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들고 이긴 사람 | 출애굽기 17:8-13
작성일
2025-08-03 19:08
조회
247
손을 들고 이긴 사람
출애굽기 17:8-13
20250803 강북꽃동산교회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인으로 자라는 동안 30가지가 넘은 예방접종을 맡는답니다. 예방접종은 세상에 보이지 않는 각종 질병으로부터 우리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수없이 많은 세상 풍파와 질병으로부터 싸워야 합니다.
한 사람이 교회에 등록해서 천국에 가는 동안 5~9단계의 성장 과정을 거칩니다. 그것을 우리는 신앙의 서정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장로교는 신앙의 서정 9단계가 있습니다. 소명, 중생, 회개, 칭의, 수련, 신앙, 성화, 견인, 영화, 좀 순서가 바꾸어서 그렇지 다른 교단에도 다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성도가 교회에 나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집사 권사 장로가 되고 죽으면 천국에 가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 돌봐야 하고 자라게 해야 합니다. 한 사람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수없이 많은 영적인 풍파와 시련 마귀의 시험과 싸워야 합니다. 스스로 성도가 되고 구원을 받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요셉과 마리아의 품에서 자라셨습니다. 어린 시절 요셉과 마리아의 돌봄으로 때로는 애굽으로 피신도 했고 위험한 고비들을 넘기셨습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수 없이 많은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한 주간의 승리의 삶을 살고자 우리는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항해 가는 것은 하는 우리의 신앙의 서정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저들이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서 나온 것은 신앙의 서정으로 보면 첫 번째 단계인 소명의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저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 부름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들을 구원의 백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저들이 애굽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나왔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저들에게는 아직 구원의 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홍해 바다 앞에 선 저들은 죽은 몸이었습니다. 저들 앞에 바다가 있고 뒤에는 원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살길을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는 길이 아닙니다.
저들이 사는 길은 바다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저들은 그 죽음의 바다에 들어갔지만, 오히려 살아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서정에서 두 번째 단계인 거듭남의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인하심과 돌보심을 받으며 매일 매일 조금씩 성장하며 광야의 여정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하나님이 먹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저들의 가는 길은 늘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늘 저들이 가는 길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우리들의 가는 신앙의 여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와 있는 곳은 르비딤입니다. 이들은 여기서 또 한 번의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 광야에서 짐을 챙겨 이곳에 장막을 쳤는데, 먹을 물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 르비딤은 오아시스가 있는 전략지역이라고 합니다. 사막을 지나는 사람이나 짐승에게 물을 공급해 주는 전략지역이라고 그런데 물이 없다는 것은 아마도 이들이 그 전략지역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은 물 때문에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조금만 더 들어가서 장막을 치면 될턴데 거기에다 장막을 치게 했다고 하면서 백성들과 모세와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모세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17장 2절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바위를 내려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민수기 20:10)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바위가 깨지면서 물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백성과 짐승이 물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물 문제는 해결됐습니다.
그런데 저들에게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칼과 창을 든 아말렉 부족이 오더니 내 땅에 한 발짝도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출 17:8, 개정)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스라엘이 가는 길에 일어나는 일들은 무엇인가요? 마실 물이 없다고 동쪽끼리 싸우고 저들이 가야 할 길을 가로막고 싸우자고 덤비는 일들은 무엇입니까?
이럴 때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 앞을 가로막는 일들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 앞에는 여전히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은 사실이지만, 자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2025년 신앙의 여정이 시작되어 반이 넘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새로운 시간, 새로운 장소일 수 있지만, 어떤 것은 그동안 경험한 것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올해도 아무 일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만일 수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려면 반드시 르비팀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아말렉 사람들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로선 난감한 일입니다. 이제까지 온 길을 돌아갈 수도 없고, 우회할 수도 없는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정면 돌파하기로 했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전쟁으로 밖에는 해결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은 전쟁에 경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으로 매우 전투적이며 공격적인 부족이었습니다. 또 한 그들은 무신론자들이면서, 싸움을 즐기는 자들이며, 특히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방해한 집단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저들은 이스라엘이 이곳으로 오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래서 모세는 이런 전략을 짰습니다.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적들과 싸우게 하고, 자기는 아론과 훌 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전략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우리는 이것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것이 전쟁이든 회사의 일이든 가정에 일이든 부서에 한 일이든 말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지만, 지금 이 말씀은 영적 가나안을 향해서 전진하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그리고 세상에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예비하신 영적인 가나안을 향해서 전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신앙 생활에는 교회생활, 직장생활, 사업, 학업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우리가 꼭 가야 하는 길에 복병이 있고 저들은 우리의 길을 막고 못 가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저들이 가지고 있는 인맥, 권력, 돈, 이런 것을 상대할 수 없는 능력도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모세는 어떻게 했을까요?
