그 불은 무슨 불이었습니까? 성경은 그 불의 정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4절입니다. (행 2:4, 개정)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들이 일어고 울고 불고하고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이 임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람들이 거리로 나가서 외쳐 말하는 것 역시 그 연장에 있는 것입니다. 경건한 유대인이 놀라고 베드로와 사도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성령이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오셨는데 왜 오셨다는 것입니까? 본문에는 성령이 오신 이유에 대해서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7절입니다. (행 2:21, 개정)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했고, 40절에는 (행 2:40, 개정)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리해 보았더니 불은 성령인데, 성령은 인생에 구원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성령이 구원과 관계가 있다니 무슨 말입니까? 구원은 예수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구
원은 예수를 믿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시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세상에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가셨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말입니다. 예수님 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사도들은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으라니 무슨 말입니까?

오늘 설교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 성경 구절은 오늘 설교에 정확한 답변에 될 것입니다.
(행 2:21, 개정)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구원을 받는데 성령을 받아야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라는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는 자를 말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령의 감동한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를 자주 할 자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저주하거나 벌하시기 위해서 오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요 3:17, 개정)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다음 구절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은 지신의 힘으로나 지식으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도와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예수를 알게 하시고 부르게 하시고 믿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부르고 그를 사랑이시라고 말하고,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심판하기 위해서 아라는 것을 믿고 말하는 것은 성령의 도움심 이었습니다. 또한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 이심이 믿어지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오늘 경건한 유대인들이 사도들 앞에 와서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이제부터는 사도들의 답을 들을 차례입니다. 사도들은 저들에게 무어라고 할까요? (행 2:38,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그러면 (행 2:40, 개정)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해석해 보면 간단합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을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단어 하나가 새로 보이지요?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좀 어렵습니다.이 말씀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려고 할 때 두 가지 점을 잘 관찰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이 말이 어려운 것은 “성령의 선물”이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의 선물이라고 하면, ‘성령이 주시는 선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우리말에서 성령을 주체로 해석하는 용례가 가장 많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본문을 “그리하면 성령이 주시는 선물을 받으리니”라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해석도 많이 쓰입니다. 바로 성령을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해석하는 용례입니다. 그래서 ‘성령이’가 아니라 ‘성령을’로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럴 때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게 됩니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어떤 용례가 맞을까요? 문맥을 잘 살펴보면 두 번째가 맞습니다. 이 말씀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받고 난 뒤 베드로가 선포한 말씀입니다. 아직 성령이 주시는 선물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입니다.
성령이 주체가 되어 주시는 선물은 다음입니다. (고전 12:7-15, 개역)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그래서 본문에서 성령의 선물이란! 성령 자체를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이 마음에 들어오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그리하면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회개하고 세례받으면 그 결과로 성령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리고로 해석하면 우리가 회개하고 세례받으면 그 결과로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실 때 받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회개하고 세례받는 것이 성령을 받는 전제 조건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세례받으면 자동적으로 성령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으로 상호연결은 되어있지만 인과관계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선물이라는 말의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선물은 주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무엇을 줄까? 언제 줄까? 어떻게 줄까? 그 모든 것이 다 주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 그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마음먹은 사람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작정하신 때에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셔야 할 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실까요? 여기에 성령을 받고자 하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회개’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실 때 그 사람이 회개했는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령을 주시려고 해도 회개하지 않으면 주시지 않으십니다. 꼭 주셔야 할 사람이라면 그가 회개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왜 성령을 받을 때 회개가 중요할까요?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같은 사건을 반복해서 행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요 2:13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처음 예루살렘 성전을 찾으셨을 때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온유하신 분이 화를 내시면서 상을 들러 엎으시고 채찍으로 가축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마 21:12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고난주간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다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첫 번째 성전 청결사건과 같은 행동을 하셨습니다. 이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가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더러워진 것을 참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더럽혀졌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성전이 더러워지면 기도를 제대로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더러워져 예배가 제대로 드려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거룩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전이 더럽혀지면 그곳에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고전 3:16-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성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룩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그 안에 성령이 거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더렵혀지면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더렵혀지면 이미 성령을 받았더라도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

회개는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악된 생각, 악한 마음, 저지른 죄를 씻어내는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다 내쫓으신 것처럼 걷어내고 쓸어내고 씻어내는 것입니다. 회개는 성전을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기도를 회복하는 일입이다. 예배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나를 강도의 굴에서 하나님의 성정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속사람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전이라는 생각으로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눈으로 보고 깨끗하게 청소를 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성령을 받을 수 있고, 성령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적용
천수답이라고 부르는 논이 있습니다. 벼농사에 필요한 물을 오직 빗물에만 의존하는 논을 말합니다. 이런 논이 실제로 있습니다. 저수지나 강으로부터 물을 끌어대거나 지하수를 이용할 수 없어서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에만 의존하여 농사는 짖는 논이 말합니다.
이 천수답은 모내기 철인데도 비가 오지 않으면 모내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모를 낸 후에도 비가 충분치 않으면 안정적인 수확량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천수답 농부들은 그래서 늘 하늘만 바라보며 농사를 짓게 됩니다. 비가 와야 할 때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애타게 하늘만 바라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간절한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사실 우리의 그리스도인들의 심정은 천수답 농부들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비를 주셔야만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께서 은혜를 주셔야 성도로서 생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열매는 은혜 없이 맺기 어렵습니다. 주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야만 영적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은사와 능력을 주셔야만 열매 맺는 영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을 ‘천수답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주간도 하늘의 은혜를 사모하며 승리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