8절입니다. (출 17:8, 개정)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라고, (출 17:9, 개역)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자신들이 가는 길을 막고 있는 저들과 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세우고 싸우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위에 상황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면 조금 복잡한 생각이 듭니다. 특히 싸워야 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싸움은 세상 사람들과는 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싸움은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마귀들과 싸우는 영적 전쟁이 아닌, 영적 전쟁일 수 있으나 실제 사람이 죽고 죽이는 진짜 싸움이지 않습니까?
단순히 마귀가 우리를 괴롭히는 영적전쟁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세력이 우리가 가는 길을 방해하고, 나에게 불이익을 주고 총과 칼을 쏘고 던질 수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단순히 우리를 천국에 못 가게 방해하는 그런 일이 아니고 내 삶과 생계에 도전하는 일 일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실제로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군대를 이끌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어떤 상징적 의미로만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실제와 같은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호수아가 이끄는 군대는 저들을 과연 이길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세요? 이스라엘이 이길까요? 모세는 무슨 생각으로 저들과 전면전을 하려는 것일까요? 물론 모세의 선택은 전면적 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이기고 지는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습니다.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여호수아가 백성들 가운데 싸울만한 모든 사람을 다 선택하여 아말렉과 정면전을 치루기 위해서 적진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군대와 아말렉이 전면전을 치루고 있습니다. 밀고 밀리는 중에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군대가 밀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소설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도 소설을 쓰려고 합니다. 바로 그때 모세가 손을 들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지고 있을 때 모세가 손을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지금 전쟁 중인데 모세가 왜 손을 드는 것이지요? 모세가 적에게 항복한 것입니까? 모세가 왜 손을 드는 것입니까? 지도자가 전쟁 중에 손을 든다는 것은 항복 말고 뭐가 있을까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일이 상식일까요? 그 전쟁이 크든지 작든지 지도자가 손을 든다는 것은 항복의 의미가 아닐까요? 장수는 죽어도 손을 안 듭니다. 왕도 손을 안 듭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의 왕과 같은 존재 모세가 손을 들었습니다. 이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모세는 왜 손을 든 것입니까? 여러분은 아세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세가 손을 들었는데 여호수아의 군대가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항복은 아닌데 도대체 높이 든 모세의 손이 무엇을 무엇인가요? 혹, 모세와 여호수아가 서로 짜고 신호를 보내는 것은 아닌가요? 야구에서 투수 포수가 약속 한 그런 싸인 아닙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모세가 손을 들면 여호수아가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진다는 말입니까? 혹 그거 아니면 모세의 손에 능력이 있어 여호수아를 향해서 불로 불로 하면 여호수아가 힘을 얻는 것입니까? 무엇입니까?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모세의 손이 여호수아의 쪽으로 향하지 않아도 모세의 손만 올라가면 여호수아가 이겼습니다. 그래서 함께 갔던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안도록 돌로 바쳤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여호수아가 이끄는 군대가 이겼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정리해 보면 여호수아가 잘 싸우고 못 싸우는 것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 전쟁은 모세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면 모세의 손에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 전쟁을 다 위임했습니까? 그러면 모세가 죽으면 이스라엘은 늘 지겠네요? 과연 그럴까요? 16절입니다. (출 17:16, 개정)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 전쟁의 승패는 여호수아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모세에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싸우셨고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실 것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습니다. (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그러면 모세가 들고 있는 이 손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또 소설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모세가 손을 들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모세가 손을 들기를 원하셨을까? 물 때문에 백성들과 싸운 일 때문입니다. 화내며 지팡이로 바위를 친 사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것을 오늘 2절에서 “여호와를 시험한 일이다”라고 했습니다.민수기 20장 10절에서는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목적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은 저가 하나님 앞이 항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은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구원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에 따르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14절입니다. “이일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 귀에 외워 들리라”했습니다. 왜 일까요? 아말렉과의 전쟁은 여호수아가 잘해서 이긴 것이 아니고 모세가 회개하는 항복을 했기에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셨다는 것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렇게 생각할까요? 자기는 자기가 열심히 해서 이겼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론과 훌을 증인으로 함께 보냈던 것 아니겠습니까?
적용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먼저 항복하기를 바랍니다. 가장이 먼저 항복하기를 바라지 않을까요? 가장이 먼저 항복하기를 바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손을 든다는 것은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항복해야 이기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 오늘 우리 신앙생활의 성공 비결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 앞을 가로막는 일들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이스라엘 아말렉을 이긴 것은 여호수아의 실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모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모세의 손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손을 들기 원하십니다. 손을 든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뜻입니다. 굴복한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 참평화를 위해 우리가 먼저 손을 듭니다. 미래의 행복을 우해서 우리 모두 손을 듭시다. 마음을 꿇읍시다. 그러면 승리할 줄 믿습니다.
찬송가 두 손들고~
출애굽기 17:8-13
20250803 강북꽃동산교회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인으로 자라는 동안 30가지가 넘은 예방접종을 맡는답니다. 예방접종은 세상에 보이지 않는 각종 질병으로부터 우리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수없이 많은 세상 풍파와 질병으로부터 싸워야 합니다.
한 사람이 교회에 등록해서 천국에 가는 동안 5~9단계의 성장 과정을 거칩니다. 그것을 우리는 신앙의 서정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장로교는 신앙의 서정 9단계가 있습니다. 소명, 중생, 회개, 칭의, 수련, 신앙, 성화, 견인, 영화, 좀 순서가 바꾸어서 그렇지 다른 교단에도 다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성도가 교회에 나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집사 권사 장로가 되고 죽으면 천국에 가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 돌봐야 하고 자라게 해야 합니다. 한 사람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수없이 많은 영적인 풍파와 시련 마귀의 시험과 싸워야 합니다. 스스로 성도가 되고 구원을 받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요셉과 마리아의 품에서 자라셨습니다. 어린 시절 요셉과 마리아의 돌봄으로 때로는 애굽으로 피신도 했고 위험한 고비들을 넘기셨습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수 없이 많은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한 주간의 승리의 삶을 살고자 우리는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항해 가는 것은 하는 우리의 신앙의 서정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저들이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서 나온 것은 신앙의 서정으로 보면 첫 번째 단계인 소명의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저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 부름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들을 구원의 백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저들이 애굽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나왔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저들에게는 아직 구원의 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홍해 바다 앞에 선 저들은 죽은 몸이었습니다. 저들 앞에 바다가 있고 뒤에는 원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살길을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는 길이 아닙니다.
저들이 사는 길은 바다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저들은 그 죽음의 바다에 들어갔지만, 오히려 살아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서정에서 두 번째 단계인 거듭남의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인하심과 돌보심을 받으며 매일 매일 조금씩 성장하며 광야의 여정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하나님이 먹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저들의 가는 길은 늘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늘 저들이 가는 길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우리들의 가는 신앙의 여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와 있는 곳은 르비딤입니다. 이들은 여기서 또 한 번의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 광야에서 짐을 챙겨 이곳에 장막을 쳤는데, 먹을 물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 르비딤은 오아시스가 있는 전략지역이라고 합니다. 사막을 지나는 사람이나 짐승에게 물을 공급해 주는 전략지역이라고 그런데 물이 없다는 것은 아마도 이들이 그 전략지역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은 물 때문에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조금만 더 들어가서 장막을 치면 될턴데 거기에다 장막을 치게 했다고 하면서 백성들과 모세와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모세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17장 2절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바위를 내려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민수기 20:10)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바위가 깨지면서 물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백성과 짐승이 물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물 문제는 해결됐습니다.
그런데 저들에게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칼과 창을 든 아말렉 부족이 오더니 내 땅에 한 발짝도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출 17:8, 개정)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스라엘이 가는 길에 일어나는 일들은 무엇인가요? 마실 물이 없다고 동쪽끼리 싸우고 저들이 가야 할 길을 가로막고 싸우자고 덤비는 일들은 무엇입니까?
이럴 때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 앞을 가로막는 일들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 앞에는 여전히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은 사실이지만, 자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2025년 신앙의 여정이 시작되어 반이 넘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새로운 시간, 새로운 장소일 수 있지만, 어떤 것은 그동안 경험한 것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올해도 아무 일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만일 수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려면 반드시 르비팀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아말렉 사람들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로선 난감한 일입니다. 이제까지 온 길을 돌아갈 수도 없고, 우회할 수도 없는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정면 돌파하기로 했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전쟁으로 밖에는 해결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은 전쟁에 경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으로 매우 전투적이며 공격적인 부족이었습니다. 또 한 그들은 무신론자들이면서, 싸움을 즐기는 자들이며, 특히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방해한 집단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저들은 이스라엘이 이곳으로 오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래서 모세는 이런 전략을 짰습니다.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적들과 싸우게 하고, 자기는 아론과 훌 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전략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우리는 이것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것이 전쟁이든 회사의 일이든 가정에 일이든 부서에 한 일이든 말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지만, 지금 이 말씀은 영적 가나안을 향해서 전진하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그리고 세상에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예비하신 영적인 가나안을 향해서 전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신앙 생활에는 교회생활, 직장생활, 사업, 학업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우리가 꼭 가야 하는 길에 복병이 있고 저들은 우리의 길을 막고 못 가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저들이 가지고 있는 인맥, 권력, 돈, 이런 것을 상대할 수 없는 능력도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모세는 어떻게 했을까요?
8절입니다. (출 17:8, 개정)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라고, (출 17:9, 개역)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자신들이 가는 길을 막고 있는 저들과 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세우고 싸우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위에 상황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면 조금 복잡한 생각이 듭니다. 특히 싸워야 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싸움은 세상 사람들과는 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싸움은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마귀들과 싸우는 영적 전쟁이 아닌, 영적 전쟁일 수 있으나 실제 사람이 죽고 죽이는 진짜 싸움이지 않습니까?
단순히 마귀가 우리를 괴롭히는 영적전쟁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세력이 우리가 가는 길을 방해하고, 나에게 불이익을 주고 총과 칼을 쏘고 던질 수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단순히 우리를 천국에 못 가게 방해하는 그런 일이 아니고 내 삶과 생계에 도전하는 일 일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실제로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군대를 이끌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어떤 상징적 의미로만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실제와 같은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호수아가 이끄는 군대는 저들을 과연 이길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세요? 이스라엘이 이길까요? 모세는 무슨 생각으로 저들과 전면전을 하려는 것일까요? 물론 모세의 선택은 전면적 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이기고 지는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습니다.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여호수아가 백성들 가운데 싸울만한 모든 사람을 다 선택하여 아말렉과 정면전을 치루기 위해서 적진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군대와 아말렉이 전면전을 치루고 있습니다. 밀고 밀리는 중에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군대가 밀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소설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도 소설을 쓰려고 합니다. 바로 그때 모세가 손을 들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지고 있을 때 모세가 손을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지금 전쟁 중인데 모세가 왜 손을 드는 것이지요? 모세가 적에게 항복한 것입니까? 모세가 왜 손을 드는 것입니까? 지도자가 전쟁 중에 손을 든다는 것은 항복 말고 뭐가 있을까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일이 상식일까요? 그 전쟁이 크든지 작든지 지도자가 손을 든다는 것은 항복의 의미가 아닐까요? 장수는 죽어도 손을 안 듭니다. 왕도 손을 안 듭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의 왕과 같은 존재 모세가 손을 들었습니다. 이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모세는 왜 손을 든 것입니까? 여러분은 아세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세가 손을 들었는데 여호수아의 군대가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항복은 아닌데 도대체 높이 든 모세의 손이 무엇을 무엇인가요? 혹, 모세와 여호수아가 서로 짜고 신호를 보내는 것은 아닌가요? 야구에서 투수 포수가 약속 한 그런 싸인 아닙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모세가 손을 들면 여호수아가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진다는 말입니까? 혹 그거 아니면 모세의 손에 능력이 있어 여호수아를 향해서 불로 불로 하면 여호수아가 힘을 얻는 것입니까? 무엇입니까?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모세의 손이 여호수아의 쪽으로 향하지 않아도 모세의 손만 올라가면 여호수아가 이겼습니다. 그래서 함께 갔던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안도록 돌로 바쳤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여호수아가 이끄는 군대가 이겼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정리해 보면 여호수아가 잘 싸우고 못 싸우는 것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 전쟁은 모세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면 모세의 손에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 전쟁을 다 위임했습니까? 그러면 모세가 죽으면 이스라엘은 늘 지겠네요? 과연 그럴까요? 16절입니다. (출 17:16, 개정)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 전쟁의 승패는 여호수아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모세에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싸우셨고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실 것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습니다. (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그러면 모세가 들고 있는 이 손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또 소설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모세가 손을 들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모세가 손을 들기를 원하셨을까? 물 때문에 백성들과 싸운 일 때문입니다. 화내며 지팡이로 바위를 친 사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것을 오늘 2절에서 “여호와를 시험한 일이다”라고 했습니다.민수기 20장 10절에서는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목적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은 저가 하나님 앞이 항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은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구원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에 따르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14절입니다. “이일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 귀에 외워 들리라”했습니다. 왜 일까요? 아말렉과의 전쟁은 여호수아가 잘해서 이긴 것이 아니고 모세가 회개하는 항복을 했기에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셨다는 것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렇게 생각할까요? 자기는 자기가 열심히 해서 이겼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론과 훌을 증인으로 함께 보냈던 것 아니겠습니까?
적용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먼저 항복하기를 바랍니다. 가장이 먼저 항복하기를 바라지 않을까요? 가장이 먼저 항복하기를 바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손을 든다는 것은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항복해야 이기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 오늘 우리 신앙생활의 성공 비결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 앞을 가로막는 일들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이스라엘 아말렉을 이긴 것은 여호수아의 실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모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모세의 손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손을 들기 원하십니다. 손을 든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뜻입니다. 굴복한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 참평화를 위해 우리가 먼저 손을 듭니다. 미래의 행복을 우해서 우리 모두 손을 듭시다. 마음을 꿇읍시다. 그러면 승리할 줄 믿습니다.
찬송가 두 손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